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기락유연] 내가 귀여워요?

그의 일교차에 대하여


* 8챕터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기락 씨. 어디예요? 스튜디오 벌써 정리 중인 거 같은데.]

 

기락에게 메시지를 보낸 유연이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방금까지 기락의 화보 촬영이 진행 중이었을 스튜디오는 벌써 정리 분위기였다. 내심 그의 촬영 현장을 보고 싶었던 마음에 유연의 표정 위로 아쉬움이 스쳤다.

유연이 기락의 촬영장에 들리는 일은 꽤 자주 있는 편이었다. 같이 놀러 가자고 약속을 잡을라치면 언제나 기락의 스케줄이 잡혀있어서, 그가 일이 끝나는 대로 만나기 위해 유연이 미리 와서 기다리곤 했다. 그저 친구가 하는 배려치고는 여간한 정성이 아니긴 했지만, 유연은 그동안 기락에게 이것저것 신세 진 게 많아 이쯤은 대수롭지 않다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음?”

 

손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락의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 허니칩 씨! 벌써 도착한 거예요?

“네. 방금이요. 근데 촬영 끝났나 봐요?

- 미안해요. 나 지금 대기실인데…생각보다 좀 빨리 끝나서요.

“아, 그래요?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 내가 나갈까요? 길 어렵진 않은데, 그래도 혹시 헤맬까봐.

“아녜요. 여기 전에 와본 적 있어서 알아요. 금방 갈게요.”

- 알았어요. 빨리 와요!

 

잔잔히 미소를 걸친 채 유연이 전화를 끊었다. 빨리 오라는 말이 꼭 누나 기다리는 막내 동생 같아 귀여웠다. 형제가 없는 유연에게 기락은 그래서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괜히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남들보다 좀 더 마음이 쓰였다. 유연은 그것이 우정과 형제애의 묘한 조화라고 생각했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까. 그러나 감정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이상하게도 덜컥 겁이 나버려 황급히 생각을 지우게 되는 것이었다.

 

“허니칩 씨!”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기락이 환한 미소로 유연을 맞이했다. 대기실 안에 함께 있던 매니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유연이 기락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기락이 옆에 있던 의자를 당겨오더니,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으로 두드렸다. 자신의 옆으로 쪼르르 걸어와 앉는 유연을 보며 기락은 기분 좋게 웃었다.

 

“미안해요. 촬영 끝나고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괜히 번거롭게 했네.”

“아니에요. 내가 좀 일찍 온 것도 있는데요 뭐. 아, 그런데….”

“응? 왜요?”

 

유연의 시선이 기락이 입고 있는 옷으로 향했다. 살짝 소매를 걷은 흰 셔츠에 깔끔한 검은 슬랙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옷 같았다. 평소의 그는 좀 더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었는데.

 

 

“우와. 뭐예요. 오늘 의상?”

“응? 이거요?”

 

기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유연이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옷이라서요. 오늘 되게 멋있는 컨셉이었나보다.”

“뭐예요. 그 얘긴, 평소엔 안 멋있었다는 뜻?”

“네?”

 

기락이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유연은 곧이곧대로 그의 장난에 넘어가 버린다. 유연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기락의 옆에서 이것저것 짐을 챙기던 매니저까지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차를 대기시켜 놓겠다며 매니저가 자리를 비켜주자 기락은 작정한 듯 유연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좀 섭섭하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은 항상 날 멋있다고 생각해 주는 줄 알았는데.”

“에이. 왜 그래요. 물론 평소에도 멋있죠! 내 말은, 음….”

“됐어요. 이거 촬영용 의상 아니에요. 오늘 내가 입고 온 옷이라구요. 당신한테 멋있어 보이려고 직접 고른 건데. 나는 뭐 촬영 때만 멋있게 입는 줄 아나?”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래서. 나 지금 멋있어요, 안 멋있어요?”

“당연히 멋있죠!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그러자 조금 뜸을 들이던 기락이 표정을 싹 바꾸더니 눈꼬리까지 휘어 보이며 흐하하, 하고 짓궂게 웃었다. 유연은 그를 보고 잠시 멍하게 있더니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눈치챘다.

 

“와…뭐야. 지금 한 거 전부 연기?”

“크흐흐…난 당신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요.”

“정말!”

 

뭐라 화라도 내보려던 유연은 계속 헤실거리며 웃는 기락을 보곤 별수 없이 그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진짜 막내 동생 같다니깐. 귀여우니까 봐주는 거예요!”

“막내 동생?”

“응. 기락 씨처럼 귀여운 동생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

“왜요?”

“당신은…내가 귀여워요?”

“그럼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슈퍼 히어로지!”

“푸흐. 뭐야, 그게. 자…이제 일어날까요? 놀러 가야죠.”

 

어쩐지 기락의 반응이 떨떠름하게 느껴졌지만, 유연은 기분 탓이려니 하고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일어서 있는 기락을 보니 그는 오늘 확실히 신경을 쓰고 온 티가 났다. 셔츠에 딱 붙어 두드러진 어깨선이 평소보다 넓어 보인다든지, 은근한 향수 향기라든지. 그러나 혼자 멋을 내보려 애를 썼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역시 귀여웠다. 유연은 다시 한번 그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누가 봐도 동생을 귀여워하는 누나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기락의 눈빛은, 당연히 어른의 것이었다.

 


.

 

.

 

.

 


 

 

“단풍놀이요?”

- 응. 조금 있으면 단풍이 절정이래요. 당신이랑 꼭 같이 보러 가고 싶어서!

 

회사 건물 옥상에서 기락과 통화 중이던 유연이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높은 건물들로 빼곡한 금융가 곳곳에도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건물 위로 보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눈부셨다. 시선을 돌리니 자연스레 B.S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기락은 드라마 촬영 중 쉬는 시간에 전화했다고 했으니 아마 회사에는 없을 것이었다.

 

“근데 기락 씨. 낮에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돼요? 단풍놀이는 낮에 가야 하잖아요.”

 

대형 광고판에 내걸린 기락의 콘서트 사진을 바라보며 유연이 말했다. 그와 놀러 다닐 때는 언제나 낮보다는 저녁에 약속을 잡았다. 방송업계에서 기락과 유연이 친한 사이라는 건 공공연히 알려져 있긴 했지만, 굳이 남들 눈에 띌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 다 방법이 있죠. 그리고 우리는 두 번 갈 거예요.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밤에도?”

- 그럼요. 특히 가을엔 낮과 밤이 얼마나 다른데요. 그 모습을 놓칠 순 없죠.

유연은 살짝 갸웃했지만 기락이 그렇다고 말하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알겠어요. 언제쯤 갈까요?”

- 이틀 후 어때요? 연모대 뒷산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거든요. 촬영 시간 동안은 드라마 관계자 외엔 출입이 안 돼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당신은 견학 오는 거로 하고, 나 대기하는 동안 같이 구경 다녀요. 어차피 그날은 나보다 다른 배우들 장면이 더 많거든.

“와…….”

- 왜요?

“기락 씨. 이렇게 치밀한 사람이었어요?”

 

놀란 듯 묻는 유연의 말에 기락은 은근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아이돌 주기락만 생각했다면 큰코다칠 걸요?

 

유연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다. 어둠 속에서 그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갑자기 헛웃음이 일었다. 그는 도대체 몇 가지 모습을 가진 걸까. 친해진 만큼 이제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다는 걸 깨닫는다.

 

“알겠어요. 나 그럼 기락 씨만 믿고 가면 되는 거죠?”

 

건너편에서 기락이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럼요. 나만큼 믿음직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허니칩! 여기에요!”

 

촬영장에서 유연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역시 기락이었다. 그는 온통 낯선 사람들 틈에서 기웃거리던 유연을 단번에 발견하곤 제 옆으로 데려와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기락이 그녀를 가리키며 유연 PD님이세요, 하고 말하면 사람들은 한번쯤은 다 들어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근데 우리 기락이 씬 들어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유연 씨 괜찮아요?”

 

기락의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유연에게 물었다. 그는 오늘도 유연이 기락을 기다리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유연이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틈새에 기락이 먼저 매니저에게 말했다.

 

“오늘은 촬영장 견학차 온 거니까 주변 구경부터 시켜주려구요. 나 잠깐만 다녀올게요.”

“잠깐만. 기락아.”

 

자리를 비우겠다는 기락의 말에 매니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이에 물러설 기락이 아니었다.

 

“멀리 가지 않기, 늦게 돌아오지 않기. 나도 다 알아요, 형.”

 

기락이 선수 치자 매니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락이 헤실헤실 웃으며 유연을 바라보았다. 유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급히 손을 등 뒤로 감추고는 그를 따라 웃을 뿐이었다.

먼저 촬영 중인 다른 배우들을 뒤로하고 기락과 유연은 단풍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시야에 알록달록한 가을의 풍경들이 가득했다. 강렬한 색감과 선선한 공기가 묘한 조화를 이뤘다. 유연이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며 감탄했다.

 

“뒷산에 단풍이 이렇게 절경인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그랬어요.”

“에이. 그건 안 되죠. 나 빼고 당신 혼자 보러 오려고?”

 

투정 섞인 기락의 말에 유연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따라 웃는 기락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의 노란 머리칼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띈다. 기락은 유연의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왜요? 내 머리에 뭐 묻었나?”

“아뇨. 그냥…오늘따라 기락 씨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으음, 그런가….”

 

기락이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이는 날이니까,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요?”

“응? 갑자기요?”

“나는 칭찬 받은 기념. 당신은 칭찬해 준 기념. 어때요?”

 

그가 그렇다는데 이번에도 별수 없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유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락이 신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리 와요.”

 

기락이 자신의 바로 앞으로 유연을 불렀다. 유연은 그의 앞에 서있을 뿐인데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품이 넓었다. 괜히 얼굴이 더워졌다.

 

“자. 하나, 둘!”

 

기락은 긴 팔을 뻗어서는 금세 사진 몇 장을 찍어냈다.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여기서도 한 컷, 저쪽에서도 한 컷 하며 금세 시간이 흘렀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둘의 사진이 쌓여갔다.

 

“앗, 이게 뭐예요. 나 눈 감았잖아요!”

 

기락의 휴대전화를 들고 그가 찍은 사진을 구경하던 유연이 말했다. 유연의 머리 꼭대기에 몰래 단풍잎을 올려놓으려던 기락이 황급히 손을 숨기고는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요? 에이. 귀엽기만 한데요 뭘.”

“치. 기락 씨 눈에만 그렇게 보이겠죠!”

“뭐…그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나긋해서 유연은 잠시 손을 멈칫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고민이 길어지는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별말 없이 사진을 넘겨 버렸다. 하지만 다음 사진을 보고 유연은 얼굴에 더 열이 올랐다.

 

“기, 기락 씨! 카메라를 안 보고 엉뚱한 곳을 보고 있으면 어떡해요!”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 속에는 카메라를 향해 환히 웃고 있는 유연과, 그녀를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락이 담겨있었다.

 

“엉뚱한 곳이라뇨. 당신이 너무 예쁘게 웃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달큰한 목소리에 유연은 자기도 모르게 기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노란 머리칼이 가을바람에 산들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유연의 얼굴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그 표정을 읽은 듯, 기락이 따스하게 웃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앞 촬영도 거의 마무리 되고 있을 거예요.”

 

 

머리를 쓰다듬는 듯 기락의 손이 잠시 유연의 머리 위에 머물다 갔다. 먼저 천천히 앞장서는 기락의 뒷모습을 유연은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의 손이 머물었던 머리 위에 괜히 손을 가져가 보았다. 무언가 손에 잡혔다. 단풍잎? 유연이 알아챈 순간 기락이 슬쩍 그녀를 돌아보고는 뛰기 시작했다.

 

“아, 정말…기락씨이!!”

“으하하, 빨리 와요. 허니칩!”

 


 


 


기락의 촬영이 끝나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가을이라 해가 눈에 띄게 짧아졌다. 마지막 장면을 끝낸 기락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유연에게 걸어오는 중이었다. 간이 의자에서 그의 촬영을 보고 있던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장면을 찍으며 펑펑 울다가, 컷 사인과 동시에 감정을 가다듬는 기락의 모습은 낯섦과 동시에 말 그대로 대단했다. 눈꼬리가 빨개진 기락이 유연의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유연은 멍하니 그를 보고 있기만 했다. 저렇게 감정을 소모하면 엄청나게 지칠 텐데.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춥진 않았어요?”

“기락 씨. 괜찮겠어요?”

“응? 뭐가요?”

“촬영하느라 피곤하잖아요. 저녁에 노는 건 아무래도 다음번에….”

“슈퍼 히어로를 뭐로 보는 거예요! 아까 못 끝낸 단풍놀이 하러 갈 준비나 해요. 내가 또 봐둔 데가 있거든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당신만 괜찮으면 나도 항상 괜찮아.”

 


 

 

 


기락은 매니저까지 퇴근시키고는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유연은 운전하는 기락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기락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유연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왜요?”

“그냥 신기해서요. 기락 씨 운전하는 거 처음 봐요.”

“이렇게 계속 쳐다봐줄 거 알았으면 진작 많이 보여줄걸.”

 

그렇게 말한 기락이 곧바로 웃음을 터트려서, 유연도 아무렇지 않은 척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오늘의 그는 왠지 자꾸만 유연을 떨리게 했다. 운전하는 모습이 평소의 그보다 훨씬 무게감 있어서, 이전에 그에게 동생 같다고 했던 말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기락이 운전해온 곳은 백운호였다. 원래는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인데, 저녁 공기가 쌀쌀해져서인지 많이 한적했다. 차를 세운 기락은 익숙하게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유연이 말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슈퍼스타는 잠깐 나들이 가는 것도 힘드네요.”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스크 사이로 기락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힘들진 않은데, 당신한테 좀 더 멋있어 보일 수 없는 게 슬플 뿐이지.”

“에이. 기락 씨는 눈만 보여도 멋있어요!”

“진짜?”

 

유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락의 눈꼬리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완전무장을 마친 그가 먼저 차에서 내린 후 유연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유연은 그런 그가 어쩐지 귀여워 작게 웃었다.

 

“기락 씨. 우리 꼭 첩보영화 찍는 거 같아요.”

“어? 그러면 안 되는데….”

“응?”

 

차에서 내리는 유연의 손을 살짝 잡아준 기락이 살며시 눈을 마주쳤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건 첩보가 아니거든요.”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유연에게 기락은 그저 웃어주기만 했다.

가을 저녁 공기는 낮보다 아주 차가웠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백운호는 그 나름의 정취가 있긴 했지만, 단풍을 즐기기엔 확실히 어두웠다. 별말 없이 호수를 따라 걷는 기락을 향해 유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기락 씨. 우리 여기 단풍놀이하러 온 거 맞죠?”

“응? 그럼요. 난 벌써 하고 있는데?”

 

기락의 말에 유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단풍나무가 있긴 했지만, 낮과 비교하면 특별히 더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유연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자 기락이 작은 목소리로 유연에게 말했다.

“보는 것 말고, 듣는 것에 집중해 봐요.”

“듣는 거라뇨?”

“잠깐 눈 감고 걸어볼래요?”

“눈을 감고 어떻게….”

“자. 내가 손잡아 줄 테니까 한 번 걸어 봐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유연은 자연스레 기락의 손을 꼭 붙잡고 눈을 감았다. 느껴지는 감각이라곤 서늘한 공기와 그의 따뜻한 체온뿐이었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시야는 캄캄했다. 옆에서 기락이 천천히 움직이자 유연도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지럽혔다.

 

“…우와.”

“어때요? 듣기 좋죠?”

 

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박거리는 낙엽 소리와 이따금 울려 퍼지는 기락의 높지 않은 웃음소리만이 유연의 세상을 가득 메웠다. 차가운 가을 저녁의 공기가 달게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뜬 유연이 말했다.

 

“참 이상하죠.”

“뭐가요?”

 

진득하게 가라앉은 기락의 대답에 유연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아닌 척 말을 잇기 위한 유연의 시선이 은근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음, 이상하다기보단…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누군가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줄 몰랐어요. 나한텐 일이 전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건…좀 슬프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 일 하면서 기락 씨 같은 좋은 친구도 알게 됐잖아요.”

“응, 좋은 친구….”

 

유연은 나름대로 고맙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기락은 어딘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멈춘 그는 답답하다는 듯 마스크를 벗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내가 언제나 착하고 귀여운 친구였으면 좋겠어요?”

“네? 당연히….”

 

기락과 눈이 마주친 유연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생각이 많은 눈빛이었다. 저런 기락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의 의중을 알 듯 모를 듯했다. 아니, 이미 아는데 모른 척하는 것인가? 유연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대답은 제대로 끝맺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기락이 한 번 더 물어왔다.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

“나랑 계속 친구만 하고 싶어요?”

 

못을 박는 질문이었다. 유연은 더 도망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눈동자가 조금씩 떨렸다. 생각, 생각을 하자. 무엇이 가장 현명한 대답일까. 고민하는 사이 기락이 살짝 몸을 낮춰 유연에게 시선을 맞췄다.

 

“내 눈 보고.”

“…….”

“대답해줘요.”

 

간절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했다. 유연에게 이런 주기락의 모습은 낯선 듯 익숙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어쩌면 내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의 시선이 자신을 담고 있는 기락의 눈동자를, 그리고 오똑한 코를 지나 은근히 웃고 있는 입술에 머물렀다. 기락은 그런 유연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왜…웃어요?”

“푸흐흐,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

“나 더 기다려요?”

 

더 고민하지 말라는 듯이 기락의 시선이 유연의 입술에 머물렀다. 시선만으로도 유연은 입술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기락 씨.”

“네.”

“만약에요. 우리가 더는 친구가 아니면….”

“아니면?”

“나중에라도, 당신이 멀어지면 어떡하죠? 당신은 화려한 스타고, 언제든 다른 사람이랑….”

 

유연의 말에 기락이 픽 웃었다. 그게 고민이었냐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입술을 가까이해왔다. 둘 사이 겨우 숨을 내쉴 틈만이 자리했다.

 

“그건요.”

“…….”

“키스하고 대답해도 돼요?”

 

그와 맞잡고 있는 한쪽 손에도, 그의 시선이 닿고 있는 얼굴에도 화르르 열이 올라왔다. 유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들고, 겹쳐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바깥쪽에서 가린 채 기락은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짧았는지 길었는지도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낸 기락이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유연이 기락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유연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내가 당신한테서 멀어질 일은 없어요. 친구이든, 애인이든. 내가 어떻게 당신을 떠나.”

 

기락의 말을 들은 유연이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그동안 걱정했던 그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까지도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기락은 유연 자신이 했던 고민을 전부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 알고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유연은 더 부끄러워졌다.

 

“…허니칩 씨?”

 

유연이 아무 말이 없자 기락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는 얼굴을 살폈다.

 

“자, 잠깐만요. 쳐다보지 말아요….”

“뭐예요. 얼굴 빨개진 거예요?”

“기락 씨한테 이런 말 듣고 얼굴 안 빨개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그 말에 기락이 유연을 한 번 더 꼭 끌어안고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귀여운 건 자기면서 맨날 나보고 귀엽대.”

“놀리지 말아요!”

“허니칩 씨. 그거 알아요?”

 

궁금하다는 듯, 유연이 빼꼼 고개를 들어 기락을 올려다보았다. 기락은 그런 유연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당신이 나한테 귀엽다고 말하는 거, 너무 귀여워요.”

 

은근히 능글거릴 줄도 아는 기락 때문에 유연은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숨겨야만 했다. 도대체 주기락의 모습은 몇 개 인걸까 싶은 고민은 결국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젠 아무렴 상관없었다. 낮에 봤던 주기락도, 저녁에 본 주기락도 전부 사랑하고 있으니까.

 


 

먼지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댓글을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