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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or of autumn

[허묵유연] 가을의 색


“많이 바쁜가 보네. 밥은 먹었어요?”
“아, 교수님...!”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옆 책상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은 허묵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까지, 교수님이? 반가운 마음에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우수수 쏟아졌지만 얼굴로 먼저 묻고 있었는지 그는 작게 한 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쉬어가면서 해야죠. 남들 다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나랑 저녁 먹으러 가요. 제대로 된 식사로.”

유연의 책상에 놓인 편의점 도시락 빈 상자를 옆으로 치워내는 그의 손짓에 유연은 멋쩍어졌다. 교수님께 그렇게 식사 잘 챙기라고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 야근의 늪에 지금 이러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교수님...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요. 이거 마무리하려면...”
“무슨 프로그램이길래 며칠 동안 유연 씨 얼굴도 못 보게 만드는 거예요? 연락도 없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닌가 봐요.”
“매번 교수님 귀찮게 해드렸으니 이번만큼은 스스로 해봐야죠.”
“그런 말은 서운한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유연을 바라보는 눈꼬리가 더욱 내려간다. 그 모습이 꼭 비 맞은 강아지나 아니면 처연한 여우같기도 해 정말로 그를 서운하게 만든 것 아닌가 싶어 절로 심장이 뜨끔 내려앉는다.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누군가와 상담해보는 것만으로도 돌파구가 마련되기도 하죠.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볼 수도 있고요. 그건 민폐도 아니고 귀찮게 만드는 것도 아니에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유연 씨가.”
“그럼요. 교수님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어요......”
“좋아요. 그럼 나가볼까요. 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러.”

이번에도 또 KO패다. 정말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사실 그의 조언이 무엇보다 필요했는데, 이번에도 그에게 자문을 청하기는 영 낯이 서질 않아 휴대폰 통화목록만 들여다보던 지난 한 주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이렇게 나온다면... 이건 마치 어느 한 쪽이 한 걸음 물러서면 다른 한쪽이 두 걸음 다가서는 형국이었다. 결국 순순히 PC의 전원을 끈 유연이 허묵의 에스코트를 따라 나서며 사무실의 불을 마지막으로 껐다. 그래도 오늘은 직원들 먼저 일찍 보내 다행이다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십 분만, 십 분만 더 본다고 한 게 이렇게 늦어버린 줄도 몰랐다.
밖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들이 걸어가는 양옆으로 가로수가 붉고 노랗게 물든 것이 보였다. 매번 걷던 회사 앞 거리 풍경인데, 단풍이 언제 이렇게 들었나 싶었다. 점점이 이어지는 가로등 불빛과 은은한 달빛이 단풍을 여러 색으로 보이게 비추다 사라졌다. 자신만 남겨두고 어느새 저만큼이나 지나버린 계절이 아쉬워 유연은 느릿하게 걸었다. 사박. 사박.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라졌다. 별말 없이 옆에 서서 자신과 함께 밤거리를 걷는 허묵에게로 유연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가 저와 보폭을 맞춰 걷고 있다는 것을 안다. 거기에는 티 나지 않는 그만의 배려가 있었다. 단풍 구경은 저도 모르게 그로 옮겨갔으나 유연은 자각하지 못했다. 그의 코트깃은 단정하게 내려가 있었다. 짙은 남빛 계열 니트에 옅은 베이지색 코트 하나 간단하게 걸친 모습이 그와 잘 어울렸다. 어느 순간, 그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제 시선을 눈치 챈 탓이다. 춥진 않아요? 그가 묻는다. 유연은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이어졌다.

“계절이 바뀌긴 하네요.”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끝장이라도 볼 작정으로 덥던 여름도 결국에는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와의 추억이 많았다. 늘 그래왔듯, 그는 자신을 돕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고, 그렇게 함께 한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방영되는 것을 같이 지켜본 이도 그였다. 하나씩 떠오르는 기억들에 유연 역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저 지나갈 뿐.

“교수님은 단풍 좋아하세요?”
“음...”

허묵은 고개를 들어 그들 주위를 감싼 가로수를 빙 둘러보았다.

“나무는 좋아해요. 도시에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들이죠.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숨 쉴 틈도 주고.”
“에이. 그러니까 단풍이 드는 건 나뭇잎들의 자연스러운 화학적인 반응일 뿐, 뭐 그런 얘기죠? 역시 교수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허묵이 피식 웃었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화려한 색채를 눈으로 쫓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꽃놀이를 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머릿속으로 붉고 노란 색의 향연이 그를 자극적으로 사로잡았다. 허묵은 시선을 내려 단풍나무 아래에 서있는 유연을 바라보았다. 이미 사로잡힌 지 오래인지도 몰랐다.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글쎄요. 앞으로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죠.”
“왜요?”
“단풍이 이렇게 예쁜 줄 모르고 살았거든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교수님도 마찬가지였네요...”

한숨을 푹 쉰 유연이 말했다.

“사실 가을 개편 때문에 정신이 없었거든요. 계절감 맞춘 교양 프로그램 하나 내고 싶은데, 이미지에 대한 것만 중구난방으로 떠오르고. 확실하게 잡히질 않아요. 가을 여행 프로그램이나, 독서 관련 코너는 이미 방송가에서 많이 활용했던 소재라서 꺼려지고... 조금 새로운 시선이 더해졌으면 좋겠는데...”
“크게 생각해둔 거는 있어요? 어떤 소재라든가.”
“일단 생물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완전히 자연 다큐는 아니고,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결합된 쪽으로요.”
“생물과 심리학이라... 괜찮은데요?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 전에 일단... 유연 씨 저녁부터 챙기고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 갑자기 너무 배고파요... 아무거나 다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데요.”
“아무거나, 라. 어려운 답이네요. 그럼 정말 내 마음대로 정할 지도 몰라요.”
“완전 환영이죠.”
“내 안목을 믿나요?”
“교수님을 믿어요.”

아. 하고 작게 탄성이 터지는 것도 같았다. 농담조의 질문에 농담조로 대답했으나 허묵은 그 한마디만 읊조리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올려다본 표정은 어쩐지 미묘했다. 가을, 밤거리를 걷는 그의 걸음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미소가 옅게 걸린 얼굴은 차갑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그러나 유연은 그에게서 조금 전과는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다. 자신을 옆에 두고 함께 걸었으나 그가 저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때때로 이런 느낌을 받곤 했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대화가 오가는데, 그 미묘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그와의 거리를 돌연 좁히거나 멀게 만들곤 했다. 유연은 그를 알게 된 이후 까닭 모를 이 간극을 자주 헤매야만 했다. 그것이 유연에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늪인 것은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더 참기 힘든 갈증이 일었다. 안타까움을 가득 품은 손끝으로 그 틈을 더듬었으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그 이유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그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미지의 그가 낯익은 밤거리를 걷는다.
미지의 밤거리를 낯익은 그가 걷고 있다.
어색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조금 더 이어지고, 이내 길가에 세워놓은 그의 차가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기세로 허묵이 조수석 차문을 열고는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곳에 가서 먹죠. 당신이 나를 믿는다니 용기가 생겼거든요.”



##


회사에서 그의 연구실까지,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중간에 여러 번 차를 세우느라 시간은 꽤 걸렸다. 테이크아웃 레스토랑, 모네 다이닝, 디저트 가게까지 하나씩 들려 한 메뉴씩 골라 뒷좌석에 싣고 보니 어느새 시트가 꽉 찼다. 따끈따끈 김이 나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차 안에서부터 유연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푼 유연이 내리자 두 손 가득 먹을거리를 든 허묵이 차문을 닫았다. 밤에 보는 그의 연구실은 낮보다도 더 정적에 휩싸여 아무 소음도 느낄 수 없었다.

“후우. 이렇게 많이 샀는데도 다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라던 바네요. 마음껏 먹어요, 당신만을 위한 레스토랑이니까.”

말 그대로 유연만을 위한 레스토랑이 차려졌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올려지는 음식들은 레스토랑에서처럼 코스의 순서대로 나오지는 못했으나 가벼운 전채요리부터 뜨뜻한 김을 내는 고기요리와 디저트까지 함께 차려져 더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워보였다. 하루 종일 편의점 음식으로만 때운 유연에게는 더욱 그랬다. 천상의 레스토랑이 따로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행복한 표정이 된 유연을 허묵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라보았다. 직접 만들지는 못했어도 맛이 보장된 음식점에서 미리 예약 주문을 해둔 메뉴들이었다. 그만큼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에 허묵은 이따금씩 웃음을 흘렸다.

“너무 맛있어요... 교수님도 드세요!”
“응, 먹고 있어요. 걱정 말고 먹어요.”

음식은 차례대로 비워졌다. 어느새 디저트 마카롱을 손에 든 유연에게 허묵은 커피를 내려 가져다 주었다.

“밥 먹었으니 우리 일 할까요?”
“아아, 그냥 자고 싶다.”
“잠도 안 올 거잖아요. 프로그램 걱정 때문에.”
“어떻게 아셨어요.”
“며칠 잠 못 잔 것 같은 얼굴 보고요. 아까 사무실에서도 수척해보였어요.”
“지금은 회복 완료입니다. 교수님이 엄-청 잘 먹여주셔서.”

가벼운 농담이 오가고, 이야기의 주제는 가을 프로그램으로 옮겨갔다. 가방에서 자료파일을 꺼낸 유연이 설명을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긍정적인 반응들이고요. 아까 단풍을 보고 더 확실해졌어요. 그러니까......”
“본능.”

허묵이 주제를 관통하는 단어를 던졌다. 유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물들이, 그리고 인간이 지닌 본능과 직감에 관해서.”

안경을 쓴 허묵이 의자에 깊이 기댄 채 유연이 정리한 기획안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이미 정해진 것 같은 메인 주제는 훌륭했는데, 세부사항이 빈약했다.

“인트로는 생각해뒀어요?”
“아뇨...”
“아까 단풍을 보고 확신이 섰다면, 그것 또한 유연 씨의 직감이자 본능이죠. 단풍에 대한 과학적인 소개로 시작한다면 조금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역시 그렇게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그러면......”

유연의 펜이 바삐 움직였다. 음식들이 치워진 테이블 위에서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한참을 그와 대화하며 끄적이던 유연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본능, 이라는 거. 너무 모호해서 개념이 쉽게 잡히질 않아요. 초반에는 잘 끌어가다가 어느 순간 보면 주제와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본능...... 사전적으로는 선척적인 것.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것을 말해요.”

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을 벗은 그가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꽃이 태양의 일조량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갓 태어난 젖먹이 새끼 강아지가 어미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 인간들도 마찬가지죠. 이런 생존 본능이란 게 얼마나 뛰어난 건지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보면 저절로 알 수 있어요. 어린 아이들이 저보다도 어린 동생을 밀쳐내며 손에 든 과자를 빼앗을 때, 그들은 죄책감을 느낄까요? 아뇨. 느끼지 못해요. 자라나면서 배우게 되죠. 우리가 지금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본능을 기저에 깔고 억눌러 만들어낸 사회적인 가면이에요.”
“그렇군요...”
“인간은 나이가 들고 성장할수록 본능을 감추는 법을 능숙하게 깨우쳐요. 본능에 의한 행동 보다는 지금까지 그가 자라온 성장환경과 배움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죠. 하지만 모든 인간의 기저에는 본능이 숨겨져 있어요. 아무리 포장해도 생물의 생존본능이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렬하니까.”
“교수님 말씀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 어떤 본능보다 우선시 된다는 말씀이시죠?”
“맞아요.”
“그렇다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살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허묵은 잠시간 말을 멎었다. 냉정한 표정이 언뜻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드물지만 그것 역시 존재하죠. 어디에든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허묵이 반문했다.

“유연씨는 그런 사람이 있나요?”
“...있었어요.”

한참만의 대답은 과거형이었다. 눈으로 재촉하자, 유연은 몇 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아빠요. 아빠의 사고 소식을 듣고... 몇 번이고 부정하고 부인하다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아빠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기억의 조각들은 여전히 날이 서있어 유연을 힘들게 했다. 슬픔을 담담히 받아들인 표정으로 유연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되는 것을 아빠는 분명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래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지지 않으려고. 아빠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텅 빈 마음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조차 모르는 채 그렇게.

“우리 아빤... 눈물이 많으셨거든요.”

허묵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드리워져 그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허묵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유연 씨가 어느 분을 닮았는지 알겠네요.”
“어... 나 교수님 앞에서는 운 적 없는데...”
“그래요? 많이 본 것 같은데... 참 이상하네.”

그는 말끝을 늘이며 웃어보였다. 긴 손가락이 유연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쓸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 유연은 심장 한 켠이 아릿해짐을 느낀다.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와 유연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저만 멋대로 비밀을 말해버린 것 같아 유연은 허묵에게도 대답을 받아낼 작정으로 물었다.

“교수님께는 그런 사람이 있나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런사람이 있었는지.

“기억 안나요.”

기억하고싶지않아

유연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로잡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눈을 허묵 역시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지금 당장. 유연씨 대신 목숨을 내놓으라 한다면.”

정적.

“기꺼이 내놓을 거예요. 난.”
“......”

유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저를 눈에 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보여지지 않는다. 한순간에 물에 잠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연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를 환기하려했다. 짧게 어색한 웃음이 흘렀다.

“하하... 농담이 지나치세요.”
“농담 같아요?”
“농담이 아니라도... 아니 어디까지 가정이시겠지만, 어쨌든, 그러지 마세요.”

할 말을 잃고 방황하던 것도 잠시, 예의 그 표정이 유연에게서 떠오르는 것을 허묵은 감상하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단호하고도, 꺾이지 않는다. 흔들릴지언정.

“저라면 교수님께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거예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 거예요.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예요. 어느 쪽이 혼자 남겨지는 건... 너무 외로우니까요.”
“......”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래주세요.”

유연은 이 말을 속삭이듯 덧붙이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리깐 시선 끝에 허묵의 니트 끝자락만 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들어 허묵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연구실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찬바람이 이따금씩 창가를 스치는 소리만이 들렸고, 함께 있으나 공허한 외로움에 유연은 작게 몸을 떨었다.

허묵은 연구실 캐비닛 쪽으로 가 곱게 개어져있는 담요를 펼쳐 유연의 어깨에 둘렀다. 보송하고 따뜻한 온기가 바깥의 추위로부터, 외로움으로부터 그녀를 격리시키는 듯 했다. 유연은 담요를 끌어당겼다. 어깨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녀는 허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집에 갈까요.”
“......네.”

그녀가 알던 허묵 교수, 눈매를 부드럽게 휜 그의 모습, 자신을 이토록이나 뒤흔들면서도, 그조차도 애처롭고, 조심스럽고, 쓸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에게로 다가설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


인간은 본능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욕망. 욕구. 본능. 갈구. 인간은 이것들 중 그 어떤 것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의 결과는 결핍. 결핍. 결핍. 그러므로 제 생애는 결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허묵은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곧 도착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본능.
생존에 직결된 모든 행동들.
물에 빠진 사람이 살기위해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붙잡는 행위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행위는 그다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자칫하면 둘 다 빠져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묵은 꽉 조인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났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보인 빛은, 생에 처음으로 눈에 담은 그 색은.


“교수님!”

저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묵이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그녀가 있었다.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이. 그 아래를 수놓는 빨강과 노랑의 향연이. 마치 폭죽과도 같았다. 이런 색채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네, 유연 씨.”

가장 아름다운 나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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