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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락유연] 눈 안의 계절



  도서관에서 그를 만난 건 우연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유연은 집중해서 책을 고르고 있는 주기락을 발견했다. 깊게 모자를 눌러쓰고 빛나는 금발을 다 가려도 유연은 한번에 그가 주기락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저런 기럭지가 어디 흔한가. 그의 이름을 부를까 했지만 주위가 조용했기에 그녀도 살금살금 그의 뒤로 다가갔다. 목표까지 1m쯤 남았을까 갑자기 기락이 휙 돌아 그녀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입을 틀어막아 시선을 모으지 않았지만 입을 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기락은 눈을 크게 깜빡이며 토끼처럼 굳어있는 유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 있냐는 물음을 눈동자로 던졌지만 그녀는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시무룩해져 얄팍한 웃음만 띨 뿐이었다. 기락은 그 웃음을 좋아했지만 방금 놀란 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아 따라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입모양만 굴려 의미를 전달했다. 여긴 어쩐일이에요? 유연도 입술만 움직여 답했다. 책 빌리러요.


  당연한 답변이었다. 도서관에 올 이유가 그거 말고 더 있을까 싶어 기락은 자신이 바보같은 질문을 했나 싶었다. 하지만 유연도 따라 같은 질문을 했다. 기락 씨야 말로 여긴 웬일이에요? 기락은 들고있던 책을 가리키며 역시 같은 답변을 했다. 보고싶은 책이 있어서요!

  유연은 책장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분명 여기쯤 있다고 했는데, 번호를 적은 종이를 속으로 외우며 책을 천천히 골랐다. 키가 닿지 않는 곳을 향해 손을 뻗으니 어느새 옆에서 다른 손이 쭉 다가왔다. 기락이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하게 책을 내려다 주었다. 유연은 고맙다며 생긋 웃었고 기락도 짙은 안경 안에 반짝이는 눈을 살풋 접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책을 빌리러 갔다. 유연의 책도 기락이 대신 들어주었다. 책은 두껍고 무거웠다. 기락이 책을 가만 내려보더니 제목을 천천히 읽었다. 표지부터 아무런 흥미가 들지 않는 일과 관련된 책이었지만 속삭이는 목소리로 제목이 읊어지니 귀가 쫑긋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새 유행하는 ASMR이라도 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읽은 기락도 그다지 흥미있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거 다 읽을거에요?"
  "아뇨,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려고요."

  그럼 다행이네요, 두 권의 책을 대여 기계 앞에 놔둔 기락이 자신의 뒷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지갑을 찾는 듯했다. 유연은 재빨리 자신의 대여 카드를 꺼냈다. 거창한 돈이 드는 것도 아니지만 기락은 아니라며 한 손을 휘저었다. 유연은 그냥 무시하고 자신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위잉, 움직이는 소리가 나고 자신의 책을 들었다. 기락이 계속 뒷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기락의 책도 대여가 끝났다.

  "지갑 잃어버린 거예요?"

  유연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기락은 고개를 저으며 유연의 품에 들린 책들을 옮겨 들었다. 소곤소곤,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기에 기락은 몸을 살짝 숙여 유연의 귀에 속삭였다.

  "지갑은 잘 있는데 카드가 안 보여서요. ...매니저 형이 넣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바지였나봐요."

  속삭임에 귀가 간질거려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 붉어짐이 차가워진 날씨 탓이라 생각한 기락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그녀의 안위를 물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벗어나 드디어 온전한 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날씨가 아주 쌀쌀해졌죠?"
  "그러게요. 여름이 너무 긴 것 같았는데 또 불쑥 추위가 달려드네요."

  손에 들린 두꺼운 책 때문에 기락의 손이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유연은 자신이 들겠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바람보다 단호하게 그는 거절했다.

  "괜찮아요. 내가 들게요. 우리 몸 좀 녹이게 카페라도 들어갈까요?"
  "저는 당연히 좋지만, 기락씨 안 바빠요?"
 
  며칠 전 기락이 새로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힘내라는 응원문자를 끝으로 이후엔 답장도 기대 못할 정도로 바쁠 것 같았는데 오늘 도서관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기락은 웃으며 먼저 앞장섰다.

  "네, 괜찮아요! 촬영 전 마지막 유예기간이라고 할까요?"
  "유예기간이라니.."

  유연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옆에 서서 같이 걸었다. 기락이 보폭을 맞춰주었다.

  "폭풍전야가 더 맞는 말인가? 짧은 휴가가 주어졌거든요. 마침 허니칩 씨 한테 전화라도 해볼까 싶었는데 이곳에서 딱 만나게 될 줄 몰랐네요."
  "저도 그래요. 한동안 기락씨 못 볼 것 같았는데 이렇게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기락이 그녀의 말에 불쑥 얼굴을 내밀며 다시 한번 그녀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암만 변장이랍시고 두꺼운 안경에 모자를 내리썼어도 주기락은 주기락이었다. 다가온 얼굴에 근심을 만들게 했다는 생각에 어쩐지 미안해졌다. 유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아니라고 으레 나오는 말이라고 둘러댔다. 기락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마침 카페에 도착해 더는 추궁할 순 없었다.

  "제가 살게요! 허니칩 씨 먹고 싶은 거 골라요!"
  "그럼 감사히 먹을게요! 저는... 음..."

  빈자리가 많이 보였지만 짐이 무거웠기에 자리를 먼저 잡았다. 한쪽 구석에 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다. 책으로 자리 표시를 하고 카운터로 갔다. 점원이 서비스 미소를 띠면서도 힐끗 기락을 쳐다보았다. 손님들도 그의 쾌활한 목소리에 무언가 낌새를 느낀 것인지 웅성거림이 들렸다. 유연은 서둘러 주문을 하기로 했다. 평범한 아메리카노였다. 기락이 입술을 살짝 내밀며 물었다.

  "아메리카노?"
  "네, 기락...씨는 요?"

  이름을 조심스럽게 줄여 부르며 유연이 생긋 웃었다. 기락은 의외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새로 나운 맛도 있다는데 같이 안 먹어 볼래요?"
 
  기락이 손으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유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백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 다이어트 하고 있기도 해서."

  다이어트, 그 말에 기락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매번 SNS에서 다이어트로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보았기에 유연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기락의 표정은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렇지... 가을은 살찌는 계절이죠... 미리미리 관리 해야 하는데..."

  기락은 우는 목소리로 중얼중얼했다. 아마 곧 촬영도 있으니 음식 조절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SNS에서 매니저에게 울부짖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락은 이내 표정을 풀고 당당히 신메뉴 주문을 했다. 그때 가서 싸우더라도 지금은 먹고 싶은걸 고르기로 했다.

  "저도 다이어트 할거니까 저 다 못 먹게 같이 나눠 먹어줘야 해요?"

  해맑게 웃으며 카드를 내미는 모습에 유연은 심장이 철렁했다. 여러모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방금 자신이 다이어트한다고 아메리카노 시킨 걸 뻔히 알고서 같이 단 거 먹자니, 엄청난 유혹이었다. 대기 손님이 별로 없어 음료는 금방 나왔다. 기락이 주문한 메뉴는 커피에 치즈가 섞이고 그 위에 여러 토핑이 올려진 보기만 해도 살이 찌는 음식이었다. 어쩐지 토핑이 과하게 많아 보였다. 기락은 즐겁게 받아들고서 잡아놨던 자리로 갔다. 유연은 기락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락이 외투를 벗더니 유연에게 건네주었다.

  "덮어요. 의자가 차가워요."

  그의 배려에 유연은 감사히 그의 외투를 고이 펴서 무릎 위에 덮었다. 커피에 손을 올리자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악은 들어본 적 없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곡이었다. 몸이 녹아 노곤 해지는 유연의 표정을 물끄럼 바라보던 기락은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만나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만나게 되어 다행인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고요한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유연은 기락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기락은 그저 계속 웃고 있을 뿐이었다. 유연은 안경을 넘어오는 다정한 눈빛에 살짝 부끄러워졌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못해도 입꼬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기락이 보던 책이 떠올랐다.

  "기락 씨는 무슨 책 빌렸어요?"
  "드라마 주인공에 이입하려고 그 주인공이 좋아할 것 같은 책을 찾아보고 있었어요."
  "주인공이 좋아하는 책이요?"
  "네, 사람이 책을 쓰지만 책이 사람을 만들어 주기도 하잖아요. 주인공은 어떤 책을 읽어서 그런 감정선을 가지게 됐을까 하고...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에요."

  진지한 기락의 답변에 유연은 가슴 한쪽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일에 몰입하며 최선을 다해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 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유연은 기락이 건네주는 책을 받았다. 적당한 두께의 소설책이었다. 한 두 줄 읽어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워 앞뒤로 쓰인 소개말을 정독했다. 유연이 책을 찬찬히 넘겨보자 기락이 생긋 웃으면서 유연이 먹던 아메리카노를 가져갔다. 그녀가 눈치챈 건 이미 기락이 한 모금 마시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내려놓은 후였다.

  "으, 쓰다. 달달한 허니칩 씨,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하하, 제가 무슨 일 있다면 오히려 단 걸 많이 먹었겠죠. 스트레스엔 단 거, 오히려 기락씨야 말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대화는 서로를 향한 온기가 가득했다. 얼굴은 여전히 붉은 기가 맴돌았지만 추워서 생긴 것은 아니었다.

  "저야 다가올 스트레스에 미리 예방하듯 먹는 거죠. 별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기락이 웃었다. 유연이 빨대를 뜯어 기락이 주문한 커피를 마셨다. 생각만큼 달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묘하게 치즈와 커피가 뒤섞여 깊은 맛이 났다. 유연의 표정에서 맛을 느낀 기락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어때요? 괜찮죠?"
  "네, 맛있어요."
  "제가 맛집은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낸다니까요. 주문도 실패 잘 안 해요."
  "부럽다, 저는 요리를 잘 못 해서 그런지 남 요리에도 너그러워져서 크게 편식은 안 해지더라구요. 그래서 대부분 다 맛있어하는 편이에요."
  "응? 뭐야 그러면 그렇게 막 맛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네요?"

  기락이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렸다. 유연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빨대를 돌릴 때 보단 가벼운 저음이었다. 눈 앞에 연예인 주기락이 저런 표정을 하고 쳐다본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직접 체험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그저 웃음이 나고 편안했다. 아메리카노가 식는 줄도 모르고 그 후로 대화를 더 나눴다. 기락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설명해 주었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사실 솔직해지고 싶어 하지만 표현 방법을 몰라서 오히려 침묵하는 사람이죠. 남의 감정에 예민하다 보니까 티를 잘 안 낸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이 들어도 제대로 표현을 못 하죠."
  "복잡하네요. 하지만 공감은 가요."
  "그래요? 유연 씨는 이런 사람 답답하진 않아요?"
  "음, 제 생각엔... 표현하고 싶어 하는데 못하면 오히려 자신이 더 답답해하지 않을까요?"
  "그럼 유연 씨가 상대역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기락이 손을 뻗어 유연의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유연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기락은 그런 유연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은 기락의 행동에 당황스러워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머리를 건드리면서 손가락 끝이 유연의 볼에 닿았다. 그리고 떨어졌다. 별거 아닌 신체접촉이지만 내리깐 눈으로 올곧게 응시하는 기락의 행동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락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늘 솔직해. 어떻게 그렇게 감정을 다 내비칠 수 있는 거지? 지금도 그렇잖아. 나를 바라봐달라는 눈빛으로 빨갛게 붉힌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잖아. 나는 당신에게 그럴 수 없는데, 내가 좋아질 수 있어?"

  어투가 달랐다. 목소리의 톤도 달랐다. 맥락상 그가 드라마 속 대사를 내뱉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알게 되면 뭐? 유연은 대본을 몰랐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하하 웃으면서 넘어가고 싶어도, 방금의 대사와 정반대로 기락의 눈에 녹여진 감정이 그녀를 붙잡아 쉬이 깰 수도 없었다. 기락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유연은 숨을 흡, 참았다.

  "내가 당신과 함께한다면,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저..."
  "대답 안 해도 돼. 당신은 이미 얼굴에서 다 표가 나니까."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연은 눈을 꼭 감았다. 뿌리칠 수 없으니 외면이라도 해야 했다.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이 어느새 귓가를 매만지고 볼에 다가오고 끝내는 숨결, 이 흐름을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 몰랐다. 컷 사인이 들릴 리 없었다. 어렵게 꺼낸 목소리도 기락은 듣지 않고 다가왔다. 그러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떴더라면 속눈썹의 개수를 다 셀 수 있는 거리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볼을 달궜던 온기가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기락이 화를 낼 수도 없게 사랑스러운 웃음을 띠며 소리 내 웃었다.

  "기락씨!"

  겨우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려다가도 주위 손님이 신경 쓰여 다시 흡 하고 입을 막았다. 기락도 웃음소리를 낮췄다. 안경을  물었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당연히 놀랐죠! 갑자기 이렇게 다가오면 어떡해요!"
  "상대역에 대한 질문을 듣고 싶어서요. 방금, 어땠어요?"
  "...휴, 정말..."

  유연은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 부채질을 했다. 덮어놓은 기락의 외투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기락이 킥킥 웃으며 얼굴에 턱을 괴고 유연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것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유연은 아예 시선을 돌려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셨다. 이미 식었지만 왜 이리 달아오르는 지 모르겠다. 유연은 쓴맛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당황하지 않은 척 이미 다 들킨 행동을 숨기려 했다.

  "응? 어땠어요?"
  "... 답답하지 않았어요."
  "정말요?"
  "네."

  유연의 대답은 담백했다. 기락은 무언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다. 하지만 유연이 시선을 돌렸기에 통하진 않았다. 이번 침묵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유는 말 안 해줄 거에요?"
  "...다 보였어요."
  "네?"
  "기락 씨가 쳐다보는 눈에서 좋아한다는 감정이 다 느껴졌다구요."

  기락은 유연의 말에 놀랐다. 이어지는 대사와 비슷했다. '당신도 충분히 솔직해요. 나를 쳐다보는 눈이 말해주는걸.' 그녀가 다음 대사를 읽었을 리 없었다. 유연은 기락이 대답 없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당연히 연기로 한 거니까 그 감정이 전해져 온거겠죠. 네..."

  어물쩍 말이 끝맺음이 이상했다. 유연은 기락이 왜 갑자기 말이 사라진 줄 몰랐다. 방금까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장난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다시금 가늘어진 눈매로 유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니칩 씨, 하나 더 부탁해도 돼요?"
  "...먼저 말하고 하면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방금 기습적으로 다가온 기락을 의식하며 뱉은 말이었다.

  "저랑 같이 공원에 가지 않을래요?"

  *

  유연은 옷을 두껍게 여몄다. 자신이 원래 입고 온 옷은 허리춤에서 멈추는 점퍼였다. 기락이 건네준 외투도 기락에게는 허리춤에서 멈췄으나 유연에게는 길게 내려와 몸을 싸기엔 충분했다. 따라서 이번에는 자신의 외투로 다리를 덮고 기락의 옷을 걸쳤다. 기락이 안내한 공원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낙엽이 졌지만 바스락거리기에 이른 날이었다. 그래서 기락은 모자와 안경을 유연에게 건네주고 외투까지 겸사겸사 덮어주었다. 당연히 유연은 놀라 거절하려 했지만 기락이 모두 건내주고 잠시 어디 다녀오겠다며 또 훌쩍 떠나버려 다시 돌려줄 순 없었다. 기락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양손에 따뜻한 캔 음료가 들려 있었다. 유연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에요?"

  유연이 용건을 묻자 기락은 캔을 따주며 옆에 앉았다. 아무런 방해물 없이 누릴 수 있는 그의 얼굴과 표정은 다채로웠다. 아이돌이면서 배우인 그의 얼굴이 아직 완전히 익지 않은 가을처럼 여러 빛깔이 드섞인 것 같았다. 눈썹을 내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 드라마 배경이 여기거든요."
  "여기요?"
  "네. 허니칩 씨가 제 상대역 연습 좀 해줬으면 해서요."
  "제가요?"

  기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은 자기가 어떻게 하냐며 고개를 세게 도리질 쳤지만 기락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전 대사도 모른다구요!"
  "대사는 필요 없어요. 당신 표정이 다 말해주니까."

  기락은 방금 말했던 대사를 인용해 말했다. 유연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을의 색이 유연에게 점차 물들여지고 있었다. 기락은 웃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아까처럼 진지해진 눈으로 유연을 바라봤다. 아, 정말 말이라도 하고 들어가지. 액션! 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쩌면 자신도 순식간에 집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기락의 마음속에서만 들리던 큐 사인을 유연이 들었을 리는 없었다. 유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그 눈빛에 사로잡혀 버렸다.

  "지금도 그래. 당신처럼 솔직해지고 싶어."
  "..."

  대사를 모르니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기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빛이 섞인 눈동자가 반짝거림을 죽였다. 정말로,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딱딱해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어. 당신이 사랑스러운 건 사랑하는 이를 눈에 담아서야? 나를 보는 눈이 빛나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인 거야? 하지만, 당신은 늘 그렇게 빛나잖아. 그게 나를 향한다는 증거를 보여줘."

  분명 손으로 따뜻한 캔을 잡고 있는데 열이 오르는 건 얼굴이다. 이번에는 얼굴이 다가오지 않았다.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몰두한 표정은 유연에게 답을 요구했다. 유연은 어떻게 답해야 할 지 몰랐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기로 했다. 그와 자주 하던 게임처럼 마음 가는 대로 입을 놀렸다.

  "제가 증거를 내민다고 해서 당신이 받아들일까요?"
  "...."
  "이미 솔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거기에 계속 의문을 가지고 되풀이해 물어본다면... 제가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당신은 의심할 거예요."

  입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이런 대사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던 걸까? 자연스러운 대꾸에 유연 자신도 놀랐다. 기락은 연기일지 몰라도 유연은 솔직하게 자신의 답변을 한 것이라 어색하지도 않았다. 기락의 연기는 끝나지 않았다.

  "맞아. 나는 그럴 거야. 늘 확인받고 싶어 하지. 그런 내가 질리나?"
  "...아뇨.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나는 존중할 거에요. 지치게 되는 건 제 쪽일 테니까, 당신은 상처받지 않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비로소 증명 되겠죠. 당신도 나를 사랑했는지."

  원래 대사와 달랐다.

  "당신은 무조건 상처받게 되는 건가?"
  "그렇겠죠. 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연기로 내뱉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머뭇거리게 되었다. 바람이 불었다. 유연을 감싼 기락의 외투 소매가 흔들렸다. 유연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저 눈빛을 계속 바라보다 정말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럼, 당신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락이 유연의 손을 잡았다. 어투가 원래의 기락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그대로였다. 유연은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은 아닐거란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순간 현실로, 그가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유연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여태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 생각난 대로 내뱉었던 것이 그 이유다. 기락은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허니칩 씨."

  기락이 손을 뻗어 유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카페에서 연기와는 달랐다.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유연은 머리를 푹 숙이며 붙잡힌 손을 움직이지 못한 채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애썼다. 제때 바람이 불어주어 열은 식어갔지만 심장 뛰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기락이 유연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단풍잎을 가져왔다. 그리고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연은 미간에 주름이 생길 것처럼 눈을 꽉 감았다.

  "오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유연이 우는 소리로 말했다. 긴장한 마음이 다 가시기도 전이었다. 치명적이고 또 치명적인 사람이다. 기락은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가을이라도 타나 봐요."
  "가을 타면 센치해지고 우울해지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음, 그것도 그렇지만, 내 가을은 여기에 물든 것 같아서."

  기락이 손가락으로 유연의 볼을 찔렀다. 옅은 초록색이 남아있는 잎보다 붉은 건 사실이었다. 유연은 더더욱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팍 숙이고 있었다.

  "정말...! 저 놀리는 거죠!"
 
  겨우 소리내 외쳤다. 기락은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유연은 기락을 흘겨보았으나 악의가 섞이진 않았다. 기락이 벤치에 가지런히 올려둔 책을 들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이거 하려고 여기에 오자고 한 거였어요?"
  "아쉬워요?"
  "음..."

  유연은 어깨에 걸친 기락이의 외투를 벗어 건네주었다. 기락이 손이 없어서 유연이 직접 탈탈 털어 덮어주었다.

  "아뇨. 아직 가을이 완전히 물들지 않았으니까, 다음에 또 오면 될 것 같아요."
  "네, 그때도 저랑 같이 와요."

  기락이 무릎을 접어 매너 좋게 외투를 받아내고 또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유연은 아직 따뜻한 캔에 따스함을 훔쳐 와 이따금 기락의 손에 건네주었다. 맞잡아진 손이 이미 따스했지만 기락은 사양하지 않고 계속 웃음 띤 얼굴로 받았다.



*



  가을이 더 물들었다.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 기간 동안 둘 다 정신없이 바빴다. 유연은 발췌해 온 자료로 보고서도 작성하고 기획도 올리고 깨지기도 했다. 기락은 유연의 도움으로 안정적으로 연기를 소화해 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이따금 창문 밖에 하늘과 대비되는 색상을 보고 있으면 서로가 생각나기도 했다. 봄과 가을이 짧아진다 했지만 일주일 만에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게 순식간에 겨울을 맞을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일을 적당히 마무리 지은 유연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핸드폰이 깜박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문자메세지였다.

  [허니칩 씨~ 바빠요?]

  답장을 보낼까 싶었지만 부재중도 몇 통 와있길래 그녀는 전화를 걸기로 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다가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기락은 아닌 듯했다. 유연은 기억 속에서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매니저님?]
  [아, 네! 지금 기락이가 촬영 중이라서요.]
  [아아.. 기락씨가 전화가 왔었길래 걸어봤어요. 바쁘면 끊을게요.]
  [아뇨 아뇨, 기락이가 당신에게 부탁한 일이 있어요.]
  [저에게요?]

  유연은 기락과 함께 갔던 공원에 도착했다. 의외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날 기락이 데려다줄 때 유독 짧게 느껴진 게 마냥 착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공원은 전에 왔을 때 보다 색채가 더 짙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미리 매니저가 말을 해뒀던지 유연은 별 어려움 없이 촬여 현장으로 들어갔다. 마침 기락과 상대 배우가 연기하던 중이었다.

  "지금도 그래. 당신처럼 솔직해지고 싶어."

  익숙한 말이었다. 자신과 연습하던 모습 그대로 진지하게 상대방을 바라보는 기락이 있었다. 화면으로 비치는 배우 주기락의 모습. 그런 그의 연기에 상대역이 됐었다는 사실에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어. 당신이 사랑스러운 건 사랑하는 이를 눈에 담아서야? 나를 보는 눈이 빛나는 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인 거야? 하지만, 당신은 늘 그렇게 빛나잖아. 그게 나를 향한다는 증거를 보여줘."

  같은 대사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과 제삼자의 입장으로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말했을 때 보다 격앙되고 날 선 모습이었다. 상대 배우도 움츠러들었다.

  "제가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당신은 의심할 거예요."

  유연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에게 무슨 마법이라도 있었던 걸까, 혹시 대사가 익숙했던 건 예지로 미리 이 순간을 봐 뒀던 게 아닐까?

  "맞아. 나는 그럴 거야. 늘 확인받고 싶어 하지. 그런 내가 질리나?"
  "아뇨. 어쩌면 후에는 질릴지도 모르죠. 그래도 당신은 손해 볼 것 없어요."

  유연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런 상황을 본 기억은 없다. 자신이 말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대사를 말하고 있는 걸까. 그 해답은 옆에서 스태프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말해주었다.

  "이 부분, 대사 전부 기락씨가 바꾼 거라며?"
  "응. 원래 대사에는 감정이입이 안된다고 그랬나 봐. 그래서 감독님이 그럼 네가 원하는 대사 가지고와봐라~ 해서 정말 짠하고 가져온 거래."
 
  유연은 멈칫했다. 대사가 필요 없다고 말했던 것도 설마 이런 이유였나 싶었다. 그때 문득, 기락과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거리가 제법 되었고 아직 필름이 돌아가고 있어서 유연은 착각이겠거니 했다. 기락은 한번 숨을 멈췄다가 답했다.

  "그러면.. 그때 가서 후회하면 나는 늦은 건가?"
  "후회할 거라 생각해요?"
  "..."
  "그러면 지금 절 잡아요. 당신이 보는 반짝거리는 나는, 당신 눈 안에 있는 거니까."
 
  상대 배우가 까치발을 들어 기락에게 키스하는 시늉을 했다.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표현되어 정말 입이 맞닿지 않았지만 유연은 순간 얼굴을 홱 돌렸다. 마침 그때 매니저가 유연을 찾으러 촬영현장에 들어왔다.

  "여기 있었어요? 응? 얼굴이 왜 이리 붉어요? 감기라도 걸렸어요?"
  "아, 아니에요!"
  "가을이긴 하지만 아침저녁으론 거의 겨울 같다구요. 몸조심해요. 부탁한 건 이거, 당신 이름으로 책을 빌린 거라 연체되면 곤란하다고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구요."

  매니저가 건네준 건 기락이 빌렸던 책이었다. 매니저가 직접 책을 반납해도 된다고 했지만 기락이 꼭 그녀가 대신해줬으면 좋겠다며 당부했다고 한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며 머리를 긁적이는 매니저에게 유연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자신도 반납해야 할 책을 가져왔다. 뒤에서 컷 사인이 들리자 유연은 이만 가보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기락을 보고 가지 않겠냐며 매니저가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붉어진 얼굴만 보여줬다간 안 그래도 바쁜 생각에 더 귀찮게 할지도 몰랐다. 상냥한 그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자신에 책보다 그리 묵직하지도 않았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멀지도 않았다. 

  유연이 촬영장을 벗어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문자가 날아왔다.

  [허니칩 씨, 제 대답 들었어요?]

  대답? 유연은 뜻을 알지 못했다.

  [대답이요?]
  [아까 촬영장에서, 키스하고 나서요.]

  키스. 실제는 아니지만 어쩐지 썩 달가워 보이는 단어는 아니었다.

  [아뇨. 못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답변이 딱딱해졌다. 기락의 답장은 없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난 것인지 아니면 촬영에 들어가야 해서 끊긴 것지 알 길은 없었다. 유연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낙엽을 밟는 느낌이 좋아서 책이 덜 무거웠더라면 산책을 했을지도 몰랐다. 도서관에 갔다가 다시 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는 땀이 옅게 맺혀있었다. 여느 직장인처럼 운동 부족이라 자책하며 책을 반납하기 위해 꺼내 올렸다. 그러다 손에 힘이 풀려 그만 책이 와르르 쏟아졌다. 저질 체력에 땀이 눈에서 날 것 같았다. 자신의 실수로 시선이 모인 부끄러움까지 더해 서둘러 책을 주우려 했다. 그때 기락이 건네준 책 사이에 꽂혀있던 단풍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응?"

  책갈피인가 싶었다. 책에 단풍을 꽂아 보관하는 게 낭만적이기도 했지만 이 상태로 책을 반납할 수는 없어서 난감했다. 유연은 단풍을 가만히 보다가 단풍이 보관한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누군가의 독백처럼 보이는 문장이었다.

  <당신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만나지 않으려 외면했지. 그 말을 듣자 당신이 말했었어. 그래도 만났잖아요? 맞아, 우리는 만났어. 그렇다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 나는 당신을 만난 후부터 그것을 이루어줄 수 있을까 하고 늘 고민해 왔어. 설사 이루어질 수 없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라도 당신을 붙잡고 싶은데, 나는 당신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만약 당신이 나를 떠나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는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우리의 만남은 이 가을처럼 짧은 게 아닐까?>

  기락은 주인공이 읽을 것 같은 책으로 골랐다고 했다. 책은 끝까지 다 읽은 흔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왜 굳이 이 문장에 단풍을 꽂았을까. 유연은 페이지를 넘겨 내용을 마저 읽었다. 상대방의 답변이었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너무 솔직한 것 같아요. 지금 그 말, 절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죠? 당신 눈빛이 다 말해주고 있어. 떠나간다는 가정을 말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다구요. 아무도 당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거에요. 당신은 이렇게 따스하게 사람을 보고 있는데. 우리의 만남이 가을처럼 짧다구요? 나의 가을은 여기, 내 눈 안에 있어요. 가을이 짧아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에게서 나의 겨울, 봄, 여름을 모두 느낄 테니까.>

  문장이 마음을 건드렸다. 어렴풋이 촬영장에서 또렷하게 외치던 말들이, 마주쳤던 시선과 함께 전달되는 것 같았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고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연은 단풍을 꺼내고 빌렸던 책을 모두 반납했다. 도서관에 나와 핸드폰을 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정하고, 강한 미성의 목소리.

  [제가 당신 눈 안에 있어도 될까요? 유연 씨.]

  기락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귀 옆에서 재생되었다. 꽂았던 단풍은 유연 머리 위에 떨어졌던 그 단풍이었다. 말라서 바스러질 것 같았지만 형태는 유지되었다. 그녀는 촬영장으로 숨이 터질 듯 뜀박질을 했다.


  촬영은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기락은 오지 않는 답장에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다음 촬영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며칠 새 잠도 못 자고 촬영에 임한 터라 매니저는 그가 곧바로 잠들 줄 알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하지만 기락은 오히려 반짝거리는 눈으로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책을 읽었을까, 메시지는 확인했을까, 자신이 전하던 감정들은 제대로 전해졌을까. 떨리는 마음이 아메리카노를 마신 그날 밤 저녁처럼 두근거렸다.
  이렇게 불쑥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상상 속에 이상적으로 생각한 고백들이 떠돌아다녔다. 어떤 식으로 전달하는 게 좋았을까, 유연 씨는 어떤 식으로 하면 내 마음을 받아줬을까?
  그가 대본을 얼굴에 덮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 이 대본을 받았을 때 어쩐지 끌리는 게 있었다. 그래서 수락을 했지만 읽다 보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연기하게 될 사람이지만 기락은 답답하다고 느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연은 이 마음에 공감했다. 그래서 한번 연기를 해봤다. 자신이 공감할 수 있을까 싶어서. 유연이 기락의 눈빛을 읽으며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 또한 주인공처럼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금방 들켜버릴 감정을 서툴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었음을.
  복잡해진 심경을 신음으로 토로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전화가 울렸다. 유연이었다. 그가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끊기기 직전에 조심스럽게 받았다.

  "여보세요."
  -기락 씨 지금 어디예요?
  "저요? 지금 대기실인데."
  -대기실? 그 천막으로 쳐진 곳이요?

  목소리가 핸드폰 말고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기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막 문을 걷었다. 바로 앞에 유연이 서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이 숨을 달래며 기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락은 놀란 눈으로 유연을 마주 보았다. 유연이 기락의 팔을 붙잡았다.

  "저, 며칠 동안 정말 바빴어요."
  "네?"
 
  유연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날도 사실 엄청 바쁜 날이었어요. 그래도 기락 씨를 만난 게 좋아서 더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

  "만나서 다행이라는 말도 으레 하는 말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기락씨 촬영 들어가면 한동안 못 볼 것 같아서 만나고 싶어서 했던 말이에요."

  기락은 말을 끊지도 재촉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갑자기 아메리카노를 시킨 건 주위 사람들 시선이 걱정돼서 그랬어요. 무슨 일 있냐고 오히려 절 걱정해 줘서 정말 기뻤어요."

  유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기락은 손을 뻗어 유연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려 주었다. 처음 연기에 돌입하던 그때 처럼 다정한 미소를 품고 설핏 체온이 닿았다 떨어졌다.

  "저는, 저는 그 여자주인공만큼 솔직하지 못해요. 오히려 저는 그 남자주인공처럼 외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감정에 솔직해지자고 두 사람을 감동하게 한 건 모두 상대방의 대사였다. 언제나 감정에 솔직하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저도 기락 씨를... 저의 계절로 여겨도 될까요?"

  유연이 고개를 들었다. 물든 단풍처럼 익어버린 얼굴이다. 곱게 색을 띤 얼굴이 사뭇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기락은 쓸어내리던 손을 내려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떨림이 느껴졌다. 어디서 부터 시작되는지 알 것 같은 떨림이다. 그대로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았다. 유연의 눈이 다시 질끈 감겼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여지고 있었다.

  "네. 당연하죠."
  "...."
  "좋아해요. 유연 씨."

  기락이 그녀의 열기를 느끼며 살짝 멀어졌다. 그러다 그녀가 눈을 뜬 사이에 다시 다가와 입을 맞췄다. 유연은 그의 속눈썹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 눈을 꼭 감았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어쩌면 그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정상적 사고가 돌아갔으면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그를 밀어낼 뻔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만큼 탁 트인 마음을 전하기는 힘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하늘처럼 푸른색을 띠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단풍처럼 붉게 물든 자신의 얼굴이 순간의 설렘으로 넘겨 짓지 않았을 텐데. 하물며 그의 머리카락 색 처럼 은행을 닮았다면....
 
  머리 위로 다시 단풍이 떨어졌다. 아무리 붉게 물들었어도, 지금 그녀보다는 한참을 못미칠 것이다. 기락은 불어넣은 숨을 다시 맑은 공기로 바꾸고 여러 번 그렇게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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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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