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染 : 붉고 누르게, 그리고 푸르게, 마침내 너에게

허묵X유연




染 : 붉고 누르게, 그리고 푸르게, 마침내 너에게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닷새 전만 해도 얄팍한 옷차림을 고수하던 수강생들의 소매가 서서히 길어지고 어깨 위로는 하나둘 겉옷이 걸쳐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푸근한 니트 차림도 여럿이다. 해가 져 더욱 쌀쌀해지면 동료 교수들은 랩 가운을 힘껏 여몄다. 바람이 슬슬 매서워지는걸. 우리 젊은 허교수는 이 정도 추위는 안 타나? 하하, 아직은 거뜬합니다…. 아무렴. 드러난 살갗을 스치는 냉기는 어쩌면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었기에. 그것은 익숙하다 못해 나의 눈동자에, 눈매에, 입가에 담겼다. 연구원이나 수강생들이 나의 얼굴을 더러 ‘어쩐지 차가운 인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였다.


그렇게 나는 사시사철 한파 속에 잠겨있을 줄 알았다. 따뜻한 것이 무언지는 평생 모를 것이라고, 내겐 그런 감각에 취할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미묘한 확신이 어긋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얼었던 땅이 녹고 영상의 기온을 회복하며 잿빛의 엷은 꽃잎이 틔워나기 시작하던 초봄의 어느 날, 당신과의 연이 닿았던 날부터일 것이다.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적이었던 만남이었을 진데 그것은 모순되게도 나를 점차 계산 이외의,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끌었다. 지금까지도, 아마 앞으로도, 줄곧.

교수들과 함께 강의동을 벗어나다 문득 도서관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니 이내 벚꽃이 만개하던 날 당신과 함께했던 저 도서관에서의 일도 떠올랐다. 창가에 선 당신의 뒤로 보이는 창밖의 만개한 꽃잎의 색이 사실 잿빛이 아닌 선연한 분홍빛임을 눈에 담아 깨달으며 첫봄을 맞은 양 들떠버렸던. 그 첫봄이 쏟아져 내리듯 닥쳐와 나를 에워싸고 있던 단단한 얼음 장벽을 무너뜨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알려달라는 농담과 함께 답지 않게 눈을 휘어가며 웃었던 건 그에 휘말린 충동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때의 소면(笑面)은 분명 ‘어쩌지 차가운 인상’이라는 감상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었겠지.

 

이와 같이 당신과 벌써 두 계절을 지나며 쌓인 추억이 이 연모대 곳곳에도 가득 묻어난다. 지금 나의 눈에 담기는 풍경은 온통 흑백이나 이제 나는 당신의 흔적이 담긴 이 모든 것들의 색을 알았다. 이곳 뒷산에 핀 어느 꽃의 색이 무언지 물어도 답해줄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참 예쁘게도 물들었어. 그렇지?”


 

…그러나 이건 예상 밖의 물음인데.


‘물들다’라. 조용히 눈만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무어가 물들었다는 건지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머무는 흑백 세상에선 주어가 텅 빈 저 불친절한 문장을 이해하기엔 무리였다. 결국 별다른 대답 없이 담담한 웃음만 흘리자 동료 교수가 난데없이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허교수 ‘그 여자친구’랑 구경이라도 가야 할 거 아냐, 곧 단풍도 절정일 때고! …단풍 얘기였군. 돌아본 뒷산은 그 물들었다는 색채를 나의 눈에 담아내지 못한 채로 적막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분명 당신과 함께했던 봄날엔 분홍이 가득했었는데.

 


“맞아, 허교수. 애인이랑은 여전히 잘 돼가는 거야?”

“접때 교수 모임에서 한 번 소개받고 나서는 소식이 뜸한데. 헤어진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잘 만나고 있습니다.”

 


교수 한 명이 띄운 ‘여자친구’ 운은 금세 다른 교수들에게까지 전이됐다. ‘어여쁜’, ‘귀여운’, ‘고운’, ‘참한’,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수식어들은 칭찬 일색이었으나 당신을 제멋대로 평하는 것 같아서 탐탁지 않았다. 이들이 당신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언짢았고. 그러나 당신이 ‘나의 연인’이라는 것을 착실하게 시사하는 언행에서는 묘한 충족감 또한 일었다. 복합적인 감정을 얼굴 밑으로 숨기며 간간이 짧은 대꾸로 응하고 있자니 곧 산만한 대화의 흐름은 다시 초반의 물음으로 돌아갔다. 이 연모대 뒷산의 단풍 물이 가장 예쁘게 들 때 당신과 구경 가지 않을 거냐고. 가야죠…. 다시금 잿빛 뒷산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첫봄을 맞은 그 날처럼, 당신의 뒤로 펼쳐진 여름의 녹음을 마주하고 첫여름을 맞았던 그 날처럼, 이번에도 또 첫가을을 맞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하지만 요새의 당신은 바빴다. ‘단풍 구경’이라는 협소한 핑계로는 당신을 불러내기에 턱없을 정도로. 새로 제작 중인 프로그램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윗사람들의 큰 기대를 사며 거액의 투자를 받은 데다, 짤막한 티저와 예고편을 내놓자마자 여러 방송인들을 비롯하여 예비 시청자들에게도 상상 이상의 관심과 응원을 얻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신은 그 기대가 꺾이게 하지 않기 위하여 평소 때보다 수 배 무리하고 있었다. 연일 야근에 시달리는지 새벽이 깊었을 때에서야 도어락 해제되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고, 어느 날엔 아예 잠잠했다. 퇴근을 포기해버린 것일 터다. 이러다 끝내 회사에 살림을 차리는 건 아닐는지. 아니 그보다도 잠은 제대로 자는 건지,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건지… 만남의 핑계도 핑계지만 일단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걱정 반 핑계 반으로 릴렉스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당신을 불러냈을 땐 다소 냉정한 답변을 받았다.

 


[죄송해요, 교수님.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에요…]


 

분명 전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그런가요? 지금은 좀 휴식이 필요할 때일까요? 휴식도 일의 중요한 일환이랬으니까…. 교수님 말에 따를게요!]


 

설득이 어렵지 않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내게 마구 이끌려주었던 이전의 당신과는.

 

두 계절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퍽 다급하게도 성장해버린 당신은 내게 생경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러다 당신이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그 날개를 왜 진작 꺾어버리지 않았을까… 불쑥 튀어나온 잔혹한 생각에 스스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건 이제는 습관이었다. 참으로 비겁한 습관이며 감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결국에 실천하는 행동은 달랐다. 두려움보다는 당신을 향한 걱정을 먼저 덜어내기 위한 행동. 쓰게 웃으며 휴대폰을 집어 들고 당신과의 메신저 창을 켰다.

 


[저녁은 먹고 일하는 거죠? 거듭 식사를 거르면 뇌 활동량이 저하돼 효율적인 업무를 할 수 없어요. 시간 아낀다고 식사 거르지 마세요.]

[앗, 교수님 완전 귀신…. 알겠어요.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을게요!]

[바보. 간단하게 말고 든든하게 먹어요. 정 시간이 없으면 내가 뭐라도 사서 갈

 

“…….”


 

메시지를 입력하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 끝에 짤막한 막대 하나가 깜빡였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자조했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어떤 핑계든 대어서 당신을 만나러 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충동과 감정이 얄팍하게나마 이성을 지배하려는 지금과 같을 때 당신을 만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끝내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 메신저 창을 종료했다.

탁. 다소 둔탁하게 내려놓은 휴대폰의 화면이 점멸한다. 미련스러운 시선을 거두고 가만히 눈을 감으니 이지러진 감정이 점점이 흩어지다 모여 이내 당신이라는 색채와 상을 만들어냈다. 상상 속 당신은 꽤 여위어 있었다. 간단하게 말고 든든하게 먹으라는 메시지만이라도 보낼 걸 그랬지. 따라붙는 생각에 실소가 새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온통 당신이다. 내가 절대로 거두어낼 수 없는 당신이었다.

 

 

 -



시일이 꽤 지났다. 어느새 교수들이 말하던 ‘단풍 절정기’가 코앞이었다. 다음 주쯤부터는 서서히 잎의 색이 빠지고, 그다음 주부터는 낙엽이 돼 하나둘 바닥을 뒤덮어 경비원들은 쉼 없는 빗질을 시작하겠지. 그 허한 광경을 떠올리니 괜스레 마음이 시렸다. 아니, 가을 초입부터 이렇게 중순이 되도록 당신을 만나지 못한 탓이 크다. 모두가 완연한 가을을 맞았는데 나만이 계절과 계절의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당신이 내게 첫가을을 가져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꿎은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 만은.

 

조금 전 연구원이 타다 준 따뜻한 말차라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슈가를 두 스푼 넣어달라고 했는데. 물론 의미 없는 부탁이었음을 안다. 두 스푼이든 세 스푼이든 그것이 내 혀의 감각을 일깨워 줄 리는 없을 테니. 한 모금 마신 후 역시나 입안을 감도는 무미(無味)에 당신과의 추억을 덧씌워보았다. 저는 말차라떼에 슈가를 듬뿍 넣은 걸 좋아해요. 그때 당신이 제 취향대로 탄 말차라떼는… 무척 달았었는데. 사실 그 기억은 다소 불확실했다. 그 말차라떼가 달았던 건지, 당신이 달았던 건지… 그러나 당신이 내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준 것만은 분명하니까.

무미의 말차라떼는 결국 세 모금 이상 마시지 못했다. 당신과의 추억을 아무리 덧씌워봤자 다디단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세 모금 만에 깨달은 것이다. 아깝지만 묵색으로 보이는 녹색의 액체를 개수대에 흘려보내고 부러 아주 쓰다는 차를 새로 우렸다. 물론 그 고미(苦味) 또한 느낄 수 없겠지만 입안이 쓰고, 마음이 쓰린 것에 대해 당신 탓이 아닌 나름의 핑계를 대기 위함이었다.

 


무가치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어느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후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실험으로 통계치를 내어놓아야 하는 게 있었는데, 시간을 보니 턱없이 무리다. 계획한 하루의 일과가 무너진 것이 얼마만 인지. 아니, 사실 당신이 엮이면 나의 계획과 일과는 꽤 자주 무너지곤 했었다. 당신은 그 모든 걸 ‘민폐’라고 생각하며 내게 퍽 미안해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지금껏 퍽 유쾌한 일탈이라고만 여겼었고.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저 불유쾌했다. 이번엔 당신의 존재로 인한 것이 아닌, 부재로 인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쓴웃음이 번졌다. 오늘만 벌써 수 번째 띄우는 가짜 웃음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려왔다. 슬쩍 시계를 보아 점심때를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하니 문밖의 인물이 누구인지, 용건이 무언지 감이 잡혔다. 식욕이 솟아난다는 가을이라 그런지 요새 들어 밥때를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연구원들이었다. 당신은 가을도 안 타는지 오히려 자주 거르는 모양이었지만…

 


“들어와요.”


 

허락의 말에 문을 열고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시나 연구원 중 한 명이었다. 용건 또한 예상에서 한 치도 빗겨 가지 않았다.


 

“교수님. 다들 지금 밥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안 가세요?”

“아… 맛있게들 먹고 와요. 나는 좀 속이 쓰려서.”

 


사실이었다. 아까 전 차를 다 비운 후부터 살살 속이 쓰렸다. 고약할 정도의 쓴맛을 내는 차라더니 정말 속까지 쓰리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가라앉은 찻잎과 바닥을 내보인 찻잔을 내려다보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연구원을 향해 가보라는 눈짓을 표했다. 그러나 연구원은 돌아서지 않고 어쩐지 곤란한 낯을 내보인다. 속이 안 좋으신 거예요? 어쩌지… 작게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그, 교수님 여자친구 분이 도시락 싸 오신 것 같은데…”

“!”


 

벌떡.

 

말이 다 맺어지기도 전에 몸이 일으켜졌다. 정말로 ‘일으켜졌다’. 본능적이고도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당신이 왔다고? 크게 열린 눈동자가 문 틈새를 집요하게 방황했다. 그리고 일순, 선명한 카멜색의 코트 자락이 눈에 들었다. 연구원의 뒤에서부터.

 


“교수님…?”


 

이내 당신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얼굴을 드러낸다. 쌀쌀한 가을바람을 맞았는지 조금 발갛게 상기된 볼을 하고서. 그 그리웠던 낯은 역시나 걱정했던 대로 조금 야위어있어서 절로 탄식이 새었다. 끼니 거르지 말라고 그렇게 충고했는데. 무어라 잔소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입을 열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내보낼 수 없었다. 갑작스레 울컥 목이 멘 탓이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침묵하는 사이 당신이 연구원을 보내고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메었던 목이 트였다.

 


“어떻게…”

“교수님 뵈러 왔죠. 그런데… 속이 안 좋으시다구요?”

“아뇨. 갑자기 괜찮아졌어요. 당신을 봐서 그런가.”

“하하…”


 

한 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진심이었으나 당신은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어색하게 웃는다. 덧붙이는 말 없이 그 미소를 따라 그리며 당신을 다시 한번 살폈다. 조금 긴 듯한 머리칼, 야윈 탓인지 전보다 더 깊어진 볼우물, 왜소한 체격을 덮는 따뜻한 카멜 색의 오버사이즈 코트는 당신과 퍽 잘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본 당신은 여름 차림새였는데, 그새 두터운 코트 차림이 됐네요.”


 

이렇게 날씨가 변할 동안의 공백을 서운해하는 투로 말하자 당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교수님 랩 가운은 그대로시고요.”

“뭐… 나도 밖에 나갈 땐 코트 정도는 걸치니까요.”

“흐, 그러셔야죠. 감기 걸리시면 안 돼요.”

“당신이야말로.”


 

충족감에 넘실대는 마음과 하염없이 당신을 좇는 시선을 애써 거두며 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 한 달간 사용해주지 않아 쓸쓸했을 당신 전용 찻잔이 눈에 들었다. 차 마실래요? 돌아보며 묻자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래 부쩍 카페인에 과하게 의존했을 당신을 염려해 부러 카페인이 없거나 적은 차를 살피다 캐모마일을 택했다. 잔을 꺼내 들어 먼지를 닦아내고 찻잎과 뜨거운 물을 담아내니 퍼지는 향을 맡은 듯 당신이 나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캐모마일… 레드 티네요.”

“레드 티…”

“히비스커스랑 블렌딩 한 거 맞죠? 색이 정말 이뻐요.”


 

당신이 찻잔을 받아 쥐자마자 잿빛이었던 차의 색이 붉게 물들었다. 아, 숨과 닮은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네요. 이 계절이랑 어울리는 것도 같고.”

“맞아요, 이 붉은 색이… 아 참, 교수님 저길 봐요.”


 

당신의 손과 팔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색채가 입혀진다. 이내 당신의 손끝이 가리키는 창밖엔 뒷산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번에 우리 같이 가서 봤던 벚나무요. 벚나무에 단풍 물이 들면 저렇게 예쁜 색이 나는 줄 몰랐거든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

 


당신이 창가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 색채가 나의 눈에도 담겼다. 붉고 누르게 물들어 가지마다 빼곡하게 매달린 나뭇잎의 색. 그 오묘하고도 따스한 색채가. 당신은 창가에 가까이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며 붉은 차를 두어 모금 홀짝이다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가까이 보러 갈까요? 마침 도시락도 있으니까 가을 소풍 기분도 낼 겸.”

“좋죠. 사실은 당신이랑 줄곧 단풍 구경 가고 싶었어요. 워낙 바빠 보여서 얘기도 못 꺼냈지만.”

“…뭔가 죄송하네요. 그래도 지금이 제일 이쁠 때인 것 같으니까 다행이에요.”


 

얼른 나가요. 당신이 대담하게 나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전혀 억센 손길이 아니더라도 절대로 떨쳐낼 수 없는 손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대로 이끌려 나갔다. 나에게는 비로소 첫가을로 향하는 길에.

 

 

 -

 


[오늘은 휴강입니다.]


 

당신과 함께 연구소 건물을 벗어나며 수강생들에게 단체 문자를 전송했다. 강의를 한 시간 남짓 남겨둔 때의 갑작스런 휴강 통보. 오늘로 벌써 두 번째 일탈을 자행한 셈이다. 그러나 퍽 불쾌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은 전혀 상반된 기분이었다. 아무렴, 당신이 옆에 있으니까. 산길로 향하는 길에 문자를 확인한 학생 몇 명을 마주치며 은근한 눈빛을 받아야 했지만 괜찮았다. ‘데이트 때문에 휴강하신 거예요?’ 입 모양으로 물어오는 어느 학생에겐 슬쩍 비밀이란 신호를 보내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모든 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교수님 오늘 오후에 강의 있는 날 아니었던가요?”

“…이런, 알고 있었어요?”

“교수님 연구 스케줄까지는 무리여도 강의 시간표 정도야 당연히 꿰고 있죠. 오늘은 충동적으로 찾아온 거라 잠깐 잊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럼 금방 들어가셔야겠네요…”

“음, 그럴 필요 없어요.”

“왜요?”

“이미 휴강 통보를 해버렸거든.”

 


[오늘은 휴강입니다.]

일괄 전송된 메시지를 보여주며 말하자 당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혹시 저 때문이에요…?”

“아뇨, 나 때문이에요. 나한테도 이런 날 하루쯤은 있어야죠. 더군다나 당신을 얼마나 오랜만에 본 건데. 오늘은 좀 봐 줘요.”

“에이, 제가 봐 줄 게 뭐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오히려 좋은데…”


 

말 끝을 흐리며 샐쭉하니 웃는 당신이 사랑스럽다. 발갛게 상기된 볼, 그 아래 다시금 얕게 패인 볼우물에 시선을 두었다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눈으로 사진을 찍는 양. 기억 속에 그 모습을 오래도록 보관하기 위해.


 

“…당신은 요즘 어때요. 진행 중이던 일은 다 끝낸 거예요?”

“으음, 끝나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용케 시간을 냈군요.”

“저희 한 달이 넘도록 쉬지 않고 달렸거든요. 연일 야근에, 밤샘에… 체력이 달려도 어떻게든 버티고 버티다 보니 저도 직원들도 결국 한계를 맞은 거죠. 이제 이 프로젝트도 끝물이고, 다행히 잘 풀리고 있는 데다 나름 여유도 생겨서 하루쯤은 쉬어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교수님처럼 모두에게 무작정 휴가 통보를 내렸죠. 물론 유급 휴가로.”

 


…한계를 맞았다라. 이제야 당신의 야윈 낯에 서린 피곤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피곤했다면서… 아니, 지금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왜 집에서 푹 쉬지 않고 여기에 온 거예요?”

“그러게요. 분명히 집에서 내내 잠만 잘 예정이었는데…”


 

당신이 천천한 고갯짓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이듯, 그러나 내 귀에는 분명하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교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져서요.”

“…….”

“못 본 지 한 달은 넘어가고, 연락은 점점 뜸해지고…! 뭔가 분하고 속이 답답하더니 어느 순간 정말 못 참겠는 거예요.”

“…그랬군요…”


 

당신도, 나처럼…


 

“많이 피곤하지만 참고, 또 귀한 숙면도 포기하고 무작정 와버린 거긴 하지만…”

 


당신이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피곤함을 인식하지 못할 만치 눈부시게 밝게 웃어 보이며 빙글 돌아 나를 마주 바라본다. 그러고는 그대로 양팔을 높게 뻗어 제 뒤에 펼쳐져 있을 광경을 보라고 손짓했다. 그러니까… 어느새 다다른 산길. 붉게, 또 누르게 단풍 물이 든 채 빼곡하게 자리한 벚나무 무리 아래에 서서…


 

“교수님도 보고, 교수님이랑 이렇게 예쁘게 물든 단풍 구경도 하게 됐으니 오히려 잘 됐죠!”


 

당신에 의해 물든 따뜻한 색채가 시야에 들이닥쳤다. 붉고 누른 잎들은 제 색과 닮은 태양을 가리며 촘촘한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다. 멍하니 시선을 움직이며 그 광경을 응시하다 뒷걸음 해 응달을 벗어나 고개를 추켜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사계 중 가장 짙게 물든다는 푸른 하늘이 온통 들이찼다. 아, 입 새로 절로 나직한 탄성이 흘렀다. 생경한 광경의 연속은 나를 조금 붕 뜨게 했다. 금방이라도 저 광활한 하늘의 품에 안길 것처럼. 당신은 항상 내게 이토록 생경한 것을 선사한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도. 이렇게 또 당신이 손수 물들인 첫가을이 내게 내려앉는다.


다시금 여전히 밝게 웃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니 좀 전 눈이 시린 하늘의 색과 대비되는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이 마음속에서부터 치밀었다. 그리고 그것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시선이 부딪치면 당신은 결코 먼저 시선을 거두는 법이 없다. 나의 시선에 담긴 불가사의한 열기를 진작에 파악했을 텐데도. 집요하게 맞닿아 오는 시선은 쿵 쿵 가슴 안쪽에서 사방을 치는 박동을 더욱 거세어지게 했다. 그 낯선 파동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곧바로 당신의 얼굴에 걱정이 차올랐다.



“…교수님?”

“…….”

 

 

아. 이 이상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다급한 발짓으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이 치미는 욕망을 이행하기 위함이다. 주체 없이 손을 뻗어 당신의 볼을 쓰다듬는다. 맞닿은 살결에 서서히 색이 입혀지는 순간 나는 환희했다. 그래. 더 깊게 맞닿으면, 당신과 빈틈없이 맞물리면 나 또한…

 

당신을 끌어당겨 품에 가두었다. 당신은 역시나 순순히 갇혀주었고. …바보. 내 욕심이 어디까지인 줄도 모르고. 닿아도 닿고 싶어 하는 끝 모를 욕심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을 텐데. 그러나 굳이 알려주지도, 도로 놓아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당신의 어깨와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나는 소원한다.


물들고 싶다고. 저기 저 붉고 누르게 물든 단풍처럼, 시리도록 푸르게 물든 하늘처럼.

나 또한…

당신에게.

 

 

 

染 [물들 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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