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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ment I fell in love

택언유연



 


 

 

 

The moment I fell in love



-가을 맞이 취재 데이트 간 아직은 안 사귀는 택언유연

-작중 시간의 흐름을 임의로 설정했습니다.

-이택언 촬영장 5-7 상황의 차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리 온, 로로. 우쭈쭈.”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트렌치코트를 여미며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로로가 헥헥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비벼온다. 부드러운 황색 얼굴에 달린 단추 두 개로 나를 빤히 보는 게 귀여워서 머리를 쓱쓱 쓰다듬다가 턱을 긁어줬다. 이내 배를 까뒤집고는 만져 달라 낑낑거린다. 할딱이는 모습이 귀여워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정의로 골목 작은 슈퍼마켓에 사는 황구 로로는 지난봄 즈음 혼자 길에 떠도는 걸 발견해서 구조한 유기견이다. 사람을 좋아하는지 나를 졸졸 따라다녀서 보호센터에 보내주려고 했었는데 로로와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길 물어보려고 들린 슈퍼마켓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로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보호센터 말고 여기로 보내면 안 되냐고 물으셨다. 나보다 로로의 의사가 중요하니까 로로를 힐끔 봤는데 싫지 않은 기색이었기에, 선뜻 로로를 맡겼다. 어느 순간 슈퍼마켓 차양 아래 들어선 개집은 로로의 자리가 됐고 로로는 거기서 계절을 두 번 보냈다. 아마 앞으로 몇십 번 정도는 더 보낼 것이다. 비쩍 말라 있던 로로는 날이 갈수록 살이 쪄서 몸집이 커졌고 푸석했던 털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매일같이 취재며 촬영 때문에 연모시 뛰어다닌다고 계절 변화 신경 못 써서 더워지면 짧은 옷 꺼내고 추워지면 따뜻한 옷 꺼내는 나랑은 완전 다르다. 근처 돌아다니다가 한 번씩 아는 척하면 놀아주는데, 사실 내가 놀아주는 건지 로로가 놀아주는 건지는 모르겠다.

 

 

자질구레한 물건이 많이 든 가방에서 개껌 하나를 꺼내 던졌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네 발로 할딱대며 뛰어간 로로가 개껌을 잡아 문다. 지 거라고 품에 꼭 안고 나를 보는데, 어이. 그르렁거리지 마. 경계 태세로 전환하지도 마. 금방이라도 임전할 것 같잖아. 그거 내가 준 거거든? 이게, 친구도 못 알아보고. 로로랑 개껌을 사이에 두고 쓸데없이 대치하는데 뒤에서 빵빵 소리가 났다. 고개를 쓱 돌리니까 도로에 멈춰 있는 때깔 좋은 차가 보였다. 차창이 아래로 스르륵 내려가더니 익히 아는 얼굴이 불쑥 등장했다. 차 안으로 보이는 남자의 옷차림이 평소보다 편안하다. 하지만 단호한 성정은 변함이 없었다. 남자가 날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타요.”

 


 

그 흔한 ‘안녕.’도 아니고 ‘저기요.’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타요.’가 도대체 다 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간단하게 ‘네.’ 하고 대답하면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털썩 소리가 났다. 계속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쥐가 난 탓이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일어나려다 말고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본 이택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쓱함에 로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한테 관심 하나도 없이 개껌만 물어뜯고 있다. 입술을 질근 깨물며 다시 일어나려고 시도했는데, 저릿한 느낌이 드는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쯧쯧 혀를 차며 차에서 나온 이택언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주어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당연! 하지 않구요… 좀 힘들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이택언의 도움을 받아 조수석에 탔다. 참 손 많이 간다니까, 하는 이택언의 생각이 귀에 들린 것만 같다. 나를 조수석에 던져놓고 차체를 반 바퀴 돌아 운전석에 탄 이택언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손으로 꾹꾹 장딴지 눌러 가며 내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는 남자를 곁눈질로 훔치다가 가방 안에서 노트를 꺼내 펼쳤다. 그러니까, 제일 처음 갈 곳이 어디냐면….

 

 

“구계전통거리로 갑니다.”

“네?”

“어디 가는지 찾고 있던 거 아닙니까.”

“맞는데요.”

 

 

뚱하니 이택언을 바라봤다. 이택언이 어이가 없는지 말없이 눈썹을 찌푸린다. 아차,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어떻게 아신 거냐는 뜻이었어요.”

 

이택언이 입꼬리 한쪽을 픽 끌어올렸다. 괜히 기분 나빠지는 웃음이다.

 

“그 작은 머릿속에 든 생각 하나 모를까 봐서요.”

 

 

나 같은 거 생각은 안 봐도 천리라는 건가. 내 부족함은 익히 알고 있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고개를 팩 돌리며 치, 하는 소리를 냈다. 이택언이 훗 하고 작게 웃더니 페달을 밟는다. 부웅,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별생각 없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흘깃 이택언을 보았다. 운전에 집중하는 얼굴이 날카롭다. 잘 생겼다는 소리다. 삐죽 내밀었던 입술을 집어넣으며 그의 차 옆자리에 타게 된 경위를 회상했다.

 

 

 


 

 

“다음 업무 보고는 일정을 좀 바꾸고 싶은데요.”

 

 

보고를 끝낸 후 넌지시 건넨 말엔 대답 대신 이택언의 싸늘한 얼굴이 돌아왔다. 빤히 바라보니까 한숨을 턱 내쉰다. 무슨 일입니까. 보고까지 미룰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날카롭게 질문하는 이택언에게, 바로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번에 시청 홍보과에서 일 따냈어요. 제작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연모시 공식 보도자료로 쓸 가을 홍보 영상을 제작해 달래요. 그거, 취재 가려구 해요.”

 

 

나름의 성취감에 취해 잔뜩 벅차올라선 눈을 반으로 접어가며 웃었다. 올해 초 도산 직전까지 갔던 회사는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남았지만, 한 고비를 넘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태산 같은 업무의 향연이었다. 제작소를 메이저로 끌어올리기 위해 건너가는 계절도 모른 채로 뛰어다녔다. 꽃망울이 트기 전 누군가에게 갈기갈기 찢어졌던 자존심은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휘날려 보낸 지 오래였다. 야근은 삶의 일부분이 됐고 공들인 기획서가 깨지는 일은 하루건너 하루 있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감내하는 작고 큰일들을 견디고 이기고 버텨 가며 했던 노력이 열매를 맺기는 한 모양이었다.

 

 


“잘 해내고 싶어요. 지난 시간 힘들여서 일했던 게 겨우 인정받은 느낌이에요. 탑으로 만들어드리겠다는 약속, 금방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는 이택언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 기쁨에 어떤 감흥도 없어 보였다. 아마 실 제작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제작 방향은 잡았습니까? 어떻게 접근할 생각인데요?”

“어, 그게….”

 


말이나 들어보자는 어투였다. 머쓱하게 웃었다.

 


“일단 취재부터 돌아보고 시나리오를 짜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아직까지는 이거다, 하고 딱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거든요.”

 


 

가을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막연하기만 했다. 여러 아이템을 생각해 봤지만, 마음 깊이 와닿는 게 없었다. 가을의 높은 하늘은 고독하고 견뎌온 시간의 결실을 본 열매들은 풍요로웠으니, 이러한 정경만을 가지고는 임팩트가 부족했다. 이택언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고심하다 보면 묘안이 떠오를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아직은 열정만 화해 아무것도 나온 게 없는 실정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돌아다닐 건지는 생각해 뒀습니까?”

“일단은… 구계전통거리에 서는 오일장. 연모대 뒷산 단풍의 절경. 또 백운호 주변이요.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정취와 풍요로움을 알기 위해선 이 스팟들이 제일 적절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둘러보고 나서 컨셉 잡으려고 해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자연 같은 거라던가?”

“정말 평범한 스팟에 평범한 컨셉이네요. 나 같으면 그런 영상,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네에, 죄송하게 됐네요. 그런데 평범함에서 특별함을 뽑아내는 것 또한 제작자의 능력이거든요.”

 

 

눈에 힘을 주었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웃겼는지 이택언이 실소를 흩날렸다.

 

 

“좋아요. 다음 보고는 미루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취재, 나도 동행하기로 하죠.”

“대표님이 왜요?”

“백운호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번에 나온 백운호 주변 부지 개발권을 화예에서 따낼 겁니다. 시찰하는 거라고 생각해 둬요. 겸사겸사 함께 하는 거니까, 큰 의미 두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택언을 앞에 두고 머리를 굴렸다. 같이 다니면 차도 태워 줄 거고 얘기하다 보면 괜찮은 아이디어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툴툴거리는 이택언이 옛날만큼 무섭지 않았으니까, 이번 제안은 말할 것도 없이 승낙이었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좋아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그렇게 약속을 잡고 취재하러 나온 것이 오늘이었다.

 

 

 



 

 

구계전통거리는 관광지로도 인기가 많았다. 아름다운 강을 사이에 두고 전통을 살려 조성된 거리는 한눈에 보기도 고풍스러운 멋이 가득했다. 연모시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이곳은 평소에도 북적거리지만 오 일에 한 번 장이 서는 날은 평소보다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했다. 거리는 예상대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친구와 놀러 나온 젊은이들부터 시작해서 나들이하는 가족이며 노인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사람 완전 많다, 그쵸.”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요.”

“어우, 대표님은 제가 매일 길만 잃고 그러는 사람인 줄 아시나 봐요.”

“매일 부딪치는 사람이긴 하잖아요.”

 

 

이택언에게 눈을 흘기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상인들이 도로 한쪽으로 열을 지어 노점상을 벌이고 있었다. 구계전통거리에 점포가 있는 상가들도 밖으로 나왔는지 익숙한 얼굴이 드문드문 보였다. 길거리 음식도 넘쳐났고, 보지 못했던 행상인들도 각자 제 짐을 펼쳐놓고 호객을 했다. 가방에서 소지하고 다니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행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꽃처럼 피었다. 파란 하늘엔 구름이 없었다. 볼 게 퍽 많았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는 정신도 놓고 졸졸 구경하러 다니며 노트를 들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몇 개씩 던졌다. 다들 흥겹게 말을 받아주어 정신없이 취재하다가 이택언을 잃어버린 걸 알았을 때는 좌판을 세 번쯤 옮긴 후였다. 번뜩 정신이 들었기에 고개를 돌려 가며 이택언을 찾았다. 키도 크고 존재감도 여실한 사람이어서, 금방 눈에 띄었다. 이택언은 조금 전 들렀던 골동품점 앞에서 턱을 문지르며 품목을 살피고 있었다.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이 화예의 투자를 받고 싶어 하는 회사들의 투자 제안서를 나란히 놓고 심사하는 표정이랑 똑같아서 풉 웃음이 터졌다. 옆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좌판에 사과가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큼직한 바구니 하나에 사천 원이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인상 좋은 아주머니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와, 사과가 되게 싸네요?”

“올해 농사가 잘됐어.”

“어, 다행이에요. 작년엔 비쌌던 것 같은데.”

“어휴, 말도 마. 작년에 얼마나 흉년이었는지 알아? 올해 잘 돼서 다행인 거지.”

“맞아요, 작년 태풍 때문에 그죠. 뉴스 봤던 것 같아요. 저랑 좀 비슷해서 생각났어요. 저도 작년엔 완전 흉년이었다가 올해는 그나마, 약간 풍년?”

“그 정도로 만족하는 겁니까?”

 


갑자기 나직한 남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안 봐도 이택언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거든요. 곡해해서 듣지 말아 주실래요.”

 


그를 보고 베에, 혀를 쭉 내미니까 어깨를 으쓱거린다. 작년엔 제대로 제작한 프로그램도 없었던 데다가 기적의 발견도 위태로웠다. 대표로 취임하고서 하락세만 그리는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작년과 비교해보자면 올해는 어떤 바쁨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풍년이었다.

 


“그런데, 저 찾긴 찾으셨네요. 아까 골동품 보고 있었잖아요.”

“봤습니까?”

“네. 대표님 키도 크고 존재감도 엄청나서 못 찾는 사람이 바보일걸요.”

 

 

이택언이 내 말에 입술을 다물고 몇 초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론 골동품보다 다람쥐처럼 빨빨거리는 당신 보는 게 더 바빠질 것 같군요. 잠시 한눈판 사이에 그새 없어지고.”

“에, 길 잃은 건 대표님이잖아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말에 이택언이 지그시 바라본다. 완전 별로인 기획안을 보면서 언짢게 찌푸린 표정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오싹해서 등에 땀이 삐질 나왔다. 어색하게 아하하, 웃어봤는데도 이택언 표정은 변할 여지가 없었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이택언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그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근데, 배고프지 않아요? 뭐 먹을래요? 아, 저기 탕후루 있다. 옆에 양꼬치도 있네요? 가요, 뭐든 먹으러 갑시다.”

 

 

이택언 대답도 안 듣고 노점 앞에 가서 양꼬치 두 개를 주문했다. 금방 노릇노릇 잘 익은 양꼬치가 나왔다. 이택언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지갑을 찾았다. 얼른 그런 그를 저지하면서 목에 대롱대롱 건 동전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건넸다. 실실 웃은 아저씨가 말없이 양꼬치를 줘서, 웃으면서 받아들고 그에게 하나를 건넸다.

 

 

“뭐죠?”

“차 태워주시는 보답이랄까요.”

 

 

이택언이 양꼬치 한 번, 나 한 번 보더니 양꼬치를 받아든다.

 

 

“고작 이런 걸로요?”

“거 참 되게 쩨쩨하시네… 그냥 드시죠. 싫어도 먹어요.”

“참 나, 알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배고픈데 양꼬치를 먹어서 그런지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택언도 나랑 비슷한 모양인지 입가에 엷은 호선을 그렸다. 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이택언과 나란히 걸으면서 양꼬치를 먹는 일 같은 건.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터벅터벅 걸으면서 지난 기억에 픽 웃는데 옆에서 이택언이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취재는 좀 잘 되던가요?”

“글쎄요. 다들 평범하던데요. 아 맞다, 올해 사과 농사가 풍년이란 소리를 들었어요.”

“풍년?”

“가을이잖아요. 통통히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고 말은 살찌는 계절이니까, 풍년이면 좋은 거겠지요. 오늘의 이곳은 황금빛의 생동감이 넘치는 게 딱 가을 같더라고요.”

 

 

 

그를 보면서 씩 미소 지으니까 이택언이 내려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의 온기 때문인지 잠깐 닿은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취재를 정리하고 산을 향하는 길, 어리게나마 아직 완벽히 물들지 않은 산의 전경이 보였다. 신록이 푸르던 산은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파란 가운데 노랗고 붉은 난색들이 울긋불긋 산을 물들이기 시작해서, 얼룩덜룩했다. 산 중턱에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사람 사는 냄새가 섞여 들어오던 장에서와 달리 깨끗하고 시원한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가 폐부를 충만하게 채웠다. 고개를 휘휘 둘러봤지만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끝없이 이어진 나무들과 떨어진 낙엽들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동전지갑과 함께 목에 대롱대롱 카메라를 걸고 이택언과 함께 산을 밟았다.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 널따란 길에 플라타너스와 떡갈나무, 단풍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이불처럼 옅게 흙바닥을 덮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왔다.

 

 


 

“여기는 아까랑 다르게 약간 쓸쓸하네요.”

“단풍이 예쁘지 않아요?”

“맞아요. 예뻐요. 이건, 음. 어떻게 보면 월동준비잖아요? 뭔가 이별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가 봐요. 생각만 하는 거랑 직접 볼 때는 역시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뒷짐을 지고 걷던 이택언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잠깐 말을 끊은 그가, 그래도 여유가 느껴지네요. 평소엔 쉽게 느끼기 힘드니까요. 하고 덧붙였다. 그가 던진 여유라는 단어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몸이 두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이택언이니까, 이런 여유는 쉽게 느끼기 힘들 터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취재로 나온 거라지만 조용하고 경치 좋은 산길을 걷고 있는 이 시간이 새삼스럽게 보물처럼 느껴졌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가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버석거리는 소리만 들려왔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잠깐 걷다가 나온 좁은 공터에선 이택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카메라를 들고 졸졸 주변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렌즈 안에 낙엽과 물들어가는 단풍을 담고, 낙엽 밟는 가을 소리를 동영상에 담았다. 카메라를 눈에 바짝 가져다 대고 옮겨 가며 렌즈를 투과하는 장면들을 보았다. 뷰파인더에 나무의 밑동이 잡혔다. 카메라를 쭉 올려 담아본 굵은 나뭇가지엔 아직 계절과 인사 중인 얇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었다. 울창하지 않은 나뭇잎들 사이로 느지막한 오후의 금빛 햇살이 반짝거리며 쏟아졌다. 찰칵. 카메라에서 나는 소리가 궁금했는지 사이에 숨어있던 다람쥐 한 마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작은 동물 친구가 귀여워 다시 찰칵 사진을 찍으며 나지막하게 안녕, 하고 읊조렸다. 다시 들린 카메라 소리에 놀랐는지 다람쥐가 잽싸게 뷰파인더 안에서 사라진다. 쓴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놓았다. 쏴아, 하고 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바람에 담긴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멀찍이 느껴진 시선을 좇아 몸을 돌렸다. 이택언이 나를 빤히 보고 있다.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온 누군가의 지난한 눈빛에 눈길을 피하며 돌린 시야의 끝, 흙 속에 파묻힌 도토리가 보였다. 도토리를 주워들고 이택언 앞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이거 봐요. 도토리 주웠어요.”

“겨울을 나는 다람쥐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저기 놓고 와요.”

“묻어놓고 까먹어서 못 찾는 게 더 많다던데요?”

“그래서 숲이 유지되는 거기도 하고요.”

“그냥 한번 보라는 소리였거든요?”

 

 


 

한 마디를 안 지는 이택언에게 삐죽 입술을 내밀며 도토리를 휙 던졌다. 기왕이면 아까 본 다람쥐 친구가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행동을 주시하던 이택언이 낙엽 사이로 툭 떨어진 도토리 소리에 픽 웃더니 발걸음을 슬슬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쫄래 쫓았다. 긴 다리 덕분에 보폭이 넓은 이택언이지만 걸음걸이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아서 별 힘 들이지 않고 금방 쫓을 수 있었다.

 

 


 

산의 이십 퍼센트가 붉게 물들면 첫 단풍. 팔십 퍼센트 정도가 붉게 물들면 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에 붉은 물감이 퍼지는 속도는 이 주 정도. 절대 느리지 않다. 단풍이 지기 전에 빨리 촬영 와야지. 수면에 물감 탄 것처럼 이른 시일 내에 번져 나가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싹 틔울 준비를 할 산을 생각하니 마음이 곰실거렸다. 이 짧은 시기를 놓치면 다음 단풍까지는 일 년이 걸린다. 마치 썰물 같았다. 잡으려고 하는 순간 아차, 하면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잎이 떨어진 빈 공간은 새로운 계절이 채워 넣을 거고. 그러니까, 취재가 아니었다면 올해 단풍은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열매를 맺든 계절에 인사를 하든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는다는 점에서는, 소란했던 장의 모습과 적막했던 산의 경치가 겹쳐 보였다.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결실을 보게 되는 건가 봐요.”

가을은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이택언이 살짝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세요? 하는 의문을 담아 고개를 갸웃거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는 다시 걷는다. 나무의 향과 선선한 공기의 냄새에 옅지만 달콤한 캬라멜 향이 섞여 들어왔다. 말하지 않아도 이택언의 것인 걸 알았다. 새삼스럽게도 이택언의 달큼한 향에 꽤나 익숙해졌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마지막 목적지인 백운호로 가는 차 안, 몇 십분 간을 달리니 멀리서 푸르게 일렁이는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창을 내려 고개를 살짝 빼고 눈을 감은 뒤 바람을 맞았다. 머리칼이 펄럭이며 휘날렸다. 생각보다 강한 바람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지만 입술은 곡선을 그렸다.

 

 


위험하니까 들어와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잠깐의 일탈이 종료됐다. 어차피 길게 빼고 있을 생각도 없어서 냉큼 이택언의 말을 들었는데, 이택언은 빠릿빠릿하게 수행한 행동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마디 던졌을 법한데도 별 말이 없었다.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쓱쓱 빗어 가며 정리하는데 이택언이 차를 세웠다.

 

 


백운호는 꽤 넓은 면적을 가진 호수였다. 호숫가 한편에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낚시터가 크게 조성돼 있었고, 편히 다닐 수 있는 흙길의 산책로와 거리를 띄우고 포장된 자전거도로가 호숫가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걷다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쉴 수 있게 만들어놓은 정자와 벤치,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놀러 나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기우는 해에 피크닉 자리 정리할 준비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넓게 탁 트인 산책로를 이택언과 함께 걸으며 흘끔 그의 얼굴을 훔쳤다. 넘어가는 해가 이택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얼굴의 반이 어두워지며 한층 날카롭게 보였다. 걷다 멈춘 이택언이 호수를 사선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이번에 나온 땅이에요. 화예에서 입찰할 땅이기도 하고요. 당신이라면 어떤 식의 개발을 하겠어요?”

 

 


그의 말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당연하게 옆에 있어서 오늘 하루 별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이택언의 목적은 본디 이곳이었다. 갑자기 느껴진 어색함에 침을 밀어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음, 글쎄요. 낚시터도 있으니까… 낚시용품 가게는 너무 별로이려나. 아냐. 건물 크게 지을 거죠. 수상 레저 스포츠 센터! 이런 거 어때요?”

 


 

이택언의 표정을 살펴 가며 짧은 시간에 나름의 답을 도출해 냈다. 낚시용, 까지는 찌푸려져 있던 이택언 눈썹이 말의 방향을 선회해 수상 레포츠 센터 얘기를 하자 슬쩍 풀렸다. 속으로 히히 웃으며 그의 평가를 기다렸다.

 

 

 

“그럭저럭이군요.”

“오, 합격점.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닙니다.”

“대표님 입에서 이 정도면 찬사죠, 찬사.”

“뭐, 됐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던가.”

 


 


그의 앞에서 얼쩡거리며 너스레를 떠니까 고개를 호수 쪽으로 슬쩍 돌린다. 이택언의 광대가 흘끔 올라가는 모습이 잔상으로 남았다.


 

 

“어차피 어떻게 개발할 건지 대표님 머리에 다 들어있을 거면서. 이런 질문은 좀 치사하지 않아요?”

“네, 그러니까 저는 저쪽 좀 둘러보고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은 이택언이 자리를 옮겼다.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호숫가를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장에서나 산에서와는 다른 물비린내 얼핏 섞인 자연의 냄새가 비강을 간질였다. 주변의 경치를 살피며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산책로 옆으로 키가 덜 자란 갈대가 듬성듬성 이어지다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게 보였다. 잠자리가 공중을 노닐었다. 어린 시절 잠자리를 쫓던 기억이 나 손가락을 쭉 뻗었다. 위잉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던 잠자리 한 마리가 손가락 위에 와서 앉았다.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 잠자리는 다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쉬움에 사진을 몇 장 찍고는 길을 걸었다. 갈대들이 바람에 흐드러지며 서늘한 음악을 연주했다. 호수면 위로 물을 차고 오르는 철새들의 날갯짓이 보였다. 아쉽게도 해가 반대편으로 떨어지고 있어 생김새가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친구들이 떠나고 어떤 친구들이 찾아오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오늘 들린 어느 곳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간헐적으로 커플들이 손잡고 걸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손에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오늘의 사진은 이 정도로 되었다. 어여쁜 자연을 렌즈 아닌 두 눈에 제대로 담고 싶었다. 손의 엄지와 검지를 구십 도로 만들어 직사각형으로 마주해 붙였다. 마치 카메라의 뷰파인더처럼.

 


 

손가락으로 만든 사각형의 세상에 호수의 정경이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수면에 넘어가는 빛이 부서졌다. 낙조에 물든 호수는 분홍빛이 되기도 하고 황금빛이 되기도 했다. 손가락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호숫가 저편으로 넘어가는 해가 보였다.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면서 떠다니는 구름마저 하얀 얼굴을 붉혔다. 부는 바람에 온통 황금으로 빛나는 갈대밭이 보였다. 손가락 안에 든 자연의 경치만을 옮겨가며 움직이던 배경 안에 사람의 뒷모습이 잡혔다. 마주한 남자의 익숙한 등 뒤로 푸른 하늘이 붉게 산란하다 맺어졌다. 지는 노을에 얼굴이 물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쏴아 부는 바람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택언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만든 사각의 프레임 안에, 그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아주 느리게 담겼다. 바람에 살랑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보였다. 그의 뒤로 황금빛 갈대가 빛나며 노래하고 분홍빛으로 물든 백운호가 보였다. 그러나 가을을 다듬는 소리와 풍경은 온전히 배경이었을 뿐이다. 세상의 주인공은 이택언이었다.

 


 

 

이택언이 잘 영근 가을 안에 우뚝 서 있었다. 순간, 열매를 맺은 것은 우리 제작소의 노력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투자 철회를 재고하고 나도 모르는 도움의 손길을 넌지시 건넸을 때부터 쭉, 또 다른 씨앗은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처음 만난 봄에는 그를 오해하고 힐난했었는데 그를 겪어가며 점차 내 생각이 전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여름을 지나며 그를 알게 되는 모든 순간들이 전부 비료가 되었다. 그의 옆에서 걷는 것이 익숙해졌다. 옅게 풍기는 부드러운 캬라멜 향도 낯설지 않다.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질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던지는 무뚝뚝한 말들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맞춰간 보폭, 잠깐의 터치에 달아오르던 순간들, 주고받은 시선과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이름을 붙이지 않던 행동의 명칭을 찾았다. 처음 알게 된 시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다.

 

 


 

사실, 계절 같은 건 그렇게 새롭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몰래 살금살금 다가와 있는 거라서. 그런 탓에 계절이 건너가는 것도 몰랐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노라 공언했건만, 시간은 착실히 움직이며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결국엔 시간을 건너왔다는 것을 깨닫고 난 찰나의 순간 익숙함은 본 적 없던 새로운 풍경으로 변모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아름다운 노을과 산산이 부서지는 빛에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금빛으로 덧칠된 시간은 아주 짧을지 몰라도 잊을 수 없는 광경임에 분명했다. 영상에 담고 싶은 풍경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흠뻑 무르익은 사랑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점점 가까워진 이택언이 멍하니 서 있는 날 보더니 괜찮습니까? 하고 물어왔다. 괜찮지 않다는 말을 애써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하루 종일 다닌다고 좀 피곤했나 봐요. 이택언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는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말하면서 차로 이끌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심장이 온 몸으로 퍼진 것처럼 맥박이 둥둥 쳐서 정신이 혼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발견하게 된, 오늘 보았던 사과처럼 빨갛고 동그랗고 예쁘게 잘 익어서 온 정신을 뿌듯하게 채우는 그런 마음이, 아주 소중했다.

 

 


 

 

✻✻✻

 

 

 


 


“우쭈쭈, 로로. 오늘은 안 돼.”

 

 

로로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귀를 시무룩하게 접고는 바닥에 털썩 앉았다. 끼잉거리며 위를 올려다 보는 거대한 황색 털뭉치는 그새 더 털이 찐듯했다. 쪼그려 앉아 같이 놀고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불가능했다. 로로가 다가와 부비작거리지 못하도록 다리를 슬쩍 뺐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매일 치대고 놀아주던 내가 오늘 왜 이러는지 궁금한가 보다.

 

 

 

블랙 미니드레스에 높이가 약간 있는 힐, 들고 있는 작은 클러치는 개껌을 넣을 공간도 요원했다.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요즘 입기엔 약간 추운 옷차림이었지만, 파티용으로 차려입은 것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로로의 개집 바닥에도 겨울을 염려한 극세사 담요가 깔렸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지. 다리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을 또각이며 몸을 돌리니 도로에 멈춰 있는 때깔 좋은 차가 보인다. 달칵 뒤쪽 문이 열리더니 이택언이 몸을 우아하게 뻗으며 빠져나왔다. 갖춰 입은 쓰리피스 수트는 한눈에 보기도 피부처럼 매끈히 달라붙어 이택언의 탄탄한 몸매와 기다란 다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거 분명 오더메이드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성큼 앞으로 다가온 이택언이 나를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타요.”

 

 

어쩜 이렇게 한 마디도 변하지 않을 수가 있는지. 대답 없이 픽 웃으니 팔을 내민다.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수행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이 곧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들고 업무를 보는 이택언의 얼굴을 힐끔 훔쳤다. 지난 취재 이후 삼 주 만에 보는 이택언의 얼굴이었다. 미룬 보고를 들어야 함에도 두 주 반 동안의 해외 출장을 다녀온 이택언은,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바로 지난번 말했던 공개 입찰에 참여해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련하겠냐마는, 피곤했을 텐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는 소식이 매우 이택언다웠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스튜디오 식구들과 바짝 영상을 찍어 얼마 전 결과물을 넘겼다. 완성본도 흡족했는데 윗선에서도 썩 마음에 들어 한다는 낭보를 접해 뿌듯해진 마음은 어제 공개된 영상이 생각보다 많은 화제를 몰고 있어 더욱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택언이 그 영상을 봤는지, 어땠는지 물어볼까 고심하는 도중 차가 멈추었다. 파티 장소에 도착했나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파티 장소인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파트너 동반 모임도 아닌데다가, 이택언은 그저 시간이 맞아 태워주는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었다. 방명록을 쓰고 먼저 입장해버려 그와 떨어져버렸다. 오가지 않고 한 구석에 혼자 서 있는데 시간이 되자 파티의 호스트인 T그룹의 회장이 나와 작은 인사말을 했다.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테이블에서 케이터링 된 과일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회장을 둘러보았다.

 

 


 

 

이택언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구나.

 

이택언은 주변의 거물들과 스스럼없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본인 자체가 거물이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 평소였다면 별생각 하지 않고 웃으며 가까이 다가갔을 텐데 오늘은 마음이 울렁거려 괜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슬쩍슬쩍 계속해서 그를 훔쳤다. 차가움을 살짝 내려둔 얼굴에 자신과 오만에 가득 찬 미소가 걸려 있다. 이택언이 가진 여유와 고유한 분위기는 사람을 빨아 당겼다. 생각해보니 그의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갑작스레 느껴진 거리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논외였던 것들이 마음을 인지한 이후로 자꾸만 걸림돌이 돼 생각지도 못하게 툭툭 등장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음료를 홀짝거리다가 다시 이택언을 찾았다.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던 이택언이 문득 시선을 비틀었다. 아주 짧은 찰나 눈이 마주쳤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팩 돌렸다. 때마침 다행스럽게도 타이밍 좋게 옆에서 이번 영상을 잘 봤다고 말을 걸어온 게스트가 있어 새로운 담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적당히 영업도 하고 사교도 나누며 나름대로 파티를 즐겼다. 의식적으로 이택언을 찾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목이 타 이야기하던 그룹에서 빠져나와 둘러본 홀은 아직 복작거리고 있었지만 이택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옅은 씁쓸함을 느끼며 조금 일찍 연회장에서 빠져나왔다. 프런트에서 맡겨둔 짐을 찾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갑니까.”

“어, 대표님. 아까 안 보이시던데.”

“사람이 너무 많아 잠깐 나와 있었습니다.”

 

 


 

별안간 등장한 이택언의 모습에 눈치도 없는 마음이 쿵쿵 뛰어댔다. 설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때마침 들어가려고 했다는 이택언과 함께 호텔 입구로 나서니, 그의 차량이 바로 앞에 대기 중이었다. 이택언이 넌지시 말해왔다.

 

 

 

 


“데려다줄 테니 타고 가요.”

“괜찮아요. 좀 걷고 싶어서요. 오늘은 걸어갈게요.”

“그래요, 그럼.”

 

 

 

대답도 참 시원하게 한다 싶었다. 미묘하게 너울거리는 마음은 이택언의 앞에서 제대로 표정 관리를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거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택언이 아주 약간 야속하기도 했다. 이택언이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 수행기사와 말을 몇 마디 나눈다. 멀거니 서서 의문을 담고 그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차량은 곧 이택언을 태우지도 않고 출발해 버렸다. 차가 떠난 자리에 이택언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나를 보았다.

 

 

 

“같이 걷죠.”

 

 

어차피 이택언의 차는 떠나버렸으니까…. 그의 기별 하나에 신속히 달려올 차량을 알지만, 작은 핑계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함께 걷는 거리는 흐르는 음악과 떠드는 소리로 소란했던 연회장과는 상반된 분위기로 매우 적막했다. 연회장 안에 있을 때는 깜박 잊고 있었는데, 겨울을 몰고 오는 늦가을의 바람이 생각보다 추웠다. 살짝 떠는 날 보더니 이택언이 외투를 벗어 건넸다.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내가 더워서 주는 겁니다.”

“…”

“강한 척할 필요 없어요.”

“치, 말은.”

 

 



작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받아들어 걸친 외투는 품이 커 벙벙했지만 이택언의 체온과 함께 달큰한 향이 스며들어 마음을 보드랍게 데웠다. 그에게 안기면 꼭 이런 느낌이 들까 싶었다. 옷을 건네는 이택언은 거리감이 느껴졌던 이택언이 아니라 옆에 있는 이택언이었다. 그를 의식한 이후로, 모든 익숙했던 일들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와 명확한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필요 이상으로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함께 걷는 이택언의 묵직한 발소리에서마저 질량을 느꼈다. 이전에 어떻게 순수하게 웃고 장난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들이 전부 사랑의 발로였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펑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고작 마음을 깨달았을 뿐인데도 같은 상황이 이렇게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사랑은 처음이라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익숙함과 어색함이 함께 감도는 이상한 공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오늘 홀로 느꼈던 서먹한 마음을 훌쩍 날려 보냈다. 조용한 거리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택언이었다.

 

 


 

“서운했습니까?”

“뭐가요?”

 

 

 

그를 보며 되묻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번뜩 알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정신을 다잡고 멋쩍게 말을 이었다.

 

 

 

“아, 다시금 깨달았을 뿐이에요. 꾸준히 해왔던 일들이 어느 정도 결과로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이 훨씬 멀다는 거랑 또 대표님은 아주아주 멀리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택언이 입을 여닫았다. 어떤 말을 해줄까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점점 더 큰 열매를 맺고야 말 거니까요.”

 

 

이어진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성과로도 보여준다면 더 좋겠지만.”

 

 


 

그와 함께 걷고 실없는 한담을 나누는 순간들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들뜨기 시작한 마음이 평소와 다른 틈을 내보일 것만 같다. 자그마한 걱정과 함께, 평소처럼 장난기를 담아 공연히 너스레를 떨 듯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어머, 대표님. 그간 바빠서 못 들으신 모양인데요. 제가 제작한 가을 영상, 완전 호평 일색에 화제거든요? 다들 잘했다고 그런단 말이에요.”

 

 

 


이택언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농을 던진 나의 진의를 살피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돌아온 나를 깨달았는지 힘을 부드럽게 빼고는 피식 웃는다. 이거면 된 거라고 속으로 자조하며 이택언을 향해 온 신경을 세웠다.

 


 

 

“당신의 모든 영상은  일일이 체크하고 있어요. 나름 괜찮더군요.”

“와, 이번 건 진짜 칭찬인 거 맞죠. 한 번만 더 얘기해주시면 안 돼요?”

“리바이벌은 없어요.”

 


 

 

단호한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척했지만 기쁨에 치솟는 광대와 접히는 눈은 숨길 수 없었다. 행복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내가 신기한지 이택언이 가붓이 웃어왔다.

 

 


 

“그렇게 좋아요?”

“그럼요, 당연하죠. 대표님이라면 안 좋으시겠어요?”

“남의 평가에 흔들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

 


 

 

그의 농 어린 말에 와, 진짜. 하고 작게 투덜거리니까 픽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해준다.

 

 

 


“그래도, 매듭을 짓는 것과 짧고 소중한 순간을 연결 지어 감성적으로 구성한 건 꽤나 신선하더군요.”

“대표님 덕분이에요.”

“내가 한 게 뭐가 있…긴 하군요. 좋아요. 더 감사하도록 해요.”

 

 


 

의례적인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롯한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이택언이 예의 차린 인사를 건네려다 지난 취재가 생각났는지 말의 방향을 돌렸다. 그의 말에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지금 옆에서 함께 걷는 이택언이 화예 대표도 아니고, 수비니어의 셰프도 아닌, 그저 이택언으로 내 옆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들썩거리는 마음이 불이 번지듯이, 언덕 위에서 눈덩이를 굴리듯이 걷잡을 수 없게 커져만 갔다. 온도가 올라간 듯한 분위기에 걷다 말고 이택언이 멈추었다. 그를 멀뚱하게 바라보니까 픽 웃으면서 팔 아닌 손을 내민다. 어떤 의미인지 몰라 멀뚱히 그를 보았다. 진한 제비꽃 색 눈동자가 어둠에 굴하지 않고 보석처럼 빛났다.

 

 

 

 

“맺힌 열매는 제 시기에 안 따면 상해서 툭 떨어진다면서요. 그런 마무리를 짓기 전, 순간이 가장 농익었을 때 가을을 느껴보라면서요. 생각지도 못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했었나.”

 

 

 

 


이런식으로 대놓고 들을 줄은 몰라 얼굴을 붉혔다. 제작했던 영상에 내포된 메시지였다. 그 날, 내가 느꼈던 것을 모조리 담아 만든 영상은 잘 보면 훌륭하게 만든 홍보 영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내가 느꼈던 것, 그러니까, 깨달은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 쓴 연서라고 봐도 무방했다. 쩔쩔매며 그를 보는데, 이택언이 다시 말해왔다.

 


 

 

“지금 그 열매를 딸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서. 곧 겨울이 올 테니까, 너무 늦으면 안 되잖아요.”

 

 

 

 


말하고 있는 그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잔잔한 미소를 걸친 얼굴과 그가 내밀고 있는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훈훈함이 감돌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굳어진 것 같았지만,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고가 뻣뻣해진 것뿐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마음을 들킨 것도 모자라 손을 내미는 이택언을, 늘 한 발 앞서 있다가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이택언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의 나를 알고 있는 이택언을,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새로움을 선사하는 이택언을,

“네…, 대표님.”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았다. 옷이 아닌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마음으로 들어와 나도 모르게 봄부터 무럭무럭 자라와 탐스럽게 잘 여문 과실을 툭, 따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함께 나눠 먹으면 세상의 어느 디저트보다도 달콤해서 꼭 가을 같은 황금빛의 맛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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