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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내려앉은 자리

백기 × 유연

온 세상이 아름답게 물드는 가을 어느 날, 유연은 편지를 한 통 받았다.

 

편지봉투에는 연모고등학교의 마크가 크게 찍혀 있었다. 지난 번 개교기념행사에서 일어났던 일의 유감을 표하는 교장의 자필 편지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편지지에는 연모고등학교 야외 공연장에서 매년 열리는 가을 음악회의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두 장이네.”

 

유연이 티켓을 입에 가져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같이 가자고 하면 가줄까.”

 

고민만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유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의 모든 눈이 그녀에게 쏠렸다.

 

“나 잠깐 다녀올게요!”

“어딜? 왜?”

 

안나의 물음이 메아리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정의로는 낭만이 넘쳐흘렀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 해의 꼬리가 유연의 구두를 살포시 덮었다. 벽에 손을 짚고 경찰서 안을 힐긋 훔쳐보는 이의 두 발이 바닥을 콩콩 두드렸다. 눈을 가늘게 뜨며 경찰서를 살피던 유연의 목은 끝을 모르고 길어졌다.

 

기울어진 그녀의 머리 뒤로 백기의 머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으로 쫓던 백기는 마침 그녀의 머리카락에 앉은 낙엽을 떼어냈다.

 

“뭐해?”

“엄마야…….”

 

뒤를 돌아보며 중심이 기운 순간, 백기가 한 발 앞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저기.”

 

반 이상 누운 자세로 백기를 올려보고 있으니 두 손이 가지런히 가슴 앞에 모아 쥐어졌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며칠 동안 경찰서 앞을 서성인다는 여자가 너였어?”

“아마도요.”

 

백기는 등을 받치며 유연을 바르게 일으켰다.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고 뒷걸음을 친 유연이지만, 경찰서의 벽이 금세 닿아서 티도 나질 않았다.

 

“무슨 일 있어?”

 

백기가 물었다. 웬일인지 백기는 사복차림도 아니었고, 제복차림도 아니었다. 검은색 수트를 입고,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서 반듯한 이마가 훤히 보였다.

 

“선배, 선봐요?”

“네가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백기는 눈짓으로 그녀의 옷을 가리켰다. 등이 파인 짙은 와인색 드레스에 하얀 비즈들이 다닥다닥 붙어 반짝거렸다. 평소에는 차분하게 내렸던 머리도 곱게 끌어올려 목선이 훤히 보였다.

 

“너 또 선…….”

“아녜요!”

 

백기가 입을 열기 무섭게 유연이 대답했다. 그리곤 가방에 넣어 두었던 표를 내보였다. 유연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을 이었다.

 

“가을 음악회 초대를 받았는데 드레스 업이 필수라서 그런 거예요.”

“한 장은 누구 건데?”

 

백기의 물음에 유연이 한 장을 잽싸게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차가운 바람에 가벼이 몸을 흔드는 티켓 한 장만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같이! 갈래요? 가 줄래요…….”

“…….”

“가주세요…….”

 

유연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백기는 유연과 유연이 든 티켓을 번갈아 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뒷목을 매만졌다.

 

“저녁에는 일이 있어.”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나름대로 호기롭던 유연이 풀이 죽은 얼굴로 티켓을 끌어당겼다.

 

“아, 하긴. 선배는 바쁘니까.”

“그게 아니라. 미리 얘기했으면 가능했을 거야.”

“선배가 연락이 안 됐잖아요. 사흘씩이나.”

“중요한 사건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러시겠죠.”

 

유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화났네.’

 

백기는 유연의 눈치를 살피며 생각했다. 연락이 닿지 못한 것은 제 탓이었기에 그는 묘수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런 차림으로 혼자 가게 했다가는 일이고 뭐고 잡힐 것 같지도 않았다.

 

“가자.”

 

백기가 토라진 유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 있으시다면서요.”

“그 가을음악회,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어서 경찰인력이 동원됐어. 나한테까지 올라오지 않는 업무인데 직속 부하가 중요한 일이 있대서 대신 해주게 됐다고.”

‘아, 그래서 미리 얘기했으면 될 거라고 그랬구나.’

 

백기가 걸음을 내딛으며 돌아보았다. 공중에서 맞은 시선이 그녀의 걸음을 움직이게 했다.

 

백기의 등을 보며 걸음을 걷던 그녀가 백기의 옆으로 다가와 그를 힐끔 보았다. 경찰이지만 제복을 입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가끔 보는 제복 입은 백기를 보는 것도 색달랐지만, 오늘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왜?”

“선배, 멋있어요.”

 

유연이 엄지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며 미소 지었다.

 

“그래?”

 

백기는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붉어진 목덜미에 바람이 흔든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흔들렸다.

 

‘귀엽다고 말하면 놀린다고 생각하겠지?’

 

백기의 잇새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들렸다. 높게 묶은 유연의 머리카락의 끝을 만지는 그의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

*

 

 

시내 길에서 학교 정문으로 이르는 길을 따라 가을 음악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날렸다. 붉게 단풍이 든 가로수에 짙은 남색 현수막이 돋보였다. 학교 언덕을 넘어야 있는 야외 공연장으로 향하는 길에 오픈마켓이 들어서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도 있었고, 체험부스도 있었다. 저녁시간을 틈타 학교에서 탈출한 학생들이 더해져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백기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기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따라오던 유연이 그의 어깨위로 눈을 빼꼼 내밀었다.

 

“학교 축제랑 같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늘 많았잖아요.”

“미아 되기 딱 좋겠네.”

 

백기는 유연의 손을 바짝 끌어당겼다.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듯 그는 큰 흐름에서 빠져나와 부스 옆으로 피신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부스와 부스 사이의 좁은 틈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혹시나 잊어버릴까 싶어 잡은 손은 여전히 잡혀있었다. 백기는 갑갑했는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막상 여기까지 오고 나니 백기 없이 혼자 관중들 틈에 앉아 음악회를 볼 자신이 없었다. 발끝을 내려 보며 구둣발로 땅을 툭툭 찼다.

 

“선배.”

“응?”

“저 다리 아파서 연주회장 못 들어갈 것 같아요.”

“갑자기?”

 

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파? 병원에 갈까?”

 

말도 안 돼는 이유였지만 백기는 목소리의 톤까지 올리며 걱정했다. 여기서 백기를 잡아본들 그가 곤란해진다는 걸 모르는 유연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연주회를 함께 보지 못한다는 서운함에 그냥 툭 내던진 말인데, 백기가 너무 진심이라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음…….”

 

백기는 말끝을 늘이며 고민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닥을 내려 보던 유연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걸을 수 있지?”

 

가까운 곳에서 그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유연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부스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기손 단풍나무에서 붉게 물든 잎이 바람에 실려 떨어졌다. 신발이 스칠 때마다 낙엽이 밟혀 바스러지는 소리가 간드러졌다.

 

한적한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둘 뿐이었다. 백기가 유연의 허리를 감싼 순간, 몸이 붕하고 떠올랐다. 발끝에 닿던 마른 잎의 소리가 사라진 것도 그쯤이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던 이파리는 이제 발아래에 있었다. 학교 주변의 나무들이 색색의 옷을 입은 것도 한눈에 보였다.

 

“잘 보이지?”

 

백기가 물었다.

 

도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푸른 풍경에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도 잠시였다. 발끝을 감싸는 공기의 느낌이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백기의 손을 힘줘 잡아 보아도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선배, 저 균형 못 잡겠어요.”

“노력하지 않아도 돼. 너는 바람을 느끼는 방법을 이미 아니까.”

“그치만…….”

 

유연이 백기의 옷자락을 꼭 쥐며 그를 올려보았다. 공중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백기뿐이었다. 심장이 고동치는 이유가 무서워서인지 풍경에 감동해서인지 헷갈렸다.

 

“지난번에는 이것보다 훨씬 높았는데. 그땐 무섭다는 말 안 했잖아.”

“그때는 하늘만 봐서 높은 줄 몰랐단 말이에요.”

“내려줄까?”

 

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는 바람에 조금 더 골려줄까 싶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주변을 살피던 백기는 마음에 드는 착륙지점을 찾은 듯 그녀를 이끌었다.

 

백기는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의 굵은 가지에 유연을 앉혔다. 그녀는 위로 곧게 뻗은 나무 기둥을 두 팔로 꼭 안았다. 백기가 지평선보다 위에 있어 아래를 모지 않아도 됨은 정말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높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유연이 바보는 아니었다.

 

“내, 내려달라니까요.”

“진정하고 천천히 앞을 봐.”

 

눈앞을 가렸던 백기가 천천히 물러나자 노랗게 물든 은행잎사이로 교정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은행잎은 마치 액자처럼 보였다. 백기의 말대로 학교가 한눈에 보이는. 그야말로 명당이었다. 교정을 가득 담았던 두 눈은 별빛이 내려앉은 언덕 아래로 향했다. 강한 빛줄기를 하늘로 쏟아내는 무대. 멀리서도 보이는 보면대와 검은색 피아노. 하나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모습.

 

“와…….”

 

기둥에 숨었던 얼굴을 내민 유연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무섭다고 할 때는 언제고 별을 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라면 공연장만큼은 아니더라도 네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들을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백기는 제 외투를 벗어 어깨를 덮어주었다.

 

“금방 올게.”

“저 여기 두고 가시게요?”

“응.”

“선배!”

“오래 안 걸려.”

 

유연의 앞머리를 흩트린 백기는 잡을 새도 없이 휙 하고 멀어졌다 공중에 뻗어진 손만이 어정쩡하게 공중에 남았다.

 

팔을 슬며시 가져오며 기중을 잡은 유연이 발밑을 힐끔 보았다. 다행인지, 물든 은행잎에 가려져 땅은 보이질 않았다.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가지런히 드리운 다리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이 발목을 간질였다. 유연이 가방에서 제 옷과 비슷한 색의 행커치프를 꺼냈다.

 

“나 혼자 들떠서는. 하……. 멍청이.”

 

머리를 쿡 쥐어박은 그녀는 백기의 외투 앞섬에 행커치프를 조심스럽게 꽂았다.

 

“쌀쌀한데 입고 가지.”

 

제 외투까지 주고 간 백기를 걱정할 즈음, 왼쪽 어깨에 노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백기의 옷에 이마를 비비고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

 

유연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새는 놀랐는지 풀쩍 날아올랐다. 졸지에 쫓아낸 모양새가 되어버려 유연은 머쓱했다. 백기가 오기 전까지 같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날아간 새는 유연의 곁을 몇 번 맴돌고는 나뭇잎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가뜩이나 은행잎이 노랗게 물이 들고 있었는데 새마져도 노란색이니 보호색이 따로 없었다.

 

“선배가 보내줬던 사진에 새도 노란색이었던 것 같은데.”

 

유연이 휴대전화를 들어 백기가 보내주었던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날아갔던 새가 나뭇가지 끝에서 총총거리며 조심스레 접근했다. 가지에서 드레스의 끝으로. 드레스의 끝에서 무릎으로. 조심스레 다가오는 새를 날아가게 하지 말아야지. 유연은 다짐하며 사진을 찾는 데에만 열중했다.

 

“아, 찾았다.”

 

마침내 유연이 사진을 찾은 순간, 눈앞으로 엄청난 잔상을 남기며 새가 날아갔다. 새만이 아니었다. 부리에는 백기에게 주려던 행커치프가 꼭 물려 있었다.

 

“아! 그거 가져가면 안 돼!”

 

유연이 날아가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손끝에 부드러운 천이 스쳤다. 새는 눈앞을 날아 나무기둥 뒤로 모습을 숨겼다. 유연이 나무 기둥을 끌어안고 기둥 너머를 바라보았다. 노란 꼬리가 파닥파닥 거리며 나무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꼬리를 잡을까 손을 내밀었다가 새가 놀랄까봐 손을 거두었더니 행커치프를 입에 문 새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그거 선물인데 돌려주면 안 될까?”

 

기둥을 붙잡고 손을 내민 유연이 애처롭지도 않은지 새는 갸우뚱 머리를 기울이고는 약 올리듯 모습을 감췄다.

 

“한참 골랐는데…….”

 

백화점에서 제 드레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고른 것이었다. 몇 번이나 걸음을 돌리며 발길을 잡은 물건을 이렇게 도둑맞다니. 분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것도 무서운데 이 위에서 그걸 찾겠다고 움직이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백기가 얼마나 미안해하겠는가.

 

“뭐, 선배는 행커치프 못 봤으니까 나만 모른 척 하면 되겠지, 뭐.”

 

유연이 기둥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무대 주변이 한순가 착 가라앉았다. 공연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한 톤 낮아진 조명과 파도처럼 울리는 박수소리가 지나가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기의 말대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소리는 제법 잘 들렸다. 그 틈으로 날갯짓 소리가 또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돌려줄 것도 아니잖아.”

 

마치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볼멘소리를 하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잔가지에 앉은 새는 작은 종이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날갯짓을 하며 유연의 가지에 앉은 새는 통통 튀어와 행커치프가 있던 곳에 종이를 꽂고는 그녀의 어깨에 자리했다. 이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유연이었다.

 

“이거 내 거 아닌데.”

 

그녀가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종이는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접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순간 먼지가 일었다. 손바닥보타 조금 큰 종이에 무언가 쓰여 있었는데, 주변이 어두웠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휴대전화 불빛이 종이를 비추자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색이 바랜 편지에는 수많은 점들이 찍혀 있었다. 종이의 구김을 따라 숨어버린 것도 점이었고, 도드라진 것도 점이었다.

 

“점자는 아닐 테고.”

 

좌우로 움직이던 눈동자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full moon. Star dust. sky line. cloud 9…….]

 

구겨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 때마다 글자가 수줍게 모습을 보였다.

 

“Tempest…….”

 

유연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오는 연주곡 제목인데.”

 

폭풍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고요하고 잔잔한 연주곡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앞서 적혀있던 것의 단어들도 무척 익숙했다. 이번 연주회에 연주되는 곡이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생기는 기시감은 아니었다.

 

바람이 불며 가지가 흔들렸다. 막혀있던 은행잎사이로 땅거미가 드리워진 학교 음악실이 보였다.

 

“내가 자주 연주하던 곡…….”

 

차가울 정도로 시원했던 가을바람은 어느새 따뜻하게 변해 아래에서 위로 불었다.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음이 점점 단순해지고, 눈앞의 어두운 음악실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피아노에 앉은 것은 머리를 낮게 하나로 묶은 유연이었고, 그녀의 가늘고 긴 손이 건반을 가볍게 눌렀다.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유연이 앉은 자리, 그 옆에는 교복을 갖춰 입은 백기가 있었다. 그의 어깨엔 자그맣고 노란새가 앉아 있었다. 그는 투박한 메모지에 열심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문 잇새로 흥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피아노의 선율에 얹어졌다.

 

‘분명 꿈이야.’

 

조금전까지 명백하게 저녁이었던 날이 갑자기 과거로 돌아갈리 없었다. 꿈임을 확신한 순간, 백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곧게 그녀에게 향했다. 그를 알아보는 현재의 유연과 그가 보는 것조차 모른 채 연주에 빠진 과거의 유연을 동시에 말이다.

 

“지금 당장 네게 이 편지를 전할 용기도 없구나.”

 

백기는 편지봉투를 손에 꼭 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내용을 알 수 없게 된 그 편지였다. 숨이 턱 막히면서 두 눈이 시큰해졌다. 한참을 들고 다녔는지 편지봉투의 모서리는 닳고 구겨져있었다. 백기는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에 앉은 새의 앞에 편지와 접힌 종이를 흔들었다.

 

“네가 전해줄래?”

 

작은 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편지가 아닌 애먼 종이를 부리로 콕 물어갔다. 백기의 손에 남은 건 구겨진 편지봉투 뿐이었다.

 

“치사하긴.”

 

원곡의 느낌이 거의 없는 제멋대로의 연주에도 백기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편지를 손에 꼭 쥔 채 보일 듯 말 듯한 음악실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을 몇 번이나 들으며.

 

또다시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조각난 꿈 조각들이 노랗게 부서져 바람에 씻겨 나갔다.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세게 감았던 유연이 슬며시 눈을 떴다. 어디까지 진행되었을지 모를 음악이 흘렀고, 그 위로 부드러운 목소리의 허밍이 얹어졌다. 어깨를 감싼 손은 따뜻했고, 몸을 기댄 가슴은 단단했다.

 

한기가 든 목을 잔뜩 웅크리자 흥얼거리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깼어?”

 

백기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이 많았어? 위험하게 잠들고 말이야.”

“얼마나 지났어요?”

“거의 다 끝났어.”

“정말요?”

 

유연이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무척 짧은 꿈인 것 같았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니.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듣고 싶은 연주곡들 많았는데 깨우지.”

“네 연주가 더 좋았어.”

“선배 귀는 못 미더워요.”

“나는 빈말 안 해.”

 

그럼 두 시간동안 백기는 뭘 했을까. 깨우지도 않고 그저 옆에 앉아있기만 했던 걸까.

 

“선배는 언제 왔어요?”

“뭐, 두 시간쯤 됐나.”

“일 있다고 했잖아요.”

“널 혼자 두고 어떻게 일을 해. 다리도 아프다며.”

 

두 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말없이 그저 가만히 있어주었단 건가. 유연이 백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꿈을 꾼 직후라 그런지 훌쩍 커버린 백기가 조금은 어색했다. 그치만 그녀는 꿈속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려 손을 들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낸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백기가 그녀를 내려 보았다.

 

“여기요. 선배한테 어떤 곳이에요?”

 

백기가 머리를 쓰다듬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내 삶이 다시 시작된 곳.”

 

마침 음악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언덕의 나무에도 닿았던 조명이 탁 꺼졌다.

 

“내 유일한 휴식처.”

 

백기는 그녀의 손 끝에 입을 맞췄다.

 

“인 널 만날 수 있던 곳.”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백기는 꿈속의 그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는 강해졌고, 어디서든 그녀를 지켜주겠다며 다짐도 해주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그의 따스한 눈동자. 그 눈길이 여전히 그녀에게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선배 기억 속의 나는 너무 미화됐어요.”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거든.”

“선배는 툭하면 그 얘기 하더라.”

“사실이 그래.”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끝으로 전해지지 않겠지.

 

유연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걸터앉은 나뭇가지가 휘청하고 위아래로 요동치며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볐다.

 

“고마워요. 날 특별하게 생각해줘서.”

 

고요했다. 심장 뛰는 소리만 크게 들릴 정도였다. 손이 잡힌 백기는 어떤 행동도 보이질 않았고, 오직 바람만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유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어깨를 잡아주던 백기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백기의 입술이 순식간에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놀랄 틈도 없이 백기가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피날레를 알리는 불꽃이 크게 터졌다. 유연은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목소리에 감춰진 그의 입모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에게 속삭여줬다. 열어보지 못한 그의 편지처럼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되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붉어진 그의 목덜미가 보여서 손깍지를 꼈다. 백기와 시선이 공중에서 닿은 순간, 그녀는 씨익 웃었고 백기는 흘러내린 제 겉옷을 다시 올려 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노오란 은행잎 프레임에 반짝이는 별로 가득한 하늘, 하늘을 수놓은 색색의 불꽃이 모두 두 사람의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잘 온 것 같았다.

 

 

*

*

 

 

유연을 나무에 올려놓고 홀로 떠났던 백기는 자신을 대신할 인물을 물색했다. 다행히 근처에 사는 동기가 있어서 그에게 부탁을 했더니 밥 한 끼에 대신 해 주겠다고 했다. 운이 좋았다.

 

5분도 되지 않아 나무로 돌아 왔을 때, 유연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졸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긴장 없이 잠들다니.

 

“위기감 좀 키우자. 응?”

 

백기는 중얼거리며 그녀의 구두를 조심스럽게 벗겼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몰라서 답답하긴 했지만, 신고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 분명했다.

 

따뜻한 바람으로 그녀의 몸을 덥히고 백기는 그녀의 앞에 바짝 다가갔다.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그녀를 데려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제 삶을 바꿨던 바로 그 장소. 백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그녀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과거의 제가 남아있는 곳.

 

등 뒤에서 유연이 연주했던 곡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통통 튀는 유연의 피아노에 미치지 않는 정교한 연주가 아쉬웠지만, 마치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 백기는 한참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끔 그녀가 움찔거릴 때마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당황했던 것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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