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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그 계절의 화원으로 너를 초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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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 온데간데없고, 이젠 쌀쌀한 바람만이 거리에 남아있었다. 요새는 가을도 참 빠르게 사라져. 남자는 아쉬운 듯 중얼거리며 한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층을 누르고, 그의 손에 있는 꽃다발을 조금 부스럭거린다.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너는 이 꽃다발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많이 놀랄까? 당황할까? 어떤 얼굴로 어떠한 마음을 품을까. 남자의 두근대는 가슴에 발을 맞춰 호기심이 튀어나왔다. 그의 생각을 깨듯, 엘리베이터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 문 앞에 섰다. 그 앞에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내려놓는다. 혹여 지나가는 사람이 훔쳐 가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이것 말고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을 주워 담고 여전히 이 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에 그대로 올랐다. 문이 닫히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유유히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비밀의 화원



러브앤프로듀서

이택언x유연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그 계절의 화원으로 너를 초대할게.



Written by.셰니







1. 능소화

유연이 문을 열자마자, 낯선 부스럭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웬 꽃다발? 당황스러운 존재의 등장. 유연은 조심스레 꽃다발을 집어 들어 요리조리 살펴봤다. 갑자기 이게 뭐람. 누가 두고 간 거지? 생각나는 사람은 몇 명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편지도 없고, 보낸 사람도 없고. 이거 혹시 미친놈이 두고 간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겉보기에 그렇게 수상쩍어 보이지도 않고. 정말로 단순한 꽃다발 같았다. 이 꽃은 아마 능소화 같은데? 꽃도 참 독특하네. 꽃다발의 향기를 가볍게 맡아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유연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꽃다발을 놓고 나왔다. 누가 보냈는지는 회사에 다녀와서 좀 더 알아봐야지.


집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냉기가 온몸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이 차가운 공기보다 훨씬 더 차갑고 무서운 사람. 하루 이틀 오는 곳도 아니거늘, 화예 앞에만 오면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할 수 있어, 연아! 오늘도 잘 할 거야! 유연은 마음속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물론 그 의지는 이택언의 사무실 앞에서 새하얗게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똑, 똑, 똑,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세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덜컥, 무거운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집무를 보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사무실은 따듯하고 훈훈했다. 그 속에서 이택언만 이질적으로 차가웠다.


“대표님,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보고서 제출하려고 왔습니다.”


유연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이택언의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큼지막한 그의 손이 서류를 가져갔고, 그는 빠르게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 유연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오늘은 웬일로 안경을 썼네. 무뚝뚝한 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읽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그의 얼굴만을 구경했다. 잘생기긴 참 잘생겼어. 저 얼굴로 말만 좀 다정하게 하면 얼마나 좋아.


“내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이번에는 이택언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만, 그의 얼굴을 훔쳐본 것을 들킨 건 왠지 부끄러웠다.


“아뇨, 그게... 오늘은 안경을 쓰셨네요.”


“일할 때는 가끔 씁니다. 날 보면서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까?”


‘그런 생각’?! 왜 말을 그렇게 해! 마치 굉장히 부적절한 짓을 저지른 것만 같아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그 덕에 얼굴은 두 배로 발갛게 달아올랐고. 유연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이택언은 여유롭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만하고 본 목적에 집중하죠. 보고서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수정할 부분이 있는데…”




약 삼십분 후에 유연은 겨우 그의 사무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휴,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겠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칼 같을 수가 있는지. 삼십분 내내, 그는 지치지도 않고 보고서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잡아냈다. 나는 그 얘기를 받아 적기만 해도 벅찼는데. 역시 화예의 대표는 뭐가 달라도 달라. 왠지 이택언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인 것만 같다는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과연 그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얼마나 있을지 생각하며 유유히 화예를 빠져나가는 도중, 문득 눈에 한 게시판이 들어왔다. 사내 게시판? 이런 게 있었네. 흥미가 생긴 유연은 메모에 적힌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잘생겼어요 이 대표님! 우윳빛깔 대표님!’

‘차가운 얼굴에 어울리는 태도 가려진 몸매 속…’

‘지난번에 말씀하시다가 실수하신 거 너무 귀여우셨어요!’

‘무뚝뚝해 보이지만 너그러운 우리 대표님! 항상 감사해요!’


그 사람에 대한 글이 게시판에 꽤나 많이 붙어있었다. 대부분 칭찬의 글, 그녀가 모르는 이택언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도 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네. 그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건 내 섣부른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어. 깊이 생각에 잠겨갈 때쯤,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가고 여기서 뭐합니까?”


“깜짝이야...! 오셨으면 말을 해주시지, 놀랐잖아요.”


“뭐 하나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보다 뭐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놀랍니까?”


“게시판에 대표님 이야기가 많이 있어서 한번 읽어보고 있었어요. 대표님은 여기에 본인 얘기가 많은 거 아셨어요?”


“당연한 걸 묻고 있네요. 내가 내 회사에 그 정도 신경도 안 쓰는 사람 같습니까? 회사의 대표는 항상 본인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죠. 특히 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유연은 짐짓 놀랐다. 자기 일에 관련된 거 아니면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오늘따라 생각지도 못한 그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고 있었다. 역시 사람을 대충 보고 판단하는 건 정말 나쁜 일이야. 앞으로 고쳐나가야지. 속으로 작게 다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살며시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무뚝뚝해도 참,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 같다고.









2. 코스모스

능소화를 받은 지 이주가 지난 아침, 유연은 집 앞에서 또다시 꽃다발을 발견하였다. 여전히 누가 선물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는데. 형형색색의 코스모스에는 촉촉한 물기가 남아있었다. 싱그러운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든다. 생기 넘치는 꽃의 모습에, 가슴속에도 설레는 꽃바람이 불어왔다. 누굴까, 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그녀는 잠시 꽃에 코를 묻고, 선물 주인의 체취를 찾아 헤매었다.


화예로 가는 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만은 다르지! 바로 어젯밤, 유연의 제작사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덕분에 인터넷 실검에는 프로그램이 계속 오르내렸고,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가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그’ 이택언도 뭐라고 못하겠지. 이번만큼은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어. 유연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뜻하게 화예로 들어왔다. 그녀의 즐거운 마음은 노크소리에까지 전해졌다. 들어오라는 그의 말이 들리고, 유연은 밝은 미소를 띠며 문을 열었다.


“묻지 않아도 왜 기분이 좋은지 알겠군. 당신은 감정이 얼굴에 너무 쉽게 나타납니다.”


“기쁜 일에 기뻐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설마 대표님은 저희 프로그램이 잘 된 게 얄미우세요?”


“내가 그 정도로 유치한 사람 같습니까? 단지 당신이 너무 들떠서 정신 놓을 것 같아 일부러 눈치 주는 겁니다.”


“대표님 유치한 사람 맞으시잖아요. 지난번에 모멘트에 계약 이행 디카운트라고 올리신 것도 그렇고.”


“…”


헉, 너무 지나쳤나? 갑작스런 그의 침묵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떡해, 화난 거 아냐? 그의 말대로 너무 들떠서 실수한 것만 같았다. 힐끗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처음 보는 표정의 그가 있었다. 뭐지? 이런 얼굴은 처음인데?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생각이 단계를 밟아갈수록 난해해졌다.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감정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유연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만 가는데, 이택언이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요. 이상한 상상 그만하고 이만 나가죠.”


“이상한 상상이라뇨,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보다 어디를...”


“채찍과 당근.”


“네?”


“잘못하면 채찍을 주고, 잘하면 당근을 줘야죠. 잘했다는 의미로 내가 식사 한번 대접하도록 하죠. 그 프로그램에 대해 지적할게 많지만 오늘만은 이 기분을 즐기도록 해요.”


“네에?”


당황스러워하는 유연의 목소리를 남겨두고 이택언은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뭐야, 진짜 제멋대로라니까. 어이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유연은 순순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정말 잘 먹네요. 그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계속 그러실 거예요? 대표님이 사주시겠다고 하셨으면서.”


“눈치주는 거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신기해서 그래요. 잘 먹으니 보기는 좋네요.”


뭐라고? 내가 뭘 들은 거지? 밥을 다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대화를 나누던 도중, 보기 좋다는,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유연은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거 이택언 맞아? 그렇지만 유연이 그의 얼굴을 보고 의심할 틈도 없이, 이택언은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겨버렸다. 그가 한 발자국 앞에서 걸어갔고,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문득 주변이 참 고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을밤만의 특권, 주변에서 잔잔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쌀쌀한 바람이 풀을 흔들고, 나무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낙엽을 흩뿌렸다. 가을밤이 들려주는 세레나데 안에서 푸르고 고운 달빛이 그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까만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휘날렸고, 너른 어깨에 까만 정장도 멋지게 잘 어울렸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휩싸 안는다.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돌연 Souvenir에 찾아가, 우연히 이택언을 만나 함께 돌아오던 그날 밤. 여름의 무더위와 청량한 매미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의 이택언과 오늘의 이택언과 겹쳐 보인다. 생각에 붙잡혀 발걸음이 느려졌다. 앞서 걷던 그가 가만히 멈춰 서고는, 몸을 돌려 유연을 바라본다. 갑작스레 마주친 눈동자. 유연은 한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만 멈춰서버린다. 그는 묻지 않고 천천히 다가온다. 곱고 부드러운 보랏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유연의 눈동자보다 더 깊은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얼른 따라와요.”


수면에서 일어나듯 감상에서 깬다. 어깨에 걸쳐진 코트에서는 그의 온기가, 그의 체취가 그대로 전해졌다. 어쩐지 낭만적인 분위기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녹녹한 가을의 감정에 젖어 버린 걸까. 유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를 따라갔다.


문득, 그의 옷에 자그마한 꽃잎이 붙어있는걸 깨닫는다. 코스모스?


“대표님 옷에 코스모스 꽃잎이 붙어있네요. 어디서 이런 게 붙었을까요? 우리가 같이 걸은 곳에 코스모스 꽃밭은 없었는데.”


유연의 말에 이택언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유연은 꽃에 집중한 탓에 그의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낮게 읊조렸다.




“그렇습니까.”


가을밤은 깊어갔고, 유연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에 무언가 스며들어왔다고, 마치 꽃이 피듯 무언가 생겨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3. 메밀꽃

세 번째가 되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네. 유연은 익숙하게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번 꽃은 조금 독특했다. 안개꽃처럼 작고 하얀색에, 약간 짭짜름한 냄새가 나는 꽃. 이런 꽃이 있었나? 한참이나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결국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꽃 선물에 익숙해진 그녀는 꽃병까지 구비해두었다. 유연은 준비해둔 꽃병에 꽃다발을 꽂고, 불을 끄고 현관문을 닫는다. 다녀온 다음에 생각하자, 다음에.


오늘 유연의 옷은 평소와는 달랐다. 하얀색과 파란색의 스프라이트 셔츠와 하늘하늘한 스커트 대신, 하얀 티셔츠에 초록색과 검은색의 체크무늬 셔츠, 그리고 연한 청바지를 입었다. 거기에 불편한 구두 대신 운동화! 영락없이 운동복 차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른 토요일 아침. 출근하는 날도 아니건만, 그녀는 이택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화예로 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오피스텔 앞 큰 대로변에서 이택언의 검은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닙니다. 내가 좀 일찍 나왔어요. 얼른 타요. 안전벨트 매고.”


유연은 빙긋 웃으며 문을 열고 폴짝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택언은 오늘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자유롭게 말을 탈 수 있는 곳이라고만 했다. 그녀는 말을 타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설레라, 그녀의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차는 부드럽게 도시를 빠져나갔다.




‘승마 프로그램이요? 신선하군요. 나쁘지 않겠어요.’


‘네, 이전에 시도해보지 않았던 컨셉이라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한데?’


‘제가 승마에 대해 전혀 몰라서 걱정이에요. 급한 대로 자료를 찾아보고 있지만, 가능하면 제가 직접 승마를 체험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


‘한탄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금방 방법을 찾을 겁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나요?’


‘시간은 있는데... 왜요?’


‘내가 가르쳐 줄게요, 승마.’


‘네에? 대표님 승마도 할 줄 아세요?’


‘왜요, 못 믿겠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놀랐어요. 승마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당신 가르쳐줄 실력은 되니까 걱정하지 마요. 옷 편하게 입고, 토요일 오전 9시까지 집 앞 대로변으로 나와요. 내가 차 가지고 갈 테니.’






“…연 씨!”


“아, 네?!”


“일어나요. 도착했으니까.”


세상에, 그새 졸았나 봐. 이택언 대표의 차에서 졸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제 너무 늦게까지 일해서 그런가. 일찍 잔다고 일찍 잤는데... 해명이라도 하려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한가득 그녀에게 날아왔다. 갑작스런 돌풍과 강렬한 햇살에 유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살며시 감은 눈을 뜨니,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이택언이 있었다. 그의 뒤로 찬란한 햇살이 빛났다. 새하얀 꽃밭, 여기는 대체 어디지? 거친 바람에 꽃과 풀이 나부끼고, 넓은 평야를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사람이라곤 오롯이 이택언과 그녀 밖에 없고, 들리는 건 새소리뿐인 공간.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초원이었다. 유연은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택언은 그런 그녀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가죠.”


그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유연의 눈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커다란 손을 꼬옥 붙잡았다.




“말을 타본 적 없나요?”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에요.”


“그러면 내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라요. 내가 말하는 것만 잘 지키면 다치는 일 없을 겁니다.”


“그럴게요.”


“일단 여기 있는 발판 딛고 말에 타요. 생각보다 높을 테니까 힘껏 뛰어서 올라타요. 혹시 떨어지더라도 내가 받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무서운 마음이 설렘보다 먼저 일었다. 그러나 이택언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나를 지켜줄 거야. 이유는 없지만 그런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유연은 택언의 말대로 말 옆에 있는 발판을 딛고 올라서서, 온 힘을 다해 말에 뛰어올랐다.


“!!!”


“잘 앉았어요. 처음인데 제법이네요.”


눈을 뜨니 제 몸이 땅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유연은 땀에 젖은 손으로 손잡이를 세게 붙잡고, 심호흡을 했다. 이택언은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앉을 때는 머리, 허리, 그리고 발이 일직선이 되게 앉아야합니다. 또 발을 안쪽으로 세게 치면 박차가 움직여서 말이 달리니까 조심하도록 해요. 고삐 역시 세게 잡아당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럼 발을 살짝 굴러 봐요.”


유연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어. 그의 지시에 따라 유연은 살살 발을 찼다. 말은 크게 히히힝,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느린 속도였지만 말이 움직이니 굉장히 겁이 났다. 그렇지만 이택언이 옆에 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려놓고. 그 손의 온기에 점점 긴장이 풀리고, 말을 타는 즐거움을 배워갔다. 유연의 밝게 웃는 얼굴을 보며 택언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익숙해진 것 같아요?”


“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 속도 내는 건 무섭네요.”


“그래요. 처음이니까 그건 조금 일러요. 이 정도만 해도 승마 프로그램을 찍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나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아쉽죠.”


유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 어디 더 갈 곳이 있나? 이택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에게 씩 웃어보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그는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에 유연은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이택언이랑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건 처음인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고삐를 빼앗고, 그녀를 품에 껴안듯이 가까이 앉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치고,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손잡이 꽉 잡아요. 이제부터 빠르게 달려볼 테니까.”


유연이 차마 대답할 틈도 없이, 이택언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과 속도감에 유연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까 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서웠다.


“유연 씨, 눈 좀 떠봐요.”


“못해요, 속도 줄이기 전에는 못 떠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절대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아요. 어서.”



택언은 유연을 재촉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유연은 감은 눈을 느리게 떴다. 자그마한 눈 틈 사이로 새하얀 세상이 저를 향해 달려 들어왔다. 조금 더 눈을 크게 뜨자, 새하얀 꽃밭에 푸르른 잎이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눈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두 눈에 가득 들어온 세상은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세상은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경쾌한 말발굽의 리듬이 온몸에 느껴졌다. 그리고 그 뒤에, 이택언이 느껴졌다. 단단하고 강인한, 그렇지만 따듯한 그 사람. 나를 지켜주는 그 사람. 이 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얼굴에 한가득 웃음이 번져갔다. 그녀의 웃음 느끼고, 택언도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고 밝게 웃었다.


문득, 그녀는 달리고 있는 이 꽃밭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 꽃이 무엇인지.


“… 메밀꽃.”


“네?”


“메밀꽃이네요.”


“… 그렇네요.”


그녀의 알 수 없는 말에, 그도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그저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4. 국화

오늘은 국화꽃이네. 유연은 잠시 국화를 쓰다듬어 보았다. 샛노란 국화꽃은 밝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픈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그런가? 꽃은 어딘가 시들어 보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는 꽃병에 국화를 꽂았다. 엊그제보다 날씨가 훨씬 차가워졌다. 조금 더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고, 유연은 얼음장 같은 거리를 향해 나섰다.


오늘은 아침이 아니라 퇴근한 뒤, 저녁에 화예에 보고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어감에 따라, 점점 기분 좋은 떨림이 온몸에 퍼져갔다. 지난번 함께 승마를 하고 온 뒤로, 유연은 택언에게 색다른 감정을 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수많은 색채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감정은 깊어져만 갔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함께 걷는 시간, 종종 그가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는 순간, 쌓여가는 나날들이 점점 일상을 설레게 했다. 오늘 그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얼굴로,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을까. 화예로 향할 때 피어나던 두려움은 이제 자취를 감추고, 설레는 가슴과 수줍은 웃음만이 그녀에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핏 알 것도 같은 그의 마음을 유연은 차마 아는 체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서로가 엇갈렸을 때, 유리창처럼 쉽게 부서질 이 관계가 두려웠다. 어쨌든 그 사람은 제 회사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외줄타기를 하는 듯 아슬아슬한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까.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감이 가슴에 깃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불안감이 유난히 강했다. 왜 이래, 유연. 오늘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사람의 감이란 종종 잘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그날따라 들어오라는 이택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의 표정 역시 그랬다. 이유 모를 긴장감에 유연은 평소보다 조용히 보고서를 제출했다. 얼핏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번져있었다. 잠을 설친 걸까? 무엇 때문에? 그의 앞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면서, 유연은 오랜만의 긴장감에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때, 이택언의 신경질적인 한숨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왜 왔습니까?”


“네?”


“이런 수준의 기획안을 들고 왜 화예에 왔냐는 겁니까.”


“이런 수준이라니, 말씀이 심하시네요, 뭔가…”


“이번 보고서만 가지고 이런 얘기 하는 거 아닙니다.”


“…”


“지난번 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도 그렇고. 하나같이 내 기대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터놓고 말하죠. 이제 당신에게 발전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일을 대충하는 건지, 아니면 당신이라는 사람이 여기까지 인건지.”


“대표님.”


“나는 내 시간과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딴 식으로 되갚으라고 당신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도 아니고, 승마를 가르친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투자한 것에 대해 …”


“대표님!”


“…”



참다못해 소리친 유연의 커다란 눈에는, 자그마한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마치 누군가가 조르는 것처럼 목이 메고 가슴이 조여 왔다. 왜 이렇게 갑자기 그의 태도가 변한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았잖아. 나의 일처리에 문제가 있는 건가? 정말 내 스스로가 잘못한 건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회상을 해볼 틈도 없이, 그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당신에게 투자한 것에 대해…’



단지 그런 거였나. 그에게는 내가 하나의 자본일 뿐이고, 그 시간들은 그저 투자였던 걸까.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시간들이 그에게는 그저 집무에 불과했다. 달콤하다고 생각한 순간은 모두 착각이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들었다. 방울방울 맺혀 있던 눈물이 왈칵, 하고 떨어졌다. 짜디짠 눈물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녀의 새하얀 손등 위로 얼룩을 그렸다. 그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역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시정하겠습니다.”


“…”


“사흘... 아니, 이틀만 더 주세요. 이것보다 더 나은 기획안을 들고 오겠습니다. 더 이상 발전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유연은 두 손으로 잽싸게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 간절한 모습이 이택언에게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딱 이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택언의 대답을 듣자마자 유연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뜻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람이 적은 비상계단에 이르고, 그제야 유연은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어.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나도 두려워 흐느낌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유연은 말 그대로 비참했다. 너무나 비참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또 비참해서,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어, 나 혼자만,






…그를 사랑한 거였어.











5. 핑크뮬리

그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유연은 기획안에만 매달렸다. 어떻게든 이 일을 무마해야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일에 미치지 않고는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택언과 자신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그저 뻔하디 뻔한 비즈니스 관계였다는 사실. 그에게 두근거렸던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마치 그에게 농락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 하지만 사실 이택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저 혼자서만 꿈을 꾸었다는 게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또다시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유연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쳐올리며, 내리치듯 노트북을 덮었다. 어쨌든 이제 다시 그를 마주봐야할 시간이다. 피할 수 없는,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순간. 부디 그를 보고, 아주 조금의, 그 어떤 사소한 감정이라도 흘리지 않기를. 그를 보고 침착할 수 있기를, 유연은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했다.








그렇지만 세상은 잔인했고, 그녀를 다시 한 번 농락했다. 늦은 밤, 화예의 사무실을 두드리기도 전에 그가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무감각하던 그의 표정이 옅게 일그러진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 언젠가 부드럽다고 생각했던 그 눈동자. 이제는 두 번 다시 그 눈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미칠 듯이 고요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택언이었다.


“…안 들어오고 뭐합니까? 보고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차갑고 사무적인 말투.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연은 철근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 발이 움직일 때마다, 터질 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이질적인 적막함에 이택언이 유연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그녀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버린 후였다.



“좋아요?”


“…뭐가 말입니까?”


“사람을 가지고 노니까 좋으시냐고 물었어요.”


“이봐요, 유연 씨.”


“아무렴, 세상이 쉽고 만만하시겠죠. ‘그’ 이택언에게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랬던 거겠죠. 대표님에게는 별 거 아니었던 일이었겠죠.”


“유연 씨, 거기까지 하세요.”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이 무서울 만큼 굳어졌다. 그러나 유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명령하는 그의 말투. 이 순간마저도 자신은 이택언에게 아무런 위협을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식었다. 이렇게나 화가 나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시원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야.



“그때, 당신이 잘했다고 저녁을 대접해주면서, 함께 말을 타면서, 그리고 그 외의 당신과 내가 함께 했던 순간에서! 당신이 그렇게 굴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다정하게 굴지만 않았으면! 지금 우리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겠죠.”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울분을 내지르던 유연은 아주 작고 가늘게 속삭였다. 눈물에 파묻힌 진심. 그 작은 외침은 그에게 닿았을까. 아냐, 이렇게나 차가운 남자에게 이런 말이 닿을 리가. 그냥, 그냥 다 끝난 일이었다. 이 뒤는 없었다. 여기까지였다. 그와 자신과의 관계도, 화예와 우리 제작사도. 괜한 자존심을 세우는 일은 쓸모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얼마 없는 자존심이라도 박박 긁어모아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있고 싶었다.


유연은 이틀 전 그날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뒤를 쫓아 나왔다. 이택언은 다급하게 유연을 붙잡았다. 슬픔에 힘을 잃은 몸은 그의 손길 한 번에 그대로 흔들렸다.


“놓아주세요.”


“할 말 있습니다.”


“놓아주시라고요!”


“나도, 나도...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이택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연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가쁘게 숨을 몰아내셨다. 말? 무슨 말. 그래,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유연은 딱 한번만 더 그의 거짓말에 넘어가주기로 했다. 소맷부리로 거칠게 눈물을 닦고 그녀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래서 그녀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난생 처음 짓는 이택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꽤 멀리 교외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연의 마음은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자 엄청난 후회와 전에 없던 공포가 밀려왔다. 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많이 울은 탓에 머리가 잔뜩 지끈거렸다. 유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차가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거야. 이거, 혹시 어디에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려는 거 아냐? 그러나 곧이어 유연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가 완전히 어떻게 되어버렸나 봐. 말도 안 되는 생각하지 말자. 어떻게 해야 이 일을 수습할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을 때, 마침내 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어요. 내려요.”


이택언이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유연은 새까매서 잘 보이지도 않는 바깥을 걱정스레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어.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온 들판을 휘젓고 있다. 바람결에 따라 부드럽게 춤추는 분홍빛의 풀들. 사방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고, 달빛은 풀밭을 고요하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낭만적인 풍경 속에, 이택언이 서있었다. 그는 뒤돌아있었다. 유연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조용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저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와 한 뼘 남짓한 거리에 다다랐을 때 즈음, 갑자기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유연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세상에 오롯이 둘만 존재하는 이 시간. 이택언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처음 준 꽃은, 능소화였습니다.”


“…”


“자랑과 기다림이라는 의미가 있죠.”


“그 다음은 코스모스였습니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순정이고. 그 다음 꽃은…”


“메밀꽃.”


“그래요, 메밀꽃이었죠. 메밀꽃의 꽃말은 연인, 그리고 사랑의 약속.”


“국화는요?”


“노란색 국화는 짝사랑.”


“…”


“지금 이 꽃들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모르겠어요.”


“핑크뮬리.”


“그리고 이 꽃의 꽃말은…”





고백.



이택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연은 그의 얼굴에서 유래 없는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선물의 주인이 나일 거라고 생각 못했습니까?”


“대표님이 그렇게 세심하고 낭만적일 분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는 당신한테 내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그랬죠. 그렇지만 부족했어요.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요,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해요,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꽃밭은 어디서 발견하셨어요?”


“당신 보여주려고 준비한 곳입니다. 오롯이 당신을 위해.”


“… 대표님.”


“네, 유연 씨,”


“아까 저한테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잖아요. 마저 하세요.”



유연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갈색의 눈동자와, 짙은 보라색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힌다. 그는 몇 번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당신의 위해 준비한 가을이에요.”
















러브앤프로듀서

이택언x유연

‘비밀의 화원’

written by. 셰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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