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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절

이볼즈의 가을 한 켠에 자리한 유연이의 이야기.

허묵은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껏 계절이 바뀌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다. 가을의 풍경을 찬미하는 온갖 미사여구는 그에게 그저 지루한 문장들에 지나지 않았다. 높고 푸른 하늘이며 붉게 물드는 단풍, 노랗게 물결치는 은행나무나 금빛으로 익어가는 가을밭 따위는 글자로, 언어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적어도 유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투적으로 쓰이는 문장들이 무게를 갖게 된 것은 놀라우면서도 두려운 경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고, 느낄 수 없던 것을 느낀다는 것은 그랬다. 무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설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례없이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따내고 그가 정착한 연모대는 교정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봄이면 은은하게 교정을 수놓는 벚나무와 목련의 향연, 여름이면 온 학교가 푸른 물결로 일렁이고, 가을은 울긋불긋하게 물드는 단풍으로 눈이 즐겁고, 겨울은 소복이 쌓이는 눈이 학교를 포근히 덮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연모대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말을 하면 으레 따라붙는 ‘계절 바뀔 때마다 즐거우시겠어요.’ 라는 말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그였다. 하지만 유연을 만난 뒤로 그는 계절이 변하는 것을 기대하게 됐다. 사람들의 말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유연을 만났던 봄에는 뽀얀 분홍빛으로 흩날리는 벚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벚꽃잎이 아득하게 흩어지는 속에 유연이 있었다. 여름, 허묵은 여름비에 흠뻑 젖은 나무들이 내뿜는 아찔한 녹음에 압도되어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마른장마라고는 했지만 장마 끝자락에 지독하게 퍼붓던 빗속에서 그에게 우산을 내어준 사람 역시 다름 아닌 유연이었다.

그리고 가을을 앞둔 지금. 허묵은 낯선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가을의 문턱 앞에 섰다. 붉게 물든 단풍은 어떤 모습일지, 노랗게 변한 은행잎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길에 두툼하게 쌓인 낙엽은 어떤 색을 띌지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끝없이 푸른 가을하늘 아래 유연과 함께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유연과 함께라면 새로운 계절도 기꺼이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설렘은 새로운 계절을 앞둔 기대감 때문인지, 이제껏 그가 살아온 단조로운 세계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한 사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 * *


길가의 나뭇잎이 붉게, 혹은 금빛으로 물들어갈 즈음이면 그는 공연히 익숙한 생기가 도는 교정을 찾곤 했다. 졸업한 후로도 2년간은 운이 좋으면 교복을 입은 유연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와 ‘만났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 보게 된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할 정도의 변죽은 없었던 탓이었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1년 동안 이렇다 할 대화를 한 적도 없었던 데다가, 저 혼자만 겪었던 일로 혼자서 키워온 마음을 유연에게 알아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유연이 졸업한 후로는 학교를 아무리 찾아가봐도 유연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백기는 학교를 찾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꼭 유연을 보기 위해 찾아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가 학교를 찾는 것은, 특히나 가을에는 빼놓지 않고 단 몇 번이라도 찾아가는 것은, 몇 년 전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그 때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그 때에 느꼈던 감정을 다시 한 번 마주하러 가는 것이었다.

백기에게 가을이 특별해진 것은, 유연의 피아노 연주와 그의 삶이 달라진 이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목적 없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낙엽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였다. 특별하지 않은 자신을 미워하는 아버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어 이렇다 할 추억이라곤 없는 동생,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를 삶에서 자꾸만 밀어냈다. 쉬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은 때로는 견딜 수 없이 거세게 백기를 흔들어댔다. 때로는 거센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염없이 부유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는 그에게는 그게 편했다. 마음을 나누고 생의 무게를 나누어 지는 것은 까마득히 먼 남들의 이야기였다. 그런 백기에게 유연은 생을 지탱하는 닻을 달아주었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그의 삶에 지표가 되었다.

언제가 됐든 유연을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유연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마냥 달가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저를 무서운 선배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고, 그동안 눌러왔던 마음이 갑자기 터져나올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유연에게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데다가 제 마음과 같기를 은연중에 강요하게 될까봐 걱정되는 것이 가장 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유연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라면 우연이었고, 필연이라면 필연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가을에 있었던 그 일 이후로, 그는 유연을 만나게 된다면 꼭 함께 가을을 맞고 싶다고 조심스레 바라왔다. 제 마음과 같지 않더라도, 그가 맞을 가을 안에 유연이 한 구석을 꼭 차지하기를 조용히 바랐다. 함께 눈을 맞추고, 가벼운 이야기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으니 충분했다. 백기는 더 이상 가을바람에 방향 없이 흩어지는 쓸쓸한 낙엽이 아니었다.

 

* * * *


해가 구부러지는 시간은 점점 앞당겨졌다. 그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을이 다가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공기는 서늘해지고, 바람도 매서워지는 때였다. 더욱이 점점 길어지는 밤과 새벽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해가 짧아지는 것은 제 능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이 걸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묵직한 압박이었다.

큰 회사를 이끄는 그는 자연스레 주변의 변화에 무뎌졌다. 봄이면 까닭 없이 들뜨거나 나른해지는 사람들 틈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날카로워졌고, 여름이면 더위에 지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졌다. 그에게 유연은 가을저녁 노을 같은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유연을 위험에서 구했다. 그리고 다시는 위험에 빠지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눈 깜짝할 사이에 넘어가버리는 노을처럼, 유연은 자꾸만 멀어졌다. 시간을 돌리고 온 마음을 다해 부딪쳐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유연을 보면 자꾸만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마다 드는 무력감 때문에 그는 가을이, 가을저녁의 노을이 싫었다.

하지만 유연을 만난 뒤로는, 별 탈 없이 유연과 가을을 맞게 된 그는 가을이 오기 직전, 가을을 목전에 둔 이맘때의 저녁시간을 조금은 좋아하게 됐다. 은근한 기대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이번은 다르겠지, 이번은 다를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번에도 유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연은 이번에도 저에게도 함께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내민 손은 그저 닿을 뿐이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구원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뭔가 다를 것 같다는 분명한 희망이 있었다.

언젠가 미팅을 마치고 유연을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일이 있었다. 회사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유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창 너머의 노을을 보며 어딘지 들뜬 목소리로 어디에는 첫 단풍이 들었다더라 하는 가벼운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가을이 올 것이라며 기뻐했다. 택언은 기뻐하는 그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유연과 함께 있을 때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탓이었다. 이번에도 유연을 구하지 못할까봐, 그리고 그런 염려를 유연이 알게 될까봐 자꾸만 몸도 마음도 굳었다.

“대표님은 가을 안 좋아하세요?”

“별로 안 좋아해요. 가을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네. 퇴근할 때 노을을 볼 수 있는 건 가을뿐이에요. 괜찮으면 우리 잠깐 노을 지는 거 구경하고 가요. 잠깐만 차 세우고. 대표님도 가을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유연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저녁노을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택언은 문득 저녁노을이, 노을을 바라보는 유연이, 유연과 함께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탈히 유연과 함께 가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녹았다. 파랗던 하늘이 주황빛으로, 주홍빛으로, 빨갛게 물들면서 어둠을 끌고 왔다. 그럼에도 더는 어둠이, 밤이 싫지 않았다. 생생하게 제 옆에서 빛나고 있는 유연을 보며 택언은 마음을 놓았다.

이맘때쯤, 화예의 이택언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일과는 퇴근하면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단 한 순간만을 되풀이해야 한다면 유연과 함께 차안에서 봤던 그 가을날의 노을 지는 순간을 꼽으리라 다짐했다.

 

* * * *


노래든 연기든 빠지는 것 없이 훌륭하게 해내던 슈퍼스타 주기락에게는 말 못할 고민거리가 있었다. 가장 최근 싱글앨범을 발표한 이후, 좀처럼 마음에 드는 신곡을 뽑아내지 못하는 것은 슬슬 그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소속사에서도, 그를 사랑하는 팬들도 그에게는 여전히 끊임없는 응원과 믿음을 보내고 있었지만, 새로운 노래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을 어쩔 방법이 없었다. 여름 내내 어디를 가든 주기락의 노래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슬슬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를 발표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진전이 없어 답답한 날들이 이어졌다. ‘뭔가 새로운 게 필요한데…….’

[기락 씨, 바빠요? 새로운 아이템이 떠오르질 않아요ㅠㅠ]

반가운 연락이었다. 그는 작업실 의자를 빙글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경쾌하게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나랑 비슷하네. 난 신곡 작업이 안 풀려요ㅠㅠ]

[세상에, 기락 씨도 슬럼프예요?]

[응... 우리 둘 다 너무 일만 했나 봐. 번아웃 증후군 아닐까요?]

[그런가 봐요. 가을 개편 시즌에 들어갈 프로그램 준비해야하는데 완전 막혔어요.]

[우리 오늘 하루 종일 같이 땡땡이치러 가요. 머리도 식힐 겸!]

의외로 매니저는 흔쾌히 외출을 허락했다. 최근 기락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종의 배려였다. 단,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기락은 눈에 띄는 밝은 금발머리를 감추기 위해 촬영장에서 썼던 가발까지 동원해 조촐한 가을 소풍에 나섰다. 유연과 함께 도시락을 사들고 무작정 버스표를 사러 갔지만 막상 소박하게나마 자유가 주어지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터미널 구석에서 열심히 핸드폰을 두드리던 유연과 기락은 갈대축제로 유명한 곳으로 향했지만 애석하게도 한창 풍경이 좋을 때가 되기에는 너무 이른 때였다.

푸른 하늘 아래 금빛 파도가 넘실대는 풍경을 기대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여전히 푸릇푸릇한 생기를 머금은 갈대밭이었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축제기간 전이었기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허니칩 씨, 우리 저기 바다 보이는 데에서 도시락 먹어요!”

가을 하늘을 그대로 옮겨다 박은 것처럼 맑은 눈을 빛내며 기락이 소리치듯 말했다. 유연은 함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위가 싹 걷혀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짭조름하고 시원한 바다 냄새와 함께 등 뒤로 펼쳐진 갈대밭이 넘실대며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여름바다를 떠나보내며 하염없이 파도를 바라보는 유연의 눈이 깊었다. 기락은 푸른 은빛 갈대밭과 파도를 배경삼아 바람을 맞는 유연을 바라봤다. 화려한 조명과 가슴을 울리는 음악소리, 열렬한 환호와 빼곡한 객석에서 느끼는 희열도 좋았지만 모처럼의 느긋함 속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솟구쳐 마음을 꽉 메웠다. 어떤 엉뚱한 짓을 해도 웃으며 함께해주는 편안함과 친근함이 더없이 기꺼웠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요란하지 않은 유연과의 시간은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불을 밝혔다.

“이렇게 바다도 보고, 교외로 나온 게 얼마만인지 몰라요. 금빛 파도는 못 봤지만 이것도 나름 운치 있고 좋은 것 같고. 땡땡이 치자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기락 씨.”

“나야말로 땡땡이 짝꿍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허니칩 씨.”

“슬럼프가 없으면 좋겠지만, 다음에도 슬럼프가 와야 한다면 갈대밭이 한창일 때면 좋겠어요. 그 때도 핑계 삼아 여기로 땡땡이 치러 와요, 우리.”

“사람도 없고, 허니칩 씨가 아쉬워하니까…….”

혼잣말하듯 중얼대던 기락이 쓰고 있던 가발을 벗고 금빛 머리칼을 손끝으로 털며 머리를 매만졌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가끔씩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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