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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

허묵유연




허묵유연 



1.


허묵은 ‘어떤’ 사람들을 경멸했다. 듣는 대로 휘둘리는 귀, 타인의 행동을 살피느라 분주한 눈빛, 상황을 모면할 수 있길 바라며 짓는 습관적인 미소. 사실, 그가 경멸하는 건 대다수의 사람들이었다. 보다 솔직해져 보면, 그가 만들어낸 기이한 틀에 들어맞는 사람은 정말이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물망처럼 넓고 얄팍한 관계 내에서 허묵이 걸러낼 수 있는 얼굴은 무척 적었다. 기껏해야 한 손이나 채울 수 있을까.


유연은 그러한 ‘대다수’에 속하지는 않았다. Evol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점 덕분에 허묵에게 유연은 곁에 두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허묵은 그 사실을 퍽 신선한 자극으로 느꼈다. 처음에는.


유연과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접근인데도 그랬다. 교수라는 직함을 달기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을 오해하고, 진실을 알게 되자 당황한 얼굴로 사과를 건네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하는 말을 듣다가도 이따금씩 자신이 옳은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지 헷갈리는 눈빛을 하고, 하지만 종내에는 그가 정말로 학계의 권위자임을 받아들여 존경과 감탄이 담긴 얼굴로 인사하는, 허묵이 너무나 많이 겪은 나머지 하나의 표본으로 간추릴 수도 있을 패턴을 유연은 성실히도 답습했다.


그런데 딱히 질리거나 지긋지긋한 감정이 들지 않아서, 어느 하나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유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허묵은 모처럼 활력을 느꼈다.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 반짝이는 눈동자 때문일까? 스스로 떠올렸다고는 믿을 수 없는 싱거운 감상이 짜증스럽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 여자의 대체 어떤 면이 색다른 건지 진지하게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허묵을 쿡, 파고들어 뿌리를 내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유연은 허묵의 좁고 반듯한 틀 안에 들어맞지 않았다. 유연과 가까워질수록, 허묵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견을 구하러 온 유연에게 길고 유쾌하지 못한 설명을 늘어놓을 때면 유연의 밝은 눈동자는 이따금씩 곤란한 빛을 띠면서도 허묵의 손끝을 열심히 좇았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무언의 동의를 구하듯 때때로 눈을 맞추며 짓는 미소의 의도를, 허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익숙지 못한 영역을 알아갈 때면 누구나 서툰 모습을 보이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불쾌한 감정이 기어올랐다. 그래, 당신도 똑같군. 당연하게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폭발하듯 성장한 불쾌감은 이제는 먼발치에 유연을 닮은 갈색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만 보아도 구역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 어딘가를 세차게 두드렸다. 지독한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무뎌지지 않아서, 유연을 만나는 날이면 허묵은 괴롭도록 속을 앓았다.


그래서 허묵은 유연과 더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해가 되는 감정만을 전해주는 존재는 좋지 않았다. 유연이 꼭 필요한 사람이기에 멀리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차단하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도 허묵은 ‘불쾌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익숙했다. 마음속 유연의 모습을 어둡고 좁은 구석으로 밀어넣으며 허묵은 차차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다.


자문은 계속되었지만 주로 허묵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던 대화는 서서히 전화상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이메일로 옮겨갔다. 허묵이 바쁘다는 구실로 거절한 전화가 두 자리 수에 가까워지자 유연은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게 되었다. 발랄한 이모지를 곁들여 오곤 하던 메시지는 점차 조심스럽고 사무적으로 바뀌었다. 유연을 대하는 허묵의 태도는 여전히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매끄러운 유리막을 한 겹 덧입은 것처럼 이질적이었고, 어쩌면 유연도 그러한 점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허묵은 창가에 서서 틈 하나 없이 드리운 블라인드를 손끝으로 걷어냈다. 눈길이 간신히 비집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간격이 만들어졌다. 빠듯한 틈새 사이로 허묵은 바깥 세상을 내다보았다. 가을 특유의 얼룩 한 점 앉지 않은 맑은 하늘이 보인다. 시선을 내리자 거리 위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잿빛 점 여러 개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허묵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창밖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고 이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비딱하게 턱을 괴고 앉아 다시 활자 위로 시선을 내렸지만 애써 붙잡은 집중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책상 한 편에 놓인 휴대전화 액정이 소리 없이 밝아지기 무섭게 허묵은 고개를 들었다. 흘긋 들여다본 액정엔 낯익은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허묵이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휴대전화를 끌어왔다.



<교수님, 유연입니다. 어제 보내주신 메일 중 적용하기 어려운 사항이 있어 추가로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어렵지 않으시다면, 언제쯤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편하신 방법을 알려주시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격식을 갖추어 쓰인 메시지를 허묵은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유연이 더 이상 그를 스스럼없이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필요하게 가까운 관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이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어쩐지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허묵의 손끝이 책상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세 번 두드렸다. 잠시 삭제 버튼 위에 머물렀던 손가락은, 그러나 충동을 억누르며 빠르게 움직여 답신을 작성했다.



<만나서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일곱 시까지 회사로 갈게요.>



금세 작성을 마친 메시지를 발송하자마자 허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서 셔츠 단추를 하나 더 끌러냈다. 불현듯 길을 잃은 아이 같은 이유 모를 막막함이 찾아들었다. 창문을 틀어막은 블라인드가 달갑지 않아져 충동적으로 걸음을 떼던 중, 허묵은 불시에 몸을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기울어지며 허벅지께에 둔한 통증이 부딪쳤다.



“아.”



낮게 신음한 허묵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어지럼증을 견디던 중 문득 불길한 예감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시험하듯 눈을 내리감자, 눈꺼풀 안쪽 검은 세상이 빙그르르 가파른 춤을 추었다.


낮게 내쉬는 한숨에 감출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몸이 한계를 호소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허묵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곧바로 휴대전화를 찾았다. 화면을 켜자, 야속하게도 한 발 먼저 도착한 답장이 그를 반겼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허묵은 유연의 이름을 한 번, 그리고 그 위로 표시된 현재 시각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후 세 시 칠 분. 유연의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에 들어서는 데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한 시간 정도로 계산하면, 세 시간 남짓은 여유가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기 무섭게 허묵은 몸을 바로 세우고는 연구실 한쪽에 놓여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정도 그를 괴롭히는 증세는 드문 만큼이나 아주 집요했기에 다른 때 같았다면 징후를 깨닫자마자 연구소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연구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연구할 사항이 있다는 간단한 통지만을 남긴 채, 그는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며칠이고 집에 처박혀 지독히도 앓았다. 열병이 물러간 다음엔 평소보다 넥타이를 조금 더 밀어올리고 손목에서 헛도는 시계를 다시 조절해야 할 정도로 몸이 수척해지곤 했다. 얼굴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다고 말하는 동료 교수에게 연구에 몰두하느라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했다고 둘러대고 나면, 허묵을 찾아오는 연례 행사는 늘 그랬듯 그럭저럭 순탄하게 지나갔다.


이번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감정을 소모해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허묵은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다섯 시 사십 분으로 알람을 설정했다. 휴대전화를 소파 옆 테이블에 올려두고 소파 위로 길게 몸을 뉘었다. 눈꺼풀을 내리기 무섭게 온몸이 한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유연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몸이 버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의 의식을 스친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






“……교수님, 교수님? 괜찮으세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조심스럽게 어깨 근처를 잡고 흔드는 손길. 허묵은 무저갱에서 솟아나듯 힘겹게 의식을 회복했다. 사고가 멈춘 듯한 멍한 찰나가 지나가고 난 후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허묵은 담요 아래에 가려진 왼쪽 손을 움직여 으스러뜨릴 듯이 주먹을 쥐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를 향해 몸을 숙인 채 걱정스러운 눈치로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유연 씨.”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일단 제 손이라도 잡아 보세요.”



유연이 턱없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진심인 듯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실없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허묵은 황급히 내리눌렀다. 의식을 잃다시피한 후유증인지 평소와는 달리 정신이 구름 위를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까지도 손을 거두지 않고 있는 유연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허묵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소파를 짚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간단한 동작인데도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이 온몸이 아우성을 쳐댔다.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자, 다행히도 목소리만큼은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지금이 몇 시죠?”

“지금이…… 여덟 시 십 분이네요.”



허묵은 낮게 탄식했다. 휴대전화를 집어들어 켜 보자 야속하게도 제 시간을 한참 지나 버린 알람이 화면에 거무죽죽한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래로는 밀린 연락이 한가득이었다.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허묵은 탁, 소리가 나도록 휴대전화를 엎어버렸다.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흐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폐를 끼쳤네요. 연락이 안 되면 그냥 가지 그랬어요,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교수님, 지금 아프신 거죠?”



어딘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고개를 든 허묵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빛나는 눈과 마주쳤다. 약속이 멋대로 깨진 데 대한 불쾌감 같은 건 전혀 없는 듯한 맑은 얼굴을 보자, 허묵은 외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또다. 가슴 안에서 메슥거리는 느낌이 치미는 걸 느끼며 허묵은 살짝 몸을 수그렸다.



“……네, 조금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몇 번 전화해보고 말았을 텐데, 어쩐지 교수님은 걱정돼서 올 수밖에 없었어요.”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았어요. 유연이 확신에 찬 말투로 중얼거렸다. 허묵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찰나 동안 유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무수히 산란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어딘지 변질되어서, 이제는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날이 바짝 선 칼끝이 살갗 위를 아슬아슬하게 누비는 것 같기도 했다.



“교수님?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문이 잠겨 있었을 텐데요.”



허묵은 고개를 들며 다소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그를 살피려고 몸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인지 유연의 얼굴이 예상보다 훨씬 가까웠다. 허묵의 차가운 눈동자를 정면에서 맞닥뜨린 유연이 그제야 얼굴을 굳혔다. 유연이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관리실에 여쭤봤더니 아직 교수님이 퇴근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주고받은 메시지 내역을 보여 드렸더니 직접 올라가 보라며 열쇠를 주셨어요.”

“…….”

“그러면 안 됐던 건가요? 전 교수님이 걱정돼서…….”

“아뇨. 아니에요.”



허묵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서툴게 굴지 말자. 유연에게 괜한 긴장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지금 정도의 인상을 유지하는 게 가장 나은 길임을 알고 있었다.



“질책한 게 아니에요. 말이 좀 날카롭게 나간 것 같은데…… 사과할게요.”

“아…….”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날 걱정했다니 기쁜데요.”



고개를 들고, 허묵은 유연을 향해 늘 짓곤 하던 다정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유연의 얼굴에도 반사적으로 미소가 스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편한 기색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소파를 짚은 허묵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울 때였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유연의 말에 곧바로 되묻지 못한 건 그 목소리에 담긴 의미심장한 기색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탓이었다. 허묵은 일어나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힘을 소진한 몸이 휘청대는 걸 느꼈다. 유연의 말을 끊고 싶지만 목소리를 끌어올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유연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이 두 눈에 틀어박혔다.



“요즘 연락에 조금 소홀해지셨던 것도…… 몸이 안 좋아서 그러셨던 건가요?”

“…….”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싫어지셨던 건 아닌 거죠?”



한 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이미 들어버린 말을 귀에서 빼낼 방법도 없다. 허묵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유연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선 여자의 얼굴 위로 불현듯 가지각색 꽃의 빛깔이 흐드러지는 것 같았다.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건지 시야에 온통 뿌연 장막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안에 선 유연은, 유독…….



“교수님은 조금 알기 어려운 분이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시라는 건 알아요. 교수님과 오랫동안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훌륭한 자문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하는 빈말은 아니에요. 모두 진심이에요.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웃는 유연의 얼굴에선 어느새 그늘이 모두 걷히고, 티 한 점 없는 맑은 미소가 비쳤다.


허묵의 시선은 마치 사로잡힌 것처럼 유연에게 붙박인 채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제는 대답을 해야 할 때였다. 늘 그랬듯 적당히 웃고, 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도 같은 마음이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이 광대놀음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허묵은 생각했다.



“……자료 가지고 왔죠. 좀 보여줄래요?”

“교수님?”



유연에게서 빙글 몸을 돌린 허묵이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을 딛는 구둣발 소리가 마치 여러 명이 함께 걷는 것처럼 어지러이 겹쳐 들렸다. 급하게 쫓아온 유연이 팔을 잡아채는 약한 힘에도 허묵은 크게 휘청거렸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이 몸으로 어떻게 일을 하시겠다고……!”

“오늘 약속은 이게 목적이었잖아요.”

“뭐라고요?”

“나도, 당신도, 자료도 모두 있으니 된 거 아닌가요? 피차 바쁜 거 알아요. 난 괜찮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하세요. 절대 안 돼요!”



조금씩 번지기 시작하는 시야 안에서 유연의 얼굴이 걱정에서 황당으로, 그리고 끝내는 분노로 변하는 모습을 허묵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기분이 퍽 나쁘지 않은 건, 어쩌면 몸을 잠식한 열병이 머리까지 파고들고 말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열이 가신 뒤엔 이 순간을 다르게 기억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허묵은 입술을 뗐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럼 집에 갈래요?”

“네? 앗, 교수님!”



무릎을 꺾으며 속절없이 무너지는 몸을 유연이 급히 잡아당겼다. 완전히 지탱할 수는 없어서 허묵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던 허묵은 둔중한 아픔에 겨우 눈을 떴다.



“미안해요. 택시 좀…….”

“병원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을 불러올까요?”

“아니에요. 싫어요……. 그냥 집에 데려다줘요.”

“교수님! 눈 뜨세요, 교수님!”

“걸을 수 있으니까…… 건물 밖까지만…….”



전원을 차단한 기계처럼, 허묵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2.



정신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인식한 건 먼지와 뒤섞인 가죽 냄새였다. 그리고 손등을 꼭 감싸고 있는 작고 따뜻한 손. 볕에 보송하게 마른 듯한 기분 좋은 향기는 가장 마지막에 폐부로 흘러들었다.


허묵은 눈을 떴다. 눈을 뜨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진 못한 건지 시야가 온통 어둡고 좁았다. 비딱하게 기울어진 차창 너머로 빛들이 기다란 궤적을 남기며 스쳐갔다. 어깨에 닿아 있는 체온이 따스했다.



“정신이 드셨어요?”



아주 작게 움찔거렸을 뿐인데 유연이 화색이 된 목소리로 물어왔다. 허묵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움직이긴 한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유연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택시 안이에요. 곧 도착할 테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그렇군요…….”

“병원에 가는 게 맞겠지만 교수님이 싫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모시는 거예요. 집에 약은 있으세요?”

“……네.”



온통 타들어가는 듯한 열감과는 별개로 미적지근한 온기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어깨 위로 툭 떨어지는 허묵의 얼굴을 유연은 밀어내지 않았다. 허묵은 문득 이 순간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조금 놀라 있는 사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게 택시가 멈춰 서며 안온한 정적을 깨뜨렸다.



“도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 기사님, 혹시 아파트 입구까지만 부축…….”

“혼자 갈 수 있어요.”



택시 기사에게 부탁하는 유연의 목소리를 허묵은 고집스레 끊어냈다. 말을 멈춘 유연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인 허묵을 내려다보았다. 허묵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유연은 더 이상 부탁하지 않고 택시비를 계산했다. 택시에서 내린 유연이 빙 돌아와 문을 열자 바깥 공기가 오싹하리만치 싸늘하게 허묵의 목덜미를 덮쳤다.



“가실까요, 교수님? 잘 잡으세요.”



제법 든든한 목소리와는 달리 연약하게만 느껴지는 유연의 팔에 손을 얹으며 허묵은 택시에서 내렸다. 내딛는 발 아래에 젖은 낙엽 뭉치가 밟혔다. 잠든 사이에 가는 비라도 스쳐갔던 건지 짙은 풀내음이 나는 공기는 이전보다 한층 서늘했다. 열 오른 살갗 위로 아릿한 통증이 흘렀다.



“아, 잠시만요.”



문득 걸음을 멈춘 유연이 목에 두른 붉은 니트 머플러를 풀었다. 머플러 한쪽 끝에서 풀려 나온 가느다란 붉은 실이 유연의 흰 손가락에 엉켰다. 바로 다음 순간, 유연이 힘껏 발돋움을 하며 손을 뻗었다. 포근한 향기가 나는 머플러가 허묵의 목 주변을 감싸안았다. 허묵은 가물가물하던 의식이 일시에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놀란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머플러를 꼼꼼히 여민 유연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추워 보이셔서요. 빌려드릴게요.”



허묵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 아직까지도 유연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붉은 실을 떼어냈다. 어, 짧은 탄성을 낸 유연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허묵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유연의 손가락에서 떼어낸 실은 길바닥에 버려지는 대신 허묵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젖은 아스팔트 지면 위에 빛이 맺혔다. 고요한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기다란 꼬리를 그리며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불빛 하나하나가 각각 아름다운 빛깔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꾸만 빛이 발 아래에 밟혔다. 그 빛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서 허묵은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야속하게도 그치지 않고 따라온 빛은 유연의 머리카락마저도 온통 물들이며 일렁거렸다. 허묵의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갑작스레 역겨운 느낌이 가슴속에서 폭발할 듯 물결쳤다.



“교수님, 괜찮으신 거죠? 조금만 더 참으세요.”



허묵이 대답하지 않자, 유연은 그가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까 연구소에서 말이에요. 어쩔 수 없이 경비하시는 분을 불렀어요.”

“…….”

“애써 봤는데 도저히 교수님을 혼자 옮길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래도 혼자만 와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려서 뒷문으로 나왔으니까,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

“교수님은 아프면 조금 애 같은 면이 나오시나 봐요. 평소엔 안 그러시면서 자꾸 고집을 피우시는 걸 보면.”

“…….”

“지금도 보세요. 어휴, 무거워. 아프시니까 봐 드리는 거예요.”

“……흠.”



허묵이 마침내 침묵을 깨며 낮게 신음하자 유연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타박타박 느리게 내딛는 발걸음 사이로 잠시 작은 웃음소리가 섞였다가 사그라들었다.



“이제 진짜로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요.”



그러고 보니 유연의 말투가 조금 어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유연은 그를 보살펴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허묵은 내리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눈꺼풀 아래에서 일순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그런 거라면 지나치게 깜찍한 착각인데. 내가 아무리 약해졌다 한들 당신 하나쯤을 어쩌지 못할까, 유연.


순식간에 퍼져나간 긴장감이 근육을 팽팽히 당기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심장이 박동을 높이기 시작하는 건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껏 오므라들었던 심장이 세차게 피를 뿜어낼 때마다 허묵은 물결치듯 밀려오는 쾌감을 느꼈다. 한껏 음미한 끝에, 그는 달아오른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가슴속에서 들끓는 느낌이 그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을 닮았음을 깨달은 건 바로 지금이었다.


정의하자면 이건 포식자의 욕구였다.


이 여자를 사냥하고 싶다. 송두리째 소유할 수 있다면 더욱 달콤하리라.



“와, 드디어 도착했다. 그죠?”



유연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건 허묵의 차게 식은 손끝이 막 유연의 목덜미를 쥐기 위해 허공으로 치솟으려던 참이었다. 허묵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불현듯 몰려오는 현기증에 몸을 떨었다. 휘황한 빛으로 뒤섞여 엉겨붙었던 시야가 녹아내리면서 늘상 봐오던 풍경이 펼쳐졌다. 특별할 것 없는 무채색의 복도. 곧 작은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 안은 마찬가지로 회색 공간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허묵은 묵묵히 정면을 응시했다. 고도가 치솟을수록 기분은 정반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방금 그건 열병이 야기한 교란일 뿐이다. 어느새 쾌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늘상 따라다니는 공허감이 빈자리를 메웠다. 눈앞은 또 다시 그늘로만 뒤덮인 세계였다.


비이성적이었던 흥분이 가신 탓인지 허묵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다행히도 엘리베이터는 곧 목적 층에 도착했다. 허묵은 유연이 안내하는 대로 잠자코 따라가 문앞에 섰다. 길고 고단한 여정이 드디어 끝을 맞은 셈이었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자, 내내 집 안에 고여있던 공기가 귀가를 반기듯 밀려나와 그를 감쌌다. 도서관에서 맡을 수 있을 법한 묵직한 종이 냄새 사이로 우드 계열의 방향제 향이 배어 있었다.


마침내 몸을 쉴 수 있는 안식처에 도착했는데도, 허묵은 집 안으로 발을 들이는 대신 문을 잡은 채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 건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유연의 얼굴을 중심으로 또 다시 기이한 환시가 펼쳐졌다. 한없이 따뜻하고 밝은 색감이 주변의 그림자를 밀어내며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 가운데 선 유연의 눈은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뇌가 열에 절었다고는 해도, 왜 이 여자에게만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걸까. 희미한 의문과는 별개로 허묵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입술이 열리고, 허묵은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요.”



교수님? 유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허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둡고 색이라고는 없는 곳으로 돌아가 혼자 앓고 싶지 않았다. 이 빛을, 따듯함을 조금만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눈앞의 유연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는 듯싶더니, 이내 웃으며 말한다.



“혼자 있기 싫으신 거면 저희 집에서 잠깐 쉬다 가셔도 괜찮아요.”



유연의 호의가 자신에게는 독과 같다는 사실을 허묵은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화살처럼 찔러들어온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었다. 유연의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허묵은 자신을 되찾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라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온 혈관을 흐르는 피가 일시에 발밑으로 쏠리는 듯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자, 유연이 놀란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섰다.



“교수님?”

“방금 했던 말은 잊어줘요. 미안해요, 들어갈게요.”

“교수님! 왜 갑자기…….”



대답 없이 급하게 닫히는 문을 유연은 팔을 뻗어 붙잡았다. 덜컹, 문이 다른 힘에 가로막히자 허묵이 눈에 띌 정도로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혼란스러운 표정을 마주한 유연은 물음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허묵은 흐트러진 얼굴을 쉽게 가다듬지 못한 채로 멍하니 유연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유연은 그 눈에 담긴 감정이 평소와는 무척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딘지 무방비하고, 약해 보이는 듯한 얼굴. 왠지는 몰라도 타들어갈 것처럼 목이 말라서 유연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축였다. 둘 사이의 좁은 틈으로 갑자기 낯선 긴장감이 흐르는 듯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으시겠어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괜찮아요. 나을 수 있어요.”



허묵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연의 말끝을 잘랐다. 유연은 그 대답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유를 찾기 전에 허묵이 곧장 말을 이은 탓에 생각은 곧 흐려졌다.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고마웠어요.”



유연이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코앞에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도어락이 작동하는 기계음이 멎고 나자 복도는 찜찜한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잠시 눈썹을 찌푸려 보던 유연은 이내 얼굴을 풀고 자신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괜찮으신 걸까…….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마침내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문 손잡이를 쥔 채 허묵은 한동안 그대로 현관에 서 있었다. 문 너머로 희미하게 인기척이 전해졌다. 미미한 소리만으로도 유연의 모습이 눈앞에 환히 그려지는 것 같았다. 문이 닫히고 난 후에도 잠시 동안 그의 집 앞을 떠나지 않던 유연이 별다른 행동 없이 발길을 돌렸을 때, 허묵은 스스로도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한숨을 토해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차분한 걸음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유연은 집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사위가 완전한 고요에 휩싸였다.


허묵은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꺼졌던 조명이 그의 움직임에 반응해 기민하게 빛을 뿜어냈다. 허묵은 차가운 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몸을 널브러뜨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스며들어오던 빛은 곧 사라졌다. 곧 온기라고는 한 점 없는 어둠이 그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이러고 있다간 크게 후회하게 될 텐데. 이번엔 몸살 정도로 지나가지 않을지도 몰라. 머릿속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럼에도 허묵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바라 마지않는 바지. 그게 무엇이든 기력을 소모할 대상이 절실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잡념을 지워줄 수만 있다면 몸을 살라 먹는 고통 따위는 상관없었다.


허묵은 어둠 속으로 자신의 낮고 불안정한 호흡이 흩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 전부터 과도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신음을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머리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허묵은 일어나 집 안쪽으로 들어가는 대신 계속해서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바라던 대로 의식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조금씩 기울어지던 고개가 완전히 꺾이는 순간 수면 위로 짧게 떠올랐던 의식은 다시금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허묵이 완전히 정신을 잃으려 할 때였다.


똑, 똑. 등과 맞닿은 문을 통해 선명한 울림이 전해졌다. 허묵은 흠칫 어깨를 떨며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눈을 떴음에도 시야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방금 문을 두드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문 밖은 다시금 정적이었다.


아니, 아니다. 둔해졌던 귀가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자, 허묵은 문 밖에서 서성이는 듯한 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옷깃이 가볍게 스치는 소리. 이윽고 조금 전보다 힘이 들어간 듯한 손이 똑똑, 문을 한 차례 더 두드렸다.



“교수님, 주무세요?”



한순간 내려앉았던 심장은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허묵은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 윤곽들 위로 하나씩, 하나씩 솜털 같은 빛이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계속해서 공기 중에 노출된 눈이 조금씩 시려왔지만 허묵은 눈을 깜박이지 않은 채 앉아 피어나는 빛을 응시했다.


문 밖에서 유연은 폭, 작게 한숨을 쉰다. 유연의 움직임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게 허묵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모든 감각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하는 듯한 체험은 무척 낯설고 기이했다. 머리를 괴롭히던 둔통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럴 리 없지만, 그럴 리가 없지만…… 이 순간 유연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어떨까. 허묵은 짧고 강렬한 공상에 휩싸였다. 물론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문 밖에서 이어지던 소음은 어느새 완전히 그친 뒤였다. 돌아갔겠지. 그렇게 허묵이 방심했을 때였다.



“아프지 마세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유연은 이윽고 문 앞을 떠났다. 뒤에 남겨진 혼란은 전혀 짐작하지도 못하고. 유연이 집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두 겹의 철문과 무한히 많은 공기가 자신과 유연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허묵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신과 유연의 사이에 너무나 먼 거리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자리한다는 것을.


유연을 멀리하고자 한 그간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자신은 유연에게 정말로 아무런 특별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뒤흔들리고 헤매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허묵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그게 몸을 괴롭히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손 끝에서 시작된 주체할 수 없는 오한은, 목을 감싸고 있는 낯선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제야 유연의 머플러가 아직까지도 목에 감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허묵이 손을 들어 천천히 머플러를 풀었다. 기묘하게도 어둠 속에서 붉은 색채만이 선명했다.


그는 불을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어찌할 줄을 몰랐다. 머플러를 멀리 치울 수도, 그렇다고 가까이 가져올 수도 없었다. 어둡고 기울어진 그의 세계로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든 건 그때였다. 나비가 날갯짓을 팔랑일 때마다 얇고 섬세한 날개 끝에서 세상의 모든 빛이 찬란히 부서졌다.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던 나비가 그의 눈동자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순간, 허묵은 차마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동시에 질기게도 버티던 의식이 마침내 끈을 놓았다.









3.



병치레가 지나간 후에도 허묵은 유연을 곧바로 찾아가지는 않았다. 충분히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연구실 책상 아래에 둔 종이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날 유연이 주었던 붉은 머플러는 언제든 유연과 만날 구실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지독한 주술에 걸려든 것만 같던 그날 밤 이후로 어느덧 나흘이 지났다. 어떤 결과를 낳게 되든, 유연의 얼굴을 봐야만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열병이 가신 후에 그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냉정한 사고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찬란한 날개를 가진 나비만큼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예전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자 나비는 사붓이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더니 곧 유연이 되었다.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은 유연이 몇 걸음을 걷다 말고 훌쩍 날아오른다. 작은 날개 끝에서 흩뿌려지는 빛은 그의 기억들을 낱낱이 물들였다. 공상 속에서 허묵은 유연의 손을 잡고 걸었고, 유연과 함께 내딛는 발자국마다 새로운 색이 피어올랐다. 새봄에 돋아나는 꽃망울처럼 여리디 여린 빛이었지만 기억 속에서 영영 바래지 않을 것임을 허묵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허묵은 유연이 커다란 의미가 되었음을, 그 의미가 너무나 크고 무거워서 어쩌면 영원히 마음속에서 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퍽 담담한 마음으로 인정했다. 불쾌하게 여기던 존재를 가장 깊은 곳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의외로 순탄했다. 하나의 생을 빛을, 아름다움을, 진정한 생기를 모르고 살 수는 있을지라도 이미 맛본 뒤라면 포기할 수 없는 법이었다. 유연은 그를 함락시켰고 이제 그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포로였다.


머플러 돌려주려고요.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 짧막한 대사를 혀 위에서 굴려보다 말고 허묵은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이마를 감쌌다. 대체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우습지도 않은 노릇이었다. 허묵은 마치 그게 유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플러를 흘긋 바라보고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고백을 앞둔 열네 살 남자애처럼 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려웠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유연을 보는 순간 요동칠 내면을 느끼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내 세계가 그 밤 이후로 무너져버리고 만 건 아닐까. 산산이 부서져서는 한낱 먼지로 남은 건 아닐까…….



“허 교수님? 또 아픈 건 아니죠? 안색이 좀 창백한데.”



허묵은 내리깔았던 눈을 들면서 반사적으로 펜을 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마디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천천히 시선을 넘겨 문 쪽을 보자, 문 앞 복도에 동료 교수가 서 있었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연구실 안으로 들어올 것처럼 걸음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고 있다. 허묵은 가슴 안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멀쩡합니다. 걱정을 끼쳤네요.”



허묵은 의자를 밀고 일어나 단정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와 시선을 맞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코 바로 앞에서 문을 닫는다. 그는 들으란 듯이 철컥 소리가 나도록 잠금장치를 비틀었다. 어느새 허묵의 얼굴엔 여과지로 걸러낸 듯한 새하얀 무표정만이 남았다. 성큼 걸음을 옮겨 몇 발자국만에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앉다 말고 그는 방금 전과는 극히 상반되는 허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적어도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니군. 타인은 배제한, 오직 유연에게만 한정된 변화라는 사실이 방금 간단히도 증명되었다. 이게 긍정적인 방향일지는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허묵은 한편으로 퍽 기꺼움을 느꼈다. 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제멋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는 존재가 유연 하나뿐이라면…… 그건 그리 불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스쳐갔다.


연구실을 비운 동안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들을 앞에 두고도 줄곧 상념에만 잠겨 있던 조금 전까지는 달리 허묵은 빠르게 집중력을 되찾았다. 그는 막힘 없이 글을 읽어내려갔다. 연구실은 한동안 기다란 손가락이 종이를 스치고 펜 끝이 지면을 긁는 소리로 가득찼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두 시간 남짓을 보내던 중이었다. 허묵은 갑작스레 손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다른 때 같았다면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을 불빛이었다. 환하게 밝아진 휴대전화 액정에는 유연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허묵은 빠르게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잡아챘다.



<출근하셨어요? 전 지금 시민 인터뷰 때문에 연구소 앞 공원이에요. 교수님이 생각나서 보내봐요😁>



유연의 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허묵의 시선은 이내 메시지의 마지막을 장식한 장난스러운 이모지에 머물렀다. 흠, 목을 긁는 듯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특별할 것 없는 메시지의 함의를 찾고자 찰나 동안 그의 두뇌가 얼마나 치열하게 일했는지 유연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별 뜻 없이 보낸 메시지라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유연은 자신이 한 인간을 얼마나 쥐락펴락할 수 있는지도 또한 모를 것이다. 쉽게 보여주는 다정함이, 그 무심함이 한 인간을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유연이 그걸 알았다면 허묵의 마음 속에 나비가 깃드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허묵은 이번에도 답장을 망설였지만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말고,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허묵의 뒤로 책상 위에는 아직까지도 유연이 보낸 메시지가 떠 있는 휴대전화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촬영이 진행되는 장소에는 으레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었다. 허묵은 어렵지 않게 유연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간단한 취재가 목적인 건지 촬영팀은 퍽 간소했다. 그 사이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직접 카메라를 든 유연은 방송국에 막 입사한 신임 PD 같은 모습이었다.


허묵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서 있는 곳과 촬영이 진행되는 장소 사이에는 제법 잔목이 우거져 있어서, 유연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그를 발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허묵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유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충동적인 면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그가 공원을 찾은 것도 본성이 표출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분명 자신의 행동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의도도 없었노라고, 허묵은 생각했다. 확신을 잃고 흩어지고 마는 생각 뒤로 새파랗게 달아오른 그의 시선이 유연에게 꽂혔다.


유연은 제법 능숙한 자세로 카메라를 받쳐 들고는 한 시민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문득 수신호를 하더니, 뒤에 서 있는 다른 직원에게 카메라를 넘긴다. 환하고 다정한 미소를 띤 유연이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시민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카메라 앞에 선 탓인지 다소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민은 유연과 몇 마디를 주고받자 눈에 띌 정도로 긴장을 풀었다. 어색하던 분위기가 쉽게 부드러워지고, 유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유연의 옆얼굴에서 아름다운 생기가 흘러넘쳤다.


허묵은 마음속에 커다란 파문이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돌멩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지금 이 순간, 유연은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미소 하나만으로 허묵의 마음 한가운데에 거대한 바위를 떨어뜨렸다. 숨을 멈췄지만 두근, 제멋대로 날뛰고 만 박동이 그의 귓가에 북을 치는 것처럼 선연한 울림을 남겼다. 낯선 궁금증 하나가 질척한 손을 뻗으며 가슴 밑바닥부터 기어오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저 여자가 달콤하다고 느낄까?


허묵의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빛이 유연의 옆얼굴에서 천천히 밑으로 미끄러졌다. 충동 때문이라는 변명은 이만하면 접어두는 게 옳았다. 한낮의 온화한 공기 속을 허묵의 시선은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채 느릿하게 유영했다. 목이 둥글게 파인 하얀 스웨터, 밑단을 말아올린 청바지, 베이지색 컨버스. 희미하게 상기된 뺨, 살짝 걷어올린 소매 아래로 비치는 푸른 정맥, 발그레한 빛이 도는 복사뼈……. 유연을 이룬 모든 것이 저마다 분명한 색을 가지고 있다. 허묵은 갈구하듯이 그 빛을 빨아들였다. 마침내 발밑까지 닿은 눈길이 위로 탁, 튕겨올랐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로 웃고 있는 유연을 바라보면서, 허묵은 느리고 긴 숨을 폐부 가득히 채웠다.


그의 시선과 한낮의 햇살이 어지럽게 얽힌 보이지 않는 그물 안에서 유연은 웃고, 말하고, 활기차게 움직였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이제는 퍽 전문가다운 태도로 촬영분을 확인하던 유연이 옆에 선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묵은 익숙하게 입술의 움직임을 읽었다. 좋은데, 두 명 정도만 더 찍어볼게요, 그 안에서 고르면 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유연의 고개가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허묵은 자연스레 나무 그늘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심코 스친 시선은 곧 거두어지고, 짐을 챙긴 사람들이 공원 안쪽으로 사라졌다.


다시금 햇빛 아래로 나서는 허묵의 눈앞으로 불쑥, 붉은 단풍잎 하나가 팔랑 떨어져 내렸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흔한 낙엽을 허묵은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이파리의 뾰족한 끄트머리가 꼭 어디선가 찢어낸 파편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단풍잎이 품은 생생한 붉은빛이 마침내 완전히 회색으로 바래고 난 뒤에야 허묵은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뭘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를 망가뜨린 것도, 실마리를 쥐여준 것도 모두 유연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제는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벗어날 수 없다면, 그 다음은…….






* * * * *






“허묵…… 교수님?”

“안녕하세요, 유영 씨.”



파일철 한 무더기를 품에 안고 바삐 지나가던 단발머리 직원이 허묵을 보고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멈춰 섰다. 허묵은 어렵지 않게 직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가 정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유영은 무슨 일부터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쩔쩔맸다.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속하시고 오신 거예요? 왜 못 들었지? 대표님 지금…….”

“허 교수님, 무슨 일이에요? 유영 대표 지금 회사에 없는데.”



안나연 팀장이 유영을 옆으로 보내며 끼어들었다. 허묵은 놀랐다는 듯 살짝 눈썹을 들어올리고는,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선약을 하고 왔어야 했는데, 제 잘못이네요. 유연 씨가 언제쯤 돌아올지 알 수 있을까요?”

“간단히 취재하러 간 거라 오래 걸리진 않을 텐데……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잠깐만요.”

“아뇨, 갑자기 찾아온 건 저니까 그냥 기다리죠. 감사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에도 여러 번 찾아온 적 있는 회사라 사무실 구조는 익숙했다. 무심한 태도로 회의실에 앉은 허묵과는 달리 신기하다는 듯 흘끔거리는 눈이 꽤 많았다. 한 면에 커다란 창문이 달린 회의실은 시선을 여과없이 들여보냈지만, 허묵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태블릿 PC에 시선을 못박았다. 그의 온 신경은 액정이 아닌 바깥 동태에 쏠렸다. 수군거리며 이쪽을 바라보던 직원 중 한 명이 마침내 수화기를 들었을 때, 허묵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유연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달려들어왔다. 허묵은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마치 깊게 집중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유연을 바라보았다. 뛰어오는 동안 헝클어진 건지 머리카락 몇 올이 하얀 뺨이며 목 위에 아무렇게나 붙어 있다.



“설마 나 때문에 급히 돌아온 거예요?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제가 보낸 메시지 못 보셨어요? 저 연구소 앞 공원에 있었어요.”

“이런, 폰을 연구실에 두고 온 거 있죠. 점심 때부터 계속 밖에 있었거든요.”



크게 숨을 몰아쉬던 유연이 그러셨구나, 하고 힘없이 중얼거린다.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은 허묵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유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미묘한 기류를 느꼈는지 유연의 뺨 가장자리가 살짝 상기되는 게 보였다.



“촬영하다가 온 거예요?”

“네? 네.”

“잘 어울려요. 이런 모습도 보기 좋네요.”



아……. 얼빠진 소리를 흘린 유연이 애꿎은 머리를 매만졌다. 하얀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습을 허묵의 시선이 가만히 좇는다. 발개진 뺨에 손끝을 댄 채로 눈을 굴리던 유연이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며 팔을 뻗었다.



“차, 차가 다 식었네요. 새로 가져다 드릴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낚아챈 유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조용히 웃다 말고, 허묵은 불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회의실로 몰려 있던 시선이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확 흩어졌다. 이쪽을 관찰하던 직원들이 급히 자리로 돌아가 앉거나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허묵은 느긋하게 몸을 기대 앉았다. 오늘만큼은 타인의 시선이 무척 달가웠다. 유연이 볼 수 없도록 테이블 밑에 내려놓았던 쇼핑백을 들여다보자, 단정하게 개어져 있는 붉은 니트 머플러가 보였다. 사실 그의 눈엔 그날의 선명했던 붉은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유연의 하얀 손가락 위에 붉은 실이 얽혀 있던 모습만큼은 기억 속에 또렷했다. 허묵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이 희미한 미소가 머물렀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자료를 같이 가져오느라……. 그날 해결 못한 사안 때문에 오신 거 맞죠?”



유연은 서류 한 뭉치를 팔꿈치 아래에 끼고 쟁반을 받쳐 든 힘겨운 자세로 등장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잠시 눈을 크게 떴던 허묵은 쇼핑백을 다시 테이블 아래로 밀어넣으며 일어나 쟁반을 받아들었다. ‘그날’이라. 그날 있었던 일이 유연에게도 과연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불쑥 초조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본래 목적을 전하는 건 뒤로 잠시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네, 맞아요.”



부드럽게 답한 허묵이 서류를 마저 받아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 뒤로는 철저히 사무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 대화가 일단락되고, 유연이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은 이걸 주려고 온 거였어요.”



허묵이 테이블 위로 쇼핑백을 내밀었다. 유연은 서류를 챙기던 손을 멈추고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익숙한 머플러를 알아본 유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제 머플러네요! 안 그래도 요즘 출근할 때마다 뭘 둘러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너무 늦었나요? 미안해요.”

“장난인 거 아시면서.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덕분에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허묵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식어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넘기다 말고, 그는 급히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려 기침 소리를 냈다. 허묵이 다시 앞을 보았을 땐 예상한 대로 동그래진 갈색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기침하시잖아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얼굴도 좀 날카로워지신 것 같고…….”



허묵이 짐짓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유연이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더 쉬셔야 하는데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허묵의 귓가로 염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허묵이 쉬이 고개를 들지 않자, 유연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린다. 잠깐 실례할게요. 곧 유연의 손이 이마 위로 내려앉으려는 순간, 허묵은 고개를 들며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유연의 얼굴이 숨결이 섞일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날은 진심이었어요.”

“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말.”



속삭이는 듯한 허묵의 목소리에 멍한 표정을 짓던 유연의 얼굴에 차차 희미한 꽃물이 들었다. 유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답례를 하고 싶은데…… 이번 주 토요일을 내게 줄 수 있어요?”

“…….”

“부탁할게요.”



유연의 눈동자가 잠시 허묵의 얼굴에 머물렀다. 유연이 침묵을 지킨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허묵은 그 잠깐 동안에도 심장이 죄어드는 걸 느꼈다.



“……물론이죠.”



바로 앞에서 유연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허묵이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려한 얼굴에 마음을 뺏긴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도 잠시, 유연이 조금은 어색한 얼굴로 물러나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불현듯, 허묵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처음엔 이 감정이 불쾌감이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포식자로서의 욕구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이런 식으로는 유연을 완전히 가질 수 없다. 그저 눈앞에 급급한 처사일 뿐이다.


찰나의 불완전한 쾌감은 몇 배의 고통이 되어 되돌아왔다. 그가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연이 고개를 든다. 갈색 눈동자가 허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연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처음 저 눈을 봤을 땐 유달리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진 후에는 불쾌하다고 여기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의 첫 예상은 모조리 빗나가고 말았다. 잘못된 예측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혼란스럽고도 대책 없는 매료. 유연은 허묵을 차근차근 적셔 마침내 자신의 빛깔로 머리칼 한 오라기까지 모조리 채워놓았다. 왜 하필 이 여자인지, 처음부터 깨닫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어째서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해봐야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임을, 이제는 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허묵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유연을 내려다보며, 허묵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연 씨가 내 옆에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네?”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지만요. 당신은,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까…….”

“교수님…….”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당신을.”



속삭이는 것과 동시에 귀가 온통 먹먹해졌다.


유연의 두 뺨이 희미하게 물들고, 크게 뜬 눈을 놀라 깜빡이는 모습을 허묵은 물 속과도 같은 고요함 속에서 지켜본다. 놀라움이 미소로 변하고, 마침내 꽃망울이 터지듯 환한 웃음으로 바뀌어도 온갖 색채로 가득 물든 그의 세상엔 더 이상 채워질 틈이 없다.


대신, 허묵의 눈앞에는 별안간 환한 빛줄기가 내린다. 아주 강렬하고도 실제 같은 환시를 그는 황홀한 비참함에 잠겨 바라보았다. 이 빛이 구덩이 속에 갇혀 있던 그를 향해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일지, 하늘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동안 그가 볼 수 있는 마지막 태양일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허묵은 자신이 열어젖힌 것이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임을 알았다. 신천지의 들판 가운데에 새빨간 단풍나무 한 그루가 솟아올랐다. 유연이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색이었다. 그의 인생을 스쳐간 숱한 가을 중 하나에 유연은 찬란한 붉은빛으로 의미를 불어넣었다. 허묵은 그 결코 지워지지 않을 붉음 너머로 끝도 없이 드리운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의 세상에는 채워넣어야 할 공간이 무한히 존재했다. 그 끝이 결국 어디로 통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아직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바야흐로 완전한 미지였다.








허묵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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