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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락 X 유연] 휴일을 보내는 가장 완벽한 방법

단풍놀이를 못가게 된 기락과 유연이 휴일을 보내는 방법



"...그래서, 정말 얼마만의 휴가였는데! 같이 단풍놀이 가는 것도 진짜 기대했는데... 못 갈 것 같아. 미안해요, 허니칩씨."


기락은 일정을 무리하게 조정해 정말 오랜만에 휴가를 냈었다. 신곡 녹음과 앨범 자켓 촬영, cf 촬영, 막바지였던 드라마 촬영 일정을 분 단위로 쪼갠 스케쥴에 어떻게든 욱여넣어 3일간의 휴가를 받아냈던 것인데, cf 촬영 중 다리를 다쳐 유연과의 단풍놀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에 크게 낙담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것이, 며칠간 이동시간에 차 안에서만 쪽잠을 자고 끼니를 도시락으로만 떼우면서도 유연과 놀러가겠다는 일념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터였다.


"난 괜찮아요. 기락씨는 괜찮아요? 많이 다친거 아니에요?"


기대했던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유연에게는 기락이 괜찮은 지가 가장 중요했다.

다쳤다는 기사가 뜨지 않았으니 심한 것은 아닌 듯 했지만, 그래도 그가 얼마나 기대했었는지를 아는데 놀러가지 못한다고 먼저 말할 정도라니 걱정이 되었다.


"깁스를 해서 걸어다니긴 좀 힘들지만 괜찮아요. 아, 뭐든 말만해요! 다리 다 나으면 허니칩씨 먹고 싶은거, 갖고 싶은거 전부 사줄게."


유연의 걱정어린 목소리에 기락이 부러 밝은 척을 하며 웃어보였다. 과장되게 괜찮은 척을 하는 걸 보니,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는 늘 그랬다. 아파도 멀쩡한 척, 힘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꾀병을 부릴 때는 잘만 아프다 소리를 하면서, 정말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땐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 가득 트레이드 마크인 해맑은 미소를 띄우고 괜찮아요, 난 멀쩡해. 걱정말아요.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어느정도 옆에서 지켜보니 알게되었다. 기락은 늘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처음에는 그저 한낮의 태양처럼 눈부시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다. 밝은 모습만 있는 사람은 없는건데도. 빛이 강해질수록 그림자는 짙어지는 법이었다.


"좋아요. 다 나으면 꼭 맛있는거 사주기에요? 나 엄청 비싼거 시킬거니까 각오해요."


유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말을 장난스레 받았고, 그것이 바로 기락이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아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면 자신에게 보여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지않은 어두운 부분이 있는 법이니 그게 그가 바라는 것이라면.


"하하. 당연하죠. 뭐든 엄청 비싼걸로 잔뜩 시켜요."


유연과의 통화로 기분이 좀 나아진 기락이 수화기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의 목소리는 꼭 청명한 여름날의 녹음 같아서, 듣고 있자면 눈 앞이 초록빛으로 반짝거렸다.


"약속이 취소돼서 유연씨도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겠네요. 미안.."

"미안하단 말은 이제 금지에요! 충분히 사과했는걸. 기락씨는 쉬는동안 뭐하려구요?"


유연의 질문에 기락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최근 해외투어 일정을 다녀온터라 쉬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기도 했고, 데뷔 이래로 늘 바빠 사실상 제대로된 휴일은 얼마 가져보지 못했었다.

휴가라고 해도 명절에 매니저 형의 본가에 함께 다녀오거나, 못잤던 잠을 몰아 자거나, 그도 아니면 새로 나온 게임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내가 기락씨네 집에 놀러 갈까요?"


기락이 고민하는 것이 느껴지자 유연이 제안을 해왔다. 어짜피 같이 여행을 가려던 휴일이니, 장소만 야외에서 집으로 바뀐다 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음..."


바로 좋다며 기다리겠다고 얼른 오라고 할 줄 알았던 기락이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저함에 유연은 오히려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내가 장봐서 곧 갈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




기락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유연은 마트에 가야해서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 화면이 뜬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기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정쩡하게 휴대폰을 들고 있는 왼손은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고, 오른손은 아예 깁스를 한 상태였다.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에 난 붉은 생채기들이 눈밭에 핀 매화처럼 선명했다.

이번에 찍은 것은 스포츠웨어 광고였는데, 암벽등반 컨셉이었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좋은 편에다 오랜기간 몸을 단련해 왔기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새로 들어온 막내 스텝의 실수로 장비가 풀어지는 바람에 공중에서 떨어졌었다.

날아다니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고 실내에서 와이어를 달고하던 촬영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실제 암벽에서 찍었다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마침 휴가를 냈던터라 쉬고 돌아오면 된다며 기락은 특별히 다쳤다는 기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했다. 뼈도 부러진것이 아니고, 금만 간 것이니 며칠동안 깁스를 하고 음악방송에 나갈 때만 잠깐 풀면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다친 와중에도 기락은 드라마 액션씬 촬영은 전부 마쳤다는 것과 신곡이 댄스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잔잔한 발라드곡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정도로 다친 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먼저 유연의 집에  찾아가거나 놀러오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양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괜히 걱정만 시키고 유연을 즐겁게 해 줄 일을 별로 할 수 없을테니 같이 있어달라고 하기도 미안했다.

그녀도 회사일로 정신없이 바쁘다, 모처럼 휴가를 낸 것이었을텐데 그 귀중한 시간을 자신과 집에서 재미없게 보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라도 전화를 해서, 다시 급한 일정이 생겨 회사에 나가봐야한다고 할까 고민을 하는데 유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락씨, 나 이거 샀지롱. 뭐게요? 금방 도착하니까 심심하면 뭔지 맞춰보고 있어요.]


유연을 닮은 귀여운 토끼가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이모티콘과 함께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였다. 사진 속에는 유연이 활짝 웃으며 네모난 상자를 앞면이 보이지 않게 들고 있었다.

아, 당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기락이 낮게 읊조리며 쇼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늘 즐겁고 행복한 일만, 밝은 모습만 그렇게 좋은 것들만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해 줄, 아니 사랑하고 있다고 속을 수 밖에 없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유연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원래 약한 부분과 모난 부분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유연에게는 특히 조심스러웠다. 아프다고 많이 다쳤다고 하면 그녀가 약하다고 무시하거나 귀찮아할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아원에서 실험실로, 그 다음은 연예계로 기락이 살아온 환경은 선뜻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

기락은 유연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금방이라도 초인종이 울릴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긴장이 되어 도망가고 싶기도, 그러면서 묘하게 기대도 하게되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며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띵동,하고 벨이 울렸다.

쇼파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걸어가 현관문을 살짝 열자, 쇼핑백을 한아름 품에 안은 유연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온통 가을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톤다운된 갈색 니트에 짙은색 스키니진, 검은색 워커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유연은 가을 컨셉 화보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작정하고 그렇게 입은 것이 눈에 보여 기락이 소리내어 웃었다.


"짠! 가을 배달왔습니다."


유연도 그를 마주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여전히 미소를 띈 채 손을 내밀어 보라는 말에 기락이 우물쭈물하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유연이 손을 뻗어 문을 잡아당겼다.


"...세상에."

"하하. 놀랐죠? 이래서 오지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멋쩍은 듯 웃으며 건네는 기락의 말에도 유연은 아무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그를 살필 뿐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얼굴에 난 상처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안 좋았지만 다쳤다고 했으니까 타박상 정도는 있을 수 있지, 생각했는데 그런건 아무것도 아닐만큼 그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양쪽 팔이며 다리에도 붕대가 감겨있고, 허리나 옆구리도 다친 것인지 자세도 구부정했다. 아니, 양 쪽 손을 다 제대로 못 쓰는데 혼자 3일간 뭘 어쩌려고 한건지.


"일단 들어가요. 서있기 힘들잖아."


-


짐을 받아주고 싶어하는 기락의 손을 막으며, 유연이 성큼성큼 거실을 통과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절뚝거리며 부엌까지 따라와 벽에 기대 옆에 서있는 기락을 식탁 의자에 앉혀놓고 유연은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작은 손으로 뭘 이리 잔뜩 사온것인지 물과 에너지드링크, 단백질 쉐이크를 제외하곤 텅 비어있던 냉장고가 금세 가득 채워졌다.

아무말없이 정리를 끝낸 유연이 기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있어 기락은 숨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거짓말을 했다고 화를 낼까. 아니면, 이제 집에 돌아간다고 하려나.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데, 유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를 품에 안았다. 이마가 그녀의 배에 닿았고, 유연의 몸은 밖에서 막 돌아와서인지 약간 차가웠지만 포옹은 다정했다. 머리칼 안에 손을 집어넣어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유연이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요. 진짜 속상하게.. 많이 아팠어요? 아직도 아파요?"

"아..."


기락이 대답이 없자, 유연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다음부턴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봤자, 바로는 듣지 않을꺼 아니까 한동안은 힌트만 약간 주면 자기가 알아차리겠다고. 그래도 천천히라도 조금씩 더 자신에게 기대달라고. 당신이 힘들거나 아픈 날만큼은 혼자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왜냐고는 묻지 않을테니까 같이 있자고.


"그러는 거에요, 응?"

"...네."


기락의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유연이 안고있던 몸을 떼어내려 했다. 그에 기락이 아무렇게나 내려두었던 손을 들어 그녀를 마주안아, 떨어지지 못하게 양 팔 안에 단단히 가두었다.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조금 놀란 듯 했던 유연도 이내 살짝 웃으며 그를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풀고는, 아이같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봐요. 같이 있으니까 좋잖아."

"그렇네요."


그녀의 품에 기대 조금 빠른 듯한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듣고 있는 순간은 찬란해서,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락은 그녀에게 영원히 라던가, 내년에도 라던가, 앞으로도 늘 이라던가, 그런 말을 반쯤은 의식적으로 가끔은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입버릇처럼했다.

그 말에 그녀가 웃어주는 것이,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하는 것이 못견디게 좋았다. 그녀 안의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미래를 약속해주는 것은 찰나였지만, 기락은 그 순간 속에서 영원함을 발견하곤 했다.


"허니칩씨, 근데 배고파요?"

"아이 참, 뭐에요."


어느새 원래의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온 기락이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하는 농담에 유연은 볼이 빨개져 뒤로 물러났다.


"아직 아무것도 안먹었으니까, 당연히 배고프죠. 기락씨는 뭐 좀 먹었어요?"

"나도 아직. 뭐 먹고 싶어요? 배달시킬게."


뭘 시키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금방이라도 번호를 누를 것처럼 핸드폰을 집어든 기락에게 유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이며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기 완전 꽉 찼거든요, 우리 3일동안 진짜 열심히 먹어야해요."

"뭘 이렇게 사온거에요, 무겁게! 내가 데리러 갔어야 하는데.."


기락이 미안해하자, 유연은 택시를 타고와서 별로 안 힘들었다며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그리곤 얼른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보라고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아 궁금하잖아요, 라면서도 그녀의 말에따라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고 양손을 내민 기락의 손, 정확히는 손에 감겨있는 붕대 위에 작은 박스가  놓여졌다.


"뭐게요? 아까 맞춰보라고 사진도 보냈는데 생각해 봤어요?"

"글쎄.. 뭘까? 장난감인가?"


기락이 상자를 살짝 흔들어보더니 대답했다.


"땡! 틀렸지롱. 눈떠봐요."


유연의 신이 난 목소리를 들으며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손에 올려진 것은 단풍나무 숲이 예쁘게 그려져있는 500피스짜리 퍼즐상자였다. 퍼즐 상자 위에 오는 길에 주웠는지, 빨갛고 노랗게 예쁘게 물든 단풍잎과 은행잎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기락씨가 단풍놀이 못간다고 속상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엄선해서 제일 예쁜걸로 골라왔어요. 단풍놀이 안가도 집에서 보면 되지, 뭐. 안그래요?"


아름답기로 유명한 세상 어떤 단풍나무 숲을 가져와도 쑥스러운듯 웃고있는 유연의 붉게 물든 뺨만큼 황홀하지 는 않을 것이었다.


"고마워요. 완전 행복해졌어."

"이따가 밥먹고 같이 퍼즐 맞춰요."


유연은 그렇게 말하곤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재료를 꺼냈다. 고기와 각종 야채를 다져 버터를 두른 팬에 볶다가 밥을 넣고 조금 더 볶자 금방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계란지단을 부쳐 볶음밥에 이불을 덮어주고 케챱으로 하트를 그리는 것도 잊지않았다.

원래는 점심에 스테이크를 구우려고 했었지만, 팔을 다친 기락이 먹기엔 잘라주더라도 좀 힘들 것 같아 유연이 메뉴를 바꾼 것이었다. 잘라서 입에 넣어줘도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안 그래도 요리하는 내내 안절부절하며 비맞은 강아지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던 그가 너무 미안해할 것 같았다.


유연이 익숙하게 찬장에서 꺼낸 접시에 플레이팅을 하는 동안 기락은 다친 손으로 끙끙대며 음료를 잔에 따랐다. 유연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기락의 성격상 그녀 혼자 식사 준비를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고생시킨 것 같은데 이것마저 안하면 너무 염치가 없지 않냐며 이거밖에 못해줘서 미안해요,하고 등 뒤에서 안아오는 기락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준비가 끝나고 식탁에 마주보고 앉자마자 기락은 숟가락을 들고는 계란에서 하트모양 케챱이 뿌려진 부분을 조심스레 분리해 내 입안에 넣었다.


"와~ 진짜 맛있다! 최고에요, 유연씨."

"계란 밖에 안 먹어놓고, 뭐가 최고에요."


유연이 장난스레 눈을 흘기자,


"나는 계란프라이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지 지금까지 전혀 몰랐는걸? 당신이 사랑을 담아줘서 그런가봐요."


진지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한다.

둘은 약간 많은 듯 했던 볶음밥을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웠다. 먹는 동안엔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다 다친 것인지 들을 때에는 유연은 제가 다친것마냥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양손을 모은 채 속상해했고, 드라마의 액션신 촬영과 신곡이 춤이 없는 것에 대해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기락을 조금 혼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제발 자신을 좀 소중히하라는 유연의 말에 그는 앞으로는 꼭 그러겠다고 너무 혼내지 말라며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에 유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 식탁을 가로질러 손바닥을 내밀자, 기락은 자연스레 그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왔다.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듯 올려보는 눈빛에 유연이 다른 쪽 손을 뻗어 그의 결좋은 밀밭색 머리칼을 흐트러뜨리자, 기락은 눈을 감고 기분좋은 고양이처럼 갸릉거렸다.


"기락씨는 진짜 커다란 멍멍이 같아요."

"하하. 유연씨 혹시 늑대개라는 거 들어봤어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나즈막히 내뱉는 말이었지만, 유연은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가 이런 목소리로 말한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이따가로 미뤄둬요. 해야할 게 잔뜩인걸?"


해야할 일이 많다는 말에 기락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볼 때마다 시선을 빼앗겼다. 그냥 미뤄두지 말까 또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던 유연은 기락의 유연씨?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완벽한 휴일을 보내는 법을 알려줄께요."


기락은 쉬는 날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휴일에도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그냥 자거나, 게임을 할 것 같다는 그의 말에 함께 놀러 가기로 했던 것인데 단풍놀이를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다른 방식으로 완벽하게 보내는 법을 알려주면 될 것이었다.

유연은 의자에 걸어두었던 트렌치코트의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혀있는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펼치자 동글동글한 유연의 글씨체로 적혀있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 휴일을 보내는 가장 완벽한 방법 >

1. 미뤄놓은 설거지와 빨래를 한다.
2. 쌓아놓은 쓰레기를 치우고, 방정리를 한다.
3. 샤워를 해서 몸을 뽀송하게 만든다.
4. 먹고싶은 술과 안주를 잔뜩 마련한다.
5.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잠들기 전까지 보고싶었던  영화와 드라마를 몰아본다.


기락이 소리내어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을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그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읽으니 시덥지 않은 말이 마치 무슨 명언이라도 된 것 처럼 느껴져 유연이 조금 웃었다.


"이건 인터넷을 하다가 본건데요, 내가 휴일을 보낼 때 좋아하는 일과랑 너무 닮아서 적어둔거에요. 기락씨 줄게요. 쉬는 날 뭘 해야할지 모르겠으면 이대로 따라해봐요. 완전 완벽한 하루가 될 걸요?"

"좋아요. 잘 가지고 있다가 한 번 따라해 볼게요. 고마워요. 오늘 우리도 이대로 하는건가?"


기락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받은 양, 종이가 원래 접혀있던 모양대로 잘 접어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놓았다.


"우리는 퍼즐 맞추기가 추가되는거죠! 우선 설거지부터 차근차근 해볼까요?"

"그치만.. 방정리랑 쓰레기버리기 같은 건 우리 집인데 내가 해야죠. 유연씨는 손님인걸! 우리 3번부터 시작해요."


설거지할 것을 쌓아놓을 순 없다는 유연의 말에도 기락은 드물게 고집을 부렸다. 잠깐의 투닥거림이 오가다, 딱 오늘 먹은 것까지만 그냥 두고 내일 한번에 치우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고집쟁이. 얼마 되지도 않는 걸."


유연은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에 힘을 주고 기락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의 볼을 살짝 당겼다가 놓아주었다.

그릇들을 싱크대에 대충 넣어두고, 거실로 가 쇼파에 기대앉아 여행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틀어두고 대망의 퍼즐 개봉식을 가졌다. 퍼즐 박스 위에 올려두었던 알록달록한 입사귀들은 어느새 쇼파 옆 탁자에 곱게 놓여있었다. 아마 기락이 코팅을 해서 책갈피 같은 걸 만들었다며, 만화책을 보다가 끼워놓을 거라고 조만간 자랑할 듯 했다.


퍼즐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톤이라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기락은 척척 맞춰나갔다.


"기락씨 내가 찾아봤는데, 퍼즐은 우선 가장자리부터 틀을 잡고 비슷한 부분끼리 모아둔 다음에 맞추면 쉽대요."

"...응?"


그녀가 핸드폰으로 공략법을 찾아보고 있는 동안, 기락은 벌써 모서리를 다 맞추고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단풍나무가 두개쯤 보이는 퍼즐을 계속해서 맞춰나가고 있었다. 붕대를 감고 있어서 어설픈 손놀림에도 굉장한 속도였다.


"기락씨 원래 퍼즐 좋아했어요..?"

"으으응. 완전 어렸을 때 빼고는 처음 해보는 건데? 근데 꽤 재미있는데요?"

"아니, 그럼 어떻게 이렇게 잘 맞춰요? 공략법 몰래 찾아본거죠?"


그가 핸드폰을 들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유연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퍼즐은 계속해서 본래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하면 될 것 같아서, 라고 말하는 기락을 보며 유연은 그가 타고난 게임 천재였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별거 아닌 일인걸 알면서도 유연은 괜히 경쟁심이 불타올라 티비를 켜두었다는 사실을 잊을만큼 퍼즐을 맞추는 데 열중했고, 마침내 마지막 퍼즐 조각만을 남겨두었다.

유연이 기락에게 마지막 조각을 건네주려 손을 내밀었다.


"기락씨가 나한텐 이 조각 같은 존재에요. 많은 조각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없으면 절대 완성될 수 없는 그런거."


늘 기락이 그녀에게 하는 진심을 담은 낯간지러운 말 건네기를 따라해보려는데, 영 쉽지가 않아 양 볼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기락은 기분 좋게 웃으며 순순히 퍼즐조각을 받아들었다. 비어있던 가운데 공간에 퍼즐 조각을 끼워넣자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딱 맞아들어갔다. 기락은  그러곤 탁자의 서랍을 열어 코팅된 리모콘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을 하나 꺼내어 퍼즐 아래로 집어넣었다.

뭐하는 거냐고 묻자 기락은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진지한 얼굴로 퍼즐을 뒤집어 달라고 부탁했다. 유연이 덩달아 진지해져 조심히 퍼즐을 뒤집자 온갖 화려한 색깔로 가득하던 앞면이 사라지고, 아무런 무늬 없이 깨끗한 흰색인 뒷면이 드러났다.


"이게 진짜 나에요. 그리고 나한테 유연씨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퍼즐의 뒷면을 궁금해 해 준 사람이고, 또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기대와 다른 아무것도 없는 뒷면을 보여줘도 실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사람이에요."

"아..."


유연은 아무 말 없이 기락을 바라보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펜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하얀 바탕 위에 글씨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날짜와 기락, 유연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혔다. 꽃, 별, 하트, 구름 같은 귀여운 무늬도 그려졌다.


"같이 예쁘게 채워나갈 수 있어서 난 좋은데요?"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아도 진심이 전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두 입술이 맞닿았다. 팔을 다쳤단 사실을 잊고 평소처럼 바닥을 짚고 몸을 기울여 가까이 다가오려던 기락이 균형을 잊고 휘청이는 바람에 유연이  그에게 깔린 자세가 되어 잠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무거울거라는 생각에 기락이 얼른 유연을 살짝 잡고 몸을 돌려, 그녀를 자신의 몸 위에 겹치듯 올려놓았다. 입술과 가슴, 배, 다리의 굴곡이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아들었다. 웃으며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떼는 버드키스로 시작해, 점점 기락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며 키스의 농도도 짙어졌다.







...그리고 둘만의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유연은 기락이 씻는 것을 도와주었고 머리도 직접 말려주었다. 티비에서 해주는 영화를 한 편 봤고, 냉장고에 음식이 잔뜩 쌓여있었음에도 배달 음식을 이것저것 잔뜩 시켰다.

요즘 가장 인기가 많다는 예능을 틀어놓고 차례로 배달 온 음식을 잔뜩 펼쳐놓고 먹으며 캔맥주를 마셨다. 유연은 종종 티비를 보며 웃었고, 기락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과의 일화도 몇가지 말해주었는데, 유연은 예능보다 그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고 했다.

배달 온 음식을 깨끗이 비우고 잘 정리해서 그릇을 문 앞에 내다놓은 후, 퍼먹는 아이스크림 한 통과 엄선한 과자 세봉지를 가져다놓고 기락의 노트북을 켜서 보려고 마음먹었던 미국 드라마를 첫화부터 보기 시작했다. 3일동안 열심히 보면, 다 볼 수 있을거라고 기락이 우긴 드라마였다.



"허니칩씨, 집에 안 갈꺼죠?"

"음, 글쎄요. 기락씨 하는거 봐서 갈 수도 있고.."



농담으로 던진 말에 금방 울상이 되는 걸 보고, 유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안아주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계속 웃게된다. 행복했다. 찬란하게 사랑하는 이 날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라게 된다.


"안가요, 이렇게 재밌는데 왜 가. 어때요, 진짜 최고의 휴일이죠?"

"응. 정말 완벽한 휴일이네요."


유연만 옆에 있어준다면, 아무리 힘든 날이라도 모든 날들이 완벽한 날이 될 것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완벽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몸의 중심을 기울여 유연에게 몸을 기대자, 고개를 살짝 돌려 마주보며 미소를 지어온다. 그녀가 자신 옆에서 행복해하는 이런 날들이 영원하기를, 기락은 눈을 감고 주위를 둘러싼 따뜻한 공기에 진심을 새겨 넣었다.

당신도 나와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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