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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언유연] 가을, 전화 데이트

*여주인공 이름을 '유연'으로 설정


1.

어제 또 창문을 열어 놓고 잤나 봐. 방 안에 가득찬 비 냄새에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숨에 열을 빼앗긴 몸은 가을의 한기에 작게 떨린다. 일어나기 귀찮은데…가슴께까지 내려간 이불을 찾아 손을 더듬자 기다렸다는 듯 베개 근처에 놓인 휴대폰이 삑삑거리며 전자음을 토해냈다. 비정기적으로 맞이하는 휴일이지만 몸은 이미 다디단 늦잠에 적응했는지, 알람을 끄기 위해 한쪽 팔을 들어올리는 데에도 꽤나 많은 힘이 쓰였다.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들어올려 간신히 소리를 줄이고 손가락으로 뻑뻑한 눈가를 비볐다. 토요일 오전 열한 시. 이번에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 대신 며칠 전 이택언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울렸다.


2.

"이번 주 토요일, 잊지 말고 souvenir에 오도록 해요."

"그날은 휴일인데… 그리고 해외 출장 때문에 대표님도 안 계실 거잖아요."

"다음 프로그램의 소재는 요리로 잡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경험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상관하지 말아요, 재료들은 준비해 둘 테니까. 나와서 기본적인 것부터 프로그램에 싣고자 하는 음식들까지 다시 연습해 봐요. 내가 여태 가르쳐준 게 헛되지 않도록."

몇 주 전 그와 함께했던 저녁식사. 다음 기획에 대해서 생각해 둔 게 있냐는 이택언의 말에 나는 직원들과 진행했던 회의를 떠올렸었다. 천고마비의 계절, 기온도 마음도 뒤숭숭한 이 시기에 시청자들을 공략할 수 있는 적절한 아이템은 무엇인가. 바로 오감을 끌어당기는 음식이었다. 시중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막상 사 먹기에는 애매한 음식들. 이를 집에서도 간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일명 '먹방'이라는 소재를 고려해 보고 있다고 답하자, 이택언은 냅킨으로 입가를 훑더니 이렇게 말했었다. "나쁜 생각은 아니군요. 요리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가 필요하겠지만."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괜히 얼굴이 발개졌던 것 같다. 시각은 몰라도 미각은 충족하지 못하는 내 음식들이 떠올라서. 이택언도 그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던지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며 낮게 웃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악기는 물론 청중들까지, 공연장의 모든 존재들에게 신경을 기울여야 하죠. 그래야만 최고의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요.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청자를 포함해 그들을 매료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와 이름난 연예인을 고용해도 기획자가 주제에 관해 무지하다면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니. 제일 좋은 건 기획자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겁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고요."

"네, 노력해 볼게요."

이택언의 조언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라는 뜻일 거다. 회사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있지만 일단 총책임자라는 직책은 내가 떠맡고 있다.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쌓아 두라는 말은 기만이 아니라 기꺼워해야 할 소중한 나침반이었다. 요리를 방송에 내보낼 사람이 요리치인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누구한테 요리를 배워야 하나 고민하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유영 씨는 밥하기 싫어서 외식을 일삼는 사람이니까 안 되고, 나연 팀장님?

제작사 식구들을 한 명씩 떠올리던 중 한심하다는 투의 속삭임이 귀에 들어왔다.

"둔하긴."

뭐라는 거야? 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을 돌리면 와인잔의 스템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는 이택언이 있다.

"당신 노력만으로는 무리가 있을 텐데……. 이렇게 하죠. 주말에는 시간이 넉넉할 테니 오후 여덟 시 즈음에 souvenir에 와서 나한테 요리를 배우도록 해요. 기본적인 것부터 당신이 다루고자 하는 음식들까지, 최소한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지식은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예?"

"뭘 그렇게 놀랍니까. 당신의 성장은 내게도 영향을 끼쳐요. '유연 씨', 당신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요리를 알려주겠다는 거지? 이용하라는 패가 바로 이택언 자신을 가리키는 거였을 줄이야.

그렇게 수업인지 그저 일방적인 나무람인지 모를 것이 시작됐었다. 가스레인지를 켜 놓고 도마 앞에 가 있는 나에게 불을 내고 싶은 거냐며 귓가에 내리꽂던 잔소리, 겨우 완성한 음식과 그 앞에 잔뜩 긴장하고 서 있던 나를 번갈아 보던 이택언이 내쉰 작은 한숨. 그리고 식당의 문을 열면 앞치마를 두른 채로 뒤돌아보며 빨리 들어오라고 말하던 이택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간다. 마지막에 잔상처럼 남은 것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이택언의 얼굴. 흐릿하지만 살짝 올라가 있는 게 분명한 그의 입술이 열리며 며칠 전 대화의 마지막 말을 읊었다. 여태껏 나를 보기 위해 시간 쪼개서 souvenir에 발걸음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생각하고 잘 판단해 봐요.

이택언을 보려고 souvenir에 간 거냐고? 무슨 소리! 달아오른 볼에 손등을 대며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지난 밤에 춥게 잠든 모양이야. 볼이 뜨거운 걸 보니까. 툴툴거리며 창문 앞에 섰다. 가을 바람을 들여오던 창은 어느 새 붉게 물들어 버린 단풍잎까지 창가에 앉혀 두었다. 잎을 손에 쥐자 새벽의 물기가 손 안에서 에돌았다. 손에 젖어 든 가을을 움켜쥐었다. 좋아, 나도 그동안 많이 배웠어.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지 이택언이 없어서 가기 싫은 건 절대 아니다 이 말이야. 저번 주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평까지 받아 냈으니 오늘은 혼자서 완벽하게 성공할 거라고.


3.

밖에 나온 나를 맞는 건 일교차가 큰 가을답게 한층 차가워진 공기였다. 신발코에 엉겨 붙는 잎사귀들을 떨어내고 오늘따라 한산한 지하철역을 걸었다. souvenir에 도착한 건 오후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 평소 그와 약속하던 시간보다는 조금 이른 편이다. 불꺼진 가게 앞에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지고 작은 열쇠를 빼 들었다. 별안간 이택언에게서 이 열쇠를 받던 날이 떠오른다. "수업료를 내야죠." 하며 내게 내밀던 손에는 받아 낸다는 말과는 달리 윤이 나는 새 열쇠가 놓여 있었다지. 이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간수하는 것이 그날의 수업료였다. 가볍고, 동시에 무거운 의미가 담긴 값이었다. 그 조그만 열쇠에 souvenir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담아 내게 건넨 셈이니까. 당시에도 얼마나 놀랐는지 이택언이 답답한 듯 내 가방을 열어 열쇠를 넣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캄캄한 식당. 창고 한 편에 마련된 옷장에 겉옷과 가방을 넣고 손을 씻은 뒤 주방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배인님이 미리 청소를 해 둔 건지 이택언의 손이 닿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을 텐데도 깔끔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적막하다. 매일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아주 좋네."

말은 편하다며 좋다고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어쩐지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인정하기 싫다는 생각에 가볍게 손뼉을 치며 부러 씩씩한 척했다. 환기 차 열어 둔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와 시큰거리는 코를 다독이는 듯했다. 없는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내 일이나 하자. 애써 눈을 돌리며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무얼 만들어 볼까. 이택언이 재료는 구비해 둔다고 했었는데.

"어?"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커다랗게 번호가 쓰여진 채 냉장실 칸마다 붙어 있는 노란색 메모지들이었다. 그뿐인가. 가까운 메모지 한 장을 뜯어 보니 짤막한 문장들이 두세 개씩 적혀 있었다. 가늘게 흐르다가도 힘있게 발을 내리는 글씨체. 이택언의 것이다.

1번: 알고 있겠지만 야채류는 모두 여기에 보관합니다. 찾는답시고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2번: 고기는 이 칸에 미리 빼 둔 게 있으니 그걸 쓰면 돼요. 손질할 때 손 베는 바보가 없기를 바랍니다.

"뭐야, 이게……."

메모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붙여 두고 유일하게 번호가 적혀 있지 않은 파란색 메모지를 뜯어 보았다.

[이건 오늘의 계산서. 완성하면 나한테 전화해요. p.s)혹시 몰라서 주방 찬장에 반창고랑 약 챙겨 두긴 했지만, 오늘은 내가 바로 치료해 줄 수 없습니다.]

"요리는 내가 하는데 계산서는 무슨……."

옆에 있을 때는 윽박지르기 바쁘던 사람이 웬일이래. 나도 알아. 이택언이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쯤은. 손에 묻은 물기 때문에 칼이 헛돌면, 팔목을 낚아채 다친 데는 없냐고 다급하게 묻던 이택언이 여기 없다는 것쯤은 안다고. 괜히 툴툴거리며 혼잣말을 뱉었다.

메모지의 번호는 계속 이어졌다. 1번, 2번 그리고 10번까지. 뒤로 갈수록 내용은 사소해지고 또 살뜰해졌다. 말투는 역시 이택언답게 딱딱하고 절제돼 있었지만 문장 끝마다 찍힌 점에서 그의 지극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앞치마를 두른 채 고심하며 이 메모지들을 채웠을 그를 떠올려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결재서류에 사인할 때나 쓰던 만년필을 이런 사소한 데에 쓸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0번 메모지에는 여분으로 만들어 뒀다는 푸딩의 위치까지 적혀 있었다. 누구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누구를 떠올리며 적었을지는 분명하다. 이 사람, 정말 푸딩 하나로 나를 구워삶을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닐까.

"이택언 대표님, 하여간 사람이 솔직하지를 못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메모지를 입가에 대고 쿡쿡 웃었다. 목을 메는 잔가시 같은 외로움 때문에 아직 완연하게 웃어 보이기는 힘들었지만. 어디선가 "바보."라고 속삭이는 낮은 음성이 들려온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바깥은, 여전히 가을이 불고 있었다.


4.

정작 드러내고 싶은 알맹이는 꽁꽁 숨겨놓은 채 무감각한 껍데기만 걸쳐 입은 메모지는, 내게 이택언의 다정함을 알려준 건 물론 은근한 호승지심에도 불을 지폈다. 훌륭한 선생 아래에서 위대한 제자가 나온다. 청출어람이라는 네 글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이택언과 있을 때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휴대폰을 꺼내 야채를 데치는 시간부터 고기를 익히는 시간까지 조절하고, 이택언은 사용하지 않는 게 분명한 계량기까지 꺼내 들었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찬장의 냅킨까지 꺼내 세팅하는 정성을 뽐내기도 했다. 깔끔한 자기에 담긴 음식은 꽤나 먹음직해 보였다. 일단 외견은 합격점. 고기의 탄 부분을 가리기 위해 야채를 끼얹던 옛날과는 이제 작별이다. 이택언도… 이걸 보면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텐데.

주방에서 나와 둥근 식탁에 한 사람분의 식기를 내려놓았다. 등받이를 당기자 윤이 나는 바닥과 마찰한 의자 다리가 끽하는 소음을 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앉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이는 건 식당의 옆면을 이루는 유리벽. 여태 souvenir에 왔을 때와 달리 오늘은 그림자가 하나뿐이다. 어째서인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유리벽을 등지는 방향으로 옮겨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금이 간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나름 씩씩하게 외쳤건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2인분에서 한 사람만을 위한 양을 만들게 된 지도 꽤 오래됐는데. 사실 혼자 밥을 먹는 건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다만 투닥거리는 분위기 속에서도 누군가와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는 짧은 일상에 길들여져 버린 거겠지. 갑자기 울적해지고 말았다. 맛있는 걸 먹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나이프를 들어 고기 한 점을 멋들어지게 썰고 입에 넣었다.

"…맛없어."

왜 이렇게 맛이 없지? 간도 맞고 고기도 적당하게 익었다는 건 한입 베어물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은 단 하나뿐이다. '그저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맞게 익혀 적당하게 간을 한 고무를 씹는 느낌이었다. 이번엔는 같이 먹으려고 빼 둔 푸딩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한 스푼 떠서 입에 욱여넣었다. 달다. 그냥, 코가 저릿할 정도로 달기만 해. 식당의 출입문 너머 길가에 뒹구는 이파리들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다른 건 그렇다 해도 푸딩은 이택언이 만들어 둔 건데. 감히 맛없는 걸 내게 준 거냐며 자리에도 없는 이택언과 고장나 버린 건지 모든 걸 텁텁하게 받아들이는 혀에 대고 짜증을 퍼부었다.

그때 어디선가 우웅 하는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인 모양이다. 주방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화면에 떠 있는 세 글자. 이택언이다.

"여보세요?"

"오늘 음식값은 외상으로 달아 두려고 했나요?"

"생뚱맞게 무슨 소리예요?"

맛없는 음식 때문에 골이 나 있는데 이 사람은 실없는 소리를 하네. 전화기 건너편의 이택언을 향해 눈을 흘겼다.

"내가 남겨둔 쪽지 못 봤나요? 오늘 내야 할 값 중 나한테 전화해야 한다는 게 분명히 있는 걸로 아는데요."

"하려고 했었어요. 그새를 못 참고 급하게 먼저 전화하신 거면서. 나랑 그렇게도 통화하고 싶으셨나."

"웬일로 정확히 짚어 냈네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터무니없는 걸 음식값이라고 제시했죠."

퉁퉁거리며 말꼬리에 매단 혼잣말이었는데. 요즘 휴대폰은 왜 이렇게 성능이 좋은 거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화제, 화제를 돌리자.

"뭐… 근데 오늘 음식은 영 별로네요."

"왜. 또 태우기라도 했습니까?"

"아뇨 그럴 리가. 오늘 내가 한 조리는 아주 완벽했다고요."

나는 완벽한 수술을 집도한 전문의처럼 옆에 놓인 젓가락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최고의 재료가 뒷받침해 줬기에 가능했던 거겠죠. 근데 맛이 없다니, 뭐가 문제일까. 당신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면 허풍은 아닌 모양인데."

그러게요, 오늘은 왜 그럴까. 푸딩도 이상하게 맛이 없더라고요. '푸딩'에 유독 힘을 실어 답하자 이택언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흠……."

"제가 가을을 타는 걸까요?"

"가을?"

"네. 봄 탄다는 말도 있잖아요. 봄이나 가을처럼 이렇게 애매한 날씨에는 마음도 뒤숭숭하고 입맛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당신이 가을을 타서 입맛이 떨어졌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가을은 수확과 상실의 계절이라고도 하니까. 근데 왜요? 뭐가 이상한가요?"

"아닙니다. 당신도 입맛이 떨어질 수가 있구나 해서요."

이 사람이 진짜!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깜빡이는 화면을 노려보았다. 이런 내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은 통화시간을 알리는 초침을 제외하고 변함이 없다. 스피커에서는 이택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진지한데 혼자 재밌나 봐.

"계속 놀리실 거라면 먼저 끊을게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먹어치워야 하거든요."

"……미안합니다."

말은 잘하지. 식욕도 다 떨어진 마당에 굳이 고적한 식탁 앞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의 찬 공기가 창문에서 쏟아지자 조금 비켜서서 싱크대에 허리를 기대어 섰다. 전화기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만을 수신하고 있었다.

"타지에서 당신 목소리를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들뜬 모양입니다. 농담이었어요."

"아 네, 제 목소리 듣고요… 그렇다고 해 두죠."

"아까 하던 얘기나 다시 해 봅시다. 레시피도 조리과정도 완벽했는데 맛이 없다는 겁니까?"

"네. 얼마 전 대표님이 나쁘지 않다는 평을 내려 준 음식은 제 입맛에도 정말 잘 맞았는데 오늘은 영 시원찮네요."

그때는 고기가 조금 탔었는데도 괜찮았단 말이에요. 오늘은 어떤 재료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대표님 귀국하시면 다시 똑같이 만들어 드릴 테니까 그때 한번 평가해 주세요. 그럼 내가 이상한 건지 재료가 이상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기 하나 할까요? 내가 당신 옆으로 돌아가고 당신이 만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면, 그때는 밥이 설익었든 고기가 타든 당신은 분명 맛있다고 답할 겁니다."

"무슨 말이에요?"

"생각해 봐요. 당신이 맛있다고 손가락을 추켜올릴 때마다 곁에 누가 있었는지를."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치부해 버리려고 했다. 이택언의 마지막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휴일 저녁들을 회상했다. 오이 대신 손을 재료로 쓸 뻔했던 첫 수업 날 프로그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며 나를 주방 밖으로 내쫓던 이택언. 창밖을 보며 속상한 마음을 삭이던 나에게식사할 준비나 하라며 어깨를 톡톡 치던 이택언. 몇 번의 수업과 연습 끝에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 날, 잘했다는 듯 반창고에 휘감긴 내 손가락을 가볍게 쓸어 주던 이택언. 아직 엉성하지만 노력과 정성으로 점철된 내 요리를 마주앉아 먹었던 어느 저녁. 모든 기억이 이택언으로 매듭지어졌다.

"음식은 누가 만드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먹었느냐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

"일종의 기억장치인 셈이죠. 갓 만든 솜사탕 대신 남편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다 녹아 버린 솜사탕을 골랐다던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처럼요. 당신이 완벽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무상함을 느꼈다면, 그건 기억이 묻어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기 때문일 테고."

"아……."

"어때요. 내 말이 맞습니까?"

***

이택언은 새벽 세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돌아올 유연의 대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게요 진짜, 매번 대표님이 계셨네요."

초침이 숫자 1에서 3으로 달려가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기분 좋은 기억들 속에 당신이 있었다고 시인한다. 나쁘지 않은 말이다. 아니, 오히려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애써 시차에 적응한 생활 패턴이 다 어그러지고 잠이 필요하다며 비명을 지르는 근육들이 여전히 신경을 긁지만, 원하던 답을 얻어 냈으니 그다지 손해를 보는 장사는 아니다.

"대표님 귀국하시면 고기도 안 태우고 간도 맛있게 해서 제가 한번 대접할게요. 이제 도움 없이도 혼자서 해낼 수 있어요."

"괜찮은 제안이군요."

"음식값은 얼마나 청구할지 안 물어보시나요?"

"지금까지 도움 받은 걸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당신은 내게 빚진 게 아닌가요?"

"매 수업마다 수업료 받아 간 사람은 어디 사시는 누구였죠?"

하, 이택언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souvenir의 열쇠를 내주고, 유연이 좋아하는 과일을 잔뜩 안겨 주며 알아서 처리하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등 그가 지금까지 유연에게 청구한 '수업료'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수업료의 탈을 쓴 그것들을 본인도 따라하시겠다는 거군. 토끼의 앞발에 걷어차인 기분이다. 아직 그의 가슴팍에 흠집을 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발간 자국을 남기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다. 이택언은, 이번에도 밑지는 거래를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요. 어디 들어나 봅시다."

"돌아오시면… 휴일 저녁 시간을 저한테 주셔야 해요.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무조건요."

같이 식사나 하자는 말이에요. 작게 흘리는 목소리와 부끄러운 듯 신발을 바닥에 대고 끄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이렇게 또 내 예상을 벗어나지. 밑지는 거래를 해 주려 했건만 오히려 몇 곱절 유리한 결과를 얻어 내고 말았다. 이택언은 애써 웃음을 갈무리하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좋습니다, 기대해 보죠.

유연은 다시 입맛이 돌아온 것 같다며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 천진함에 다시 미소를 짓고 만다. 시간, 멈춰 줄까요? 왜요? 가을의 만찬을 만끽해야 하잖아요. 그녀의 외로움을 해소해 주기 위해 시간까지 멈추게 했다. 유연은 역시 기쁨을 숨기지 않는다. 바쁘게 손을 놀리며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대표님 계신 곳은 날씨 어때요? 그냥, 가을입니다 당신이 없는 밋밋한 가을이죠. 새벽의 한기로 차가워진 뺨에 휴대폰의 열기가 전해져 왔다. 돌아가면, 상대를 거침없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이다. 방금처럼 먼저 거래를 청하는 주제에 상대에게 유리한 패를 건네는 것 따위는 잊어버리도록 해 줄 테다. 이택언이 못 하는 건 없다. 그녀도, 그렇게 될 것이다.

조잘거리는 유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택언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잠 자기는 그른 모양이다. 불쾌한가? 오히려 기꺼울 뿐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며 이택언은 유연과 함께있다. 다정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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