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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멈추다

이택언





어제 저녁에 잠시 비가 왔던가.




부드러운 금빛의 햇살이 금융가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회색의 금융가를 걸었다. 긴 긴 회색 건물들의 거리는 창문에 아직 남은 물기가 햇빛으로 가끔 반짝였다. 나의 발 밑도 군데군데 젖은 보도블럭이 아직 채 마르지 않아 부드럽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회색의 거리는 높은 빌딩들 사이로 들어오는 한 줌의 햇빛으로도 그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끔 드문드문 나타나는 가로수의 노란 낙엽이 아니라면 가을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여름처럼 눅눅하지도 않고, 겨울처럼 건조하지도 않은 상쾌함도 확실히 가을이 왔다고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높은 건물들에 가려 손바닥만큼 드러난 하늘로는 가을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일년 내내 회색인 숲의 어느 높은 곳에 있는, 일년 내내 검정 정장만 입고 있는 어떤 까칠한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성격의 그 사람이기에, 오늘만큼은 가을을 느끼게 해주자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날씨에 가을이 왔는지도 모르는 채로 저 높은 건물에 갇혀있는 것은 불쌍하니까.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인데도, 검은 정장의 그 사람은 저기 높은 회색의 빌딩에 갇혀있었다.

나는 한 손에는 소풍바구니를 든 채로, 그 사람 만큼이나 무뚝뚝한 유리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답답한 긴 복도를 지나 어느 두터운 문 앞에 서서, 그 문에 어울리지 않는 리듬으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비지니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리듬이 불쾌했는지, 낮고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왠지 우스워 빙글빙글 웃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오셨다고 해서 들렀어요.”

오늘도 숨막히게 빳빳한 검정색 수트를 입은 이택언이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를 들고 있는 채로 나를 노려보는 모습에 사뭇 더 약올리고 싶어졌다.

“내가 주말에 회사를 나온 건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으려고 나온 건 아니예요.”

그의 까칠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아침에 사무실에 계신 사진 올리셨잖아요. 제가 보라고 올리신 건 아닌가요?”

“…내가 왜 당신 보라고 그런 귀찮은 일을 합니까. 무슨 일로 온거예요? 들고 있는 바구니는 또 뭐고.”

그는 여전히 딱딱한 자세로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그런 그에게서 아주 잠시 스쳐가는 부드러운 입꼬리를 읽을 수 있었다.

“단풍 보러 가자고 하셔서 왔죠.”

나는 호기롭게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핸드폰의 액정에는 단풍 구경을 가고 싶다는 나의 모멘트 아래에, 그의 이름으로 딱딱한 덧글이 달려있었다.


- 시간 나면 보러가죠.


“…시간 나면 간다고 쓰여있는 게 아닌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오히려 그 짜증스러운 표정과 반대로 웃어 보였다.

“제가 오늘 시간이 나서요.”

그러자 그는 결국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가한 모양이군.”

그리고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등 뒤에 있던 커다란 유리창을 향해 돌아섰다. 넓고 파란 하늘에 그의 검은 정장이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의 커다란 키와 군더더기 없는 몸 때문일까. 그 실루엣이 왠지 더 차갑게 보였다. 나는 이택언의 한심하다는 말투에도 그의 옆으로 다가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넓은 창문 밖에는 회색의 스카이라인이 파란 하늘 아래에 표정없이 그려져 있었다. 가로수의 드문드문 보이는 낙엽조차도 이 정도 높이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옆을 돌아보니 여전히 무채색인 이택언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그도 나를 향해 돌아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다음 주 부터는 한가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일부러 ‘네!’ 하고 약올리듯 밝게 대답했다. 그러자 차가웠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당신 정말…”

그의 무채색의 입꼬리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는 검정색의 코트를 집어들어 걸쳤다. 책상에 놓여져 있던 차 키를 주머니에 넣으며 그가 말했다.

“갑시다. 그런 각오라면 하루 정도 어울려 주도록 하죠.”










“바구니에 든 건 뭐죠?”

검정색 벨벳의 고급스러운 운전대를 잡은 이택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네비게이션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 바구니를 열어보이며 말했다.

“고구마랑 밤이요! 밀크티랑 물도 가져왔어요.”

“고구마랑 밤?”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가을에는 고구마랑 밤을 구워먹어야죠. 일부러 불 피워도 되는 곳으로 찾아봤어요. 여기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이택언은 네비게이션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평범하게 도시락을 싸온 줄 알았는데.”

그리고는 곧 부드럽게 엑셀을 밟으며 네비게이션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예측하기가 어렵군요.”

그의 검정색 차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지나 회색의 숲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끔 나타나는 신호등과 가로수의 낙엽들이 회색의 도시를 색칠하곤 했다. 

조금씩 회색의 풍경이 파란 하늘에 씻겨나갈 때 쯤, 백운호의 어느 한 구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강렬한 색으로 주변이 물들기 시작했고, 이내 붉은색과 노란색이 가득한 풍경이 파란 하늘과 시원한 대조를 이루었다. 툭 틔여진 풍경이 건물에 막혔던 답답한 시야를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탄 검정색 차가 저수지의 한 구석에 멈추자, 이택언이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처럼 가을인데 이런 곳에서 단풍 구경이라도 해야죠. 여기 벤치도 있네요-“

나는 바구니를 챙겨서 기분 좋게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 물가에 가까이 가보았다. 저수지는 단풍이 든 나무들이 한가득 비쳤다. 마치 물 속에 불꽃이 들어있는 것 처럼 저수지는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물가에 서있는 나를 잔뜩 둘러싼 촉촉한 낙엽의 향기도 기분좋게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며 나를 둘러싼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검정색 코트를 입은 이택언이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도 경치가 싫지는 않은지 고개를 돌려 저수지를 둘러보았다. 

그의 잘 닦은 검정색의 구둣발이 단풍 위를 걸어왔다. 어느 새인가 단단했던 입꼬리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약간 차가워보였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살짝 단풍이 비쳐 약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구마를 어떻게 굽겠다는 거죠?”

나는 그의 미심쩍다는 말투에 당당히 바구니를 내려놓고 손으로 낙엽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렇게 낙엽을 모아서-”

그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하는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낙엽을 적당히 모아서 바구니의 고구마와 밤을 꺼냈다.

“이렇게 낙엽 위에 고구마랑 밤을 얹고-“

수북히 고구마와 밤을 낙엽 위에 올리니 꽤 그럴 듯 했다. 

“이제 불만 붙이면!”

나는 라이터를 찾으려고 바구니를 뒤적였다.

“……”

“…어라.”

아무리 손을 움직여보아도 라이터가 없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주머니까지 뒤져보았다. 이택언은 그런 나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불 피울 건 안 가져왔나보군요.”

“아니예요! 분명히 바구니 안에 같이 넣어놨는데. 잠시만요...”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면서 뒤적여보아도, 가져오지 않은 라이터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택언은 잠시 동안 나를 빤히 지켜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됐어요. 내가 붙일 테니 기다려요.”

그는 다시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돌아갔지만, 검은 코트를 입은 몸을 숙여 적당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로 내가 모아놓은 낙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이정도 낙엽으로 이 많은 고구마가 구워질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그러더니 고구마와 밤을 몇 개 옆으로 툭툭 밀어서 한 쪽 구석에 치워놓았다. 내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모아놓은 낙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런 젖은 낙엽만 모아놓은 겁니까.”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손은 능숙하게 뒤적이고 있었다.

“젖은 낙엽 태우면 검은 연기 올라와요. 고구마 먹다가 폐라도 내줄 생각이었어요?”

그리고서는 비싸보이는 구둣발로 적당한 낙엽을 찾아 아무렇지도 않게 고구마 위에 덮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제야 허리를 한 번 펴고 안주머니에서 금속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어, 라이터 있으시네요! 흡연 하셨던가요?”

“내가 그렇게 자기 관리 안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바이어에게 선물받은 겁니다.”

그러더니 쨍-하는 금속 소리를 내며 지퍼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낙엽은 그가 붙인 불로 탁탁 소리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마른 낙엽은 금세 특유의 향기를 내며 붉은 빛으로 적당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택언은 다시 허리를 굽혀 나뭇가지를 집으려다가 다시 허리를 폈다.

“이거나 들고 있어요.”

그리고는 그의 검정 코트를 벗어 나에게 건넸다. 이택언의 몸에 꼭 맞는 검은 수트가 햇빛 아래에 드러났다. 그는 다시 허리를 굽히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어선 그는 수트 마저 벗어내고 단정히 반으로 접어 나에게 건넸다.

“이것도.”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택언은 검정색 베스트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고, 아직 검은 넥타이를 메고 있는 채였다. 그제서야 그는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그는 탁탁 소리를 내는 낙엽 더미를 뒤적거리다가도 다시 덮기도 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그는 전혀 가을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 색감이 넘치는 풍경 속에서 이택언은 무채색의 정장을 입은 채로 겨우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허리를 굽혀 열중하고 있었다.

큰 키 때문에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있는 그가 불편해보여 바구니 속의 돗자리를 하나 꺼내서 깔았다.

“여기 앉아서 하세요.”

“다행히 이건 잊지 않았나보군요.”

그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무채색인 그의 표정에 아주 잠시나마 색감이 돌았다. 돗자리 위에 앉은 그는 정장 바지인 채로 긴 다리를 접어 앉았다. 

“…이제 기다리면 될 겁니다. 밤은 익으면 튈 수 있으니까 저리 비켜 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가 아파졌는지 시선을 멀리 두고 목을 뻐근하게 움직여보였다. 가을 바람이 살짝 피어오르는 연기를 조금 밀어내었고, 이택언의 머리카락도 살짝 흔들렸다. 잠시 말 없이 타고있는 낙엽만 바라보던 그는 불편했는지 검정색의 넥타이를 완전히 끌러내었다.

“코트 줘봐요.”

나는 들고 있던 코트와 수트를 그에게 건넸다. 이택언은 몸을 일으켜 그것을 들고 차에 넣어놓고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는 베스트도 넥타이도 없이 하얀 셔츠의 제일 윗 단추 하나만 풀러낸 채였다. 약간 불편해보였던 구두는 적당한 것이 없었는지 그대로였다. 

다시 돗자리에 털썩 앉은 그는 소매의 단추를 풀고 반쯤 걷어올렸다. 그리고 단단한 팔이 드러난 채로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올리더니 낙엽을 살짝 뒤집어보였다.

"아까 뭐 마실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밀크티랑 물 있어요. 물 드릴까요?”

눈을 마주친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고, 나는 바구니 안에서 생수병 하나를 건넸다. 그는 그것을 받아 몇 모금 마셔 바닥에 적당히 세워두었다.

“저, 이제 제가 구울게요. 모처럼 대표님을 끌고 나왔는데 계속 지켜만 볼 수는 없잖아요.”

내가 미안한 듯이 말하자, 이택언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둬요. 안 쪽에 젖은 잎 넣어놨으니 훈연향이 들어서 딱 좋을 거예요.”

그는 셔츠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셰프스러운 말을 했다. 나는 잠시 잊고 있던 그의 다른 직업이 생각나서 조금 웃어버렸다. 그러자 이택언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바쁜 사람 불러내서 이런 곳에서 고구마나 굽게 하고선...”

“갑자기 셰프님 같은 말씀을 하셔서요. 조용히 단풍 구경하면서 셰프님이 구워주시는 고구마를 먹을 수 있다니 오늘 운이 좋네요. Souvenir 도 가끔은 야외 영업을 해보는 건 어때요?”

그러자 이택언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선을 저수지에 두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 정도 경치면 고려할 만하군요.”

그가 완전히 풀어진 표정으로 먼 곳에 시선을 두자, 나도 그의 옆에서 함께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가끔 서늘한 바람에 한 장 한 장 붉은색의 단풍이 저수지 위로 떨어졌다. 항상 듣던 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그 어떤 말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붉은 풍경 속에 가끔 낙엽이 탁탁 거리며 타는 소리만 들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만이 이 풍경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함께 있었을까. 

조금씩 달큰하고 고소한 향기가 코 끝에 닿기 시작했다.

이택언도 같은 향기를 맡았는지 소매를 걷어올린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낙엽을 뒤적이자, 그의 말대로 젖은 낙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안에서 살짝 검게 그을린 고구마와 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린 낙엽의 틈으로 달짝지근한 향이 확 피어올랐다.

“잘 익은 향기가 나요. 진짜 가을 같네요.”

“그렇군요. 완전히 익은 것 같은데, 신문지 같은 건 있어요?”

이택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바구니 안에서 신문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호쾌하게 구겨내고는 구겨진 신문지로 고구마와 밤을 꺼냈다. 신문지로 감싸진 고구마에서는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났다. 그는 그걸 든 채로 나에게 말했다.

“남은 신문지는 무릎에 깔아요. 고구마 놓아줄테니.”

그의 말대로 신문지를 무릎에 펴니 들고 있던 고구마를 하나 올려주었다. 하얀 김과 함께 고소한 향기와 훈연향이  어우러져 피어올랐다. 이택언이 조심스럽게 신문지로 끝을 잡고 고구마를 반 갈라주었다. 그러자 하얀 김이 화악 피어오르며 샛노랗게 익은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가 건네는 신문지 끝을 잡아 보았다. 그리고 호호 불어서 한 입 베어물자 아직 촉촉한 고구마가 달달한 맛을 내며 녹아들었다. 이택언의 말대로 훈연향이 입 안에서 진하게 감돌아 야외에서 구워먹는 고구마의 느낌이 듬뿍 들었다.

“맛있어요?”

그의 목소리에 그를 올려다보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 채로 말했다.

“네! 대표님도 어서 드세요. 이거 엄청 맛있어요!”

“하여간. 뜨거우니 천천히 먹어요.”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어보이더니 이내 옆에서 고구마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는 후후 불어서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네.”

완전히 풀어진 표정으로 부드럽게 미소짓는 이택언이 우물거리며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아까 사무실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바구니에서 밀크티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내 밀크티를 꺼내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밀크티가 뜨거운 고구마와 어우러져 묘한 달달함과 향기를 남기며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러는 동안 이택언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것도 다 익었군요.”

그러더니 밤을 집어들고는 꺼내든 주머니 칼로 능숙하게 뜨거운 껍질을 벗겨내었다. 그리고서는 나에게 샛노란 밤을 반 갈라서 건넸다. 노란 밤의 속살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나는 너무 뜨겁지 않게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고구마만큼 달지는 않아도 늦가을의 햇밤이 고소하고 맛있었다. 이택언도 남은 반을 자신의 입에 털어놓고는 내 우물거리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잘 익었나보군요. 대충 구운 것 치고는 제법 맛있게 익었어요.”

우리는 아직 뜨거운 입 안을 우물거리는 채로 눈이 마주쳤고, 서로 우스워서 풋-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택언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그을인 밤 껍질을 하나 더 까서 내게 건네주었다.

비 온 뒤의 촉촉한 낙엽의 향기는 그렇게 따스하고 포근한, 고소하고 달달한 향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설마 전부 먹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맛있는걸요. 어느 셰프님이 직접 구워주셔서 그런가봐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우리는 가져온 고구마와 밤을 모두 구워먹고 신문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택언은 불가에 서서 구둣발로 남은 불씨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맛있어도 나라면 그렇게 마구 먹지는 않을겁니다. 좀 남겨서 집에 가져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여기서 먹는 게 가장 맛있는걸요. 집에 가면 이 맛이 안 난단 말예요.”

“그런 열정과 끈기는 식탐이 아니라 업무에서 발휘해줬으면 좋겠군요.”

이택언은 여전히 불씨를 꼼꼼히 정리하며 말했다. 거의 정리가 되었는지 그는 낙엽이 잔뜩 붙은 바지 끝을 툭툭 털어냈다. 이제 그의 고급스러운 구두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택언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구두가 엉망이 된 것이 신경쓰여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 때,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나무에서 낙엽들이 잔뜩 떨어져 날아올랐다.

파란 하늘에 붉고 노란 낙엽들이 높이 흩날렸다.

이택언은 낙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처럼 좋은 걸 보여줄 수 있겠군요.”

그 말의 뜻을 생각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바람이 잦아들었고 높이 솟은 낙엽들이 천천히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려 앉으려는 낙엽들이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파란 하늘 높이 올라간 채로, 땅으로 내려가지 못한 단풍잎들은 붉고 노란 빛으로 땅을 비추고 있었다. 손바닥을 들여다 보면 단풍이 만들어낸 신비한 조명으로 내 손도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비쳐보였다.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에 서있는 것처럼, 아니 신비한 숲 속에 들어와있는 것 처럼 모든 곳이 제멋대로인 조명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불규칙하게 단풍들이 흩어진 채로 멈춰있었다. 내 발 밑부터 하늘 높은 곳까지 가득히 모빌을 달아놓은 것처럼 낙엽들은 아름다운 조각들이 되어 모든 공간을 장식하고 있었다. 손에 닿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 멀리 강렬한 점묘화를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백운호의 어딘가까지, 이 넓은 모든 공간이 붉고 노란 조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도 인생에 한 번도 볼 수 없었을 풍경이었다. 아니, 이런 광경이 있는 줄도 몰랐겠지. 이 화려한 조각들 사이로 새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이택언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들여다보니, 그 역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손으로 단풍잎들을 커튼을 걷어내듯이 걷어내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멈춘 시간이 만든 더욱 조용한 공간 속에서, 그의 걸음에 맞춰 바사삭하며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천천히 그 소리가 가까워지며 훨씬 부드러워진 표정의 이택언이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볼 만 한가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뭐라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겨우 말했다.

“네…너무 아름다워요…”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뭐라고 말해야 이 놀라운 풍경을 내가 느낀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

이택언은 입가에 무채색이 아닌 따스한 색으로 빛나는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낙엽이 비춘 그의 얼굴은 회색의 높은 빌딩에 갇혀있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하얀 셔츠도 단풍이 비추는 색으로 불규칙하게 따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 줘 봐요.”

그는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쥐고는 내 옆의 단풍잎을 향해 이끌었다. 그의 따스한 손이 이끄는대로 단풍을 톡 쳐보았다. 그러자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을 잊은 단풍잎이 내가 밀어낸 방향으로 죽 밀려났다. 

내가 신기한 듯 이택언을 향해 돌아보자 그는 내 눈을 맞추고 미소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내 손을 내려놓고 그의 옆에 있던 단풍잎을 집어들었다. 마치 벽에 붙어있는 메모지라도 떼어내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는 그것을 내 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그나마 가장 잘 말라보이는군요.”

내가 궁금한 듯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에게 주시는 건가요?”

그는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단풍을 보러온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완전히 잊고 있었군요.”

한숨짓듯이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강렬한 붉은 빛보다도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 가을이 온다면 꼭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시 작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슬쩍 비치고 있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 손에 올려놓은 단풍잎 위에 그의 손을 겹쳐올렸다.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매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군요.”



언제나, 늘.

그는 이렇게 침착한 말투였다.

붉게 물든 단풍보다도 강한 사람이면서도 조용한 풍경만큼이나 정중한 사람이자,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침착하게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단풍잎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 손 위에 겹친 그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했지만, 이제는 이 따스함과 정중함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정중한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담아 소중하게 그의 겹친 손을 붙잡아보았다. 

“대표님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걸 매년 볼 수 있겠어요?”

그의 과분하게 간절한 눈동자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저는 매년...단풍을 이렇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의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신과 함께.”

내 대답을 끝으로 이택언의 따스한 손은 내 어깨를 감싸 안았고, 나는 단풍이 가득 매달려있는 풍경 속에서 이택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빛으로 가득했던 나의 시야는 그의 따스한 품으로 가려졌다. 나는 그의 품 속에 안긴 채로 발돋움을 해보았다. 

발 밑에서 바사삭하고 단풍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보드라운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았다.

붉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붉은색의 단풍도 그렇게 한참이나 멈춰있었다. 

영원히.

내려앉을 생각이 없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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