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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허묵X유연 - 이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해당 게시글은 스포일러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쌀쌀한 가을비가 내렸다. 유연은 비를 피할 생각도 우산을 살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어차피 손에 우산이 들려있다 하더라도 그걸 펼칠 생각조차 못했으리라.

발끝에 채이는 낙옆은 물을 머금고 늘어졌다. 덩달아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유연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벌써 집 앞까지 도달했다. 옆집에선 여전히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연은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려다 말고 옆집을 응시했다. 곧 물기가 뚝 뚝 떨어지는 창백한 손을, 텅 비었을 옆집 현관문에 올렸다. 고동을 느끼려는 듯이.


지금, 어디에 있나요?


소리가 되지 못한 물음은 유연의 목구멍에 틀어막혀 사라지고 만다. 계절이 바뀌었다.

허묵이 그녀에게서 사라진 동안.

처음엔 그저 연구에 매진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전화는 커녕 문자조차 읽지 않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연구소에서도 그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가 자주 들리던 꽃집에서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가 자주 찾던 영화관에서도.. 재즈 바에서도. 그들은 허묵의 이름만을 알 뿐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알지 못한다. 하나 생각해보면 유연 자신 역시 그러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좋아하는 맛을 모른다는 걸 떠올렸고, 그 후로는 그가 좋아하는 색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허묵 교수님이요?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자기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여하튼 자기에게 간섭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분께 무슨 말이든 다 내뱉게 되죠. 제 비밀과 함께 그저 스쳐지나갈 사람이니까요.'


뚝, 뚝. 유연의 다갈색 머리카락 끝에서 흐르는 물방울은 어느새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자국은 그녀가 그 자리에 얼마나 못박힌 듯 서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유연은 결국 힘없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또 하루가 끝났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채 잠에 들고 새벽같이 일어난 유연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핑 도는 두통을 느꼈다.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이 느껴졌다. 거기에.. 아랫배를 들쑤시는 고통까지. 늘 불행은 함께 오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일로 쉴 수는 없었다. 유연은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출근준비를 했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교수님 뿐이었는데.”


빈 자리는 상당한 정도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인생에 이렇게 큰 지분을 가지게 되었는지. 사소한 문자, 전화, 바로 옆집이라는 이유로 가졌던 잦은 외식과 산책, 기타 등등. 그것들이 유연의 빈틈을 빠짐없이 채웠다. 허묵이란 잎파리가 지고 생겨난 틈새엔 가을 바람만 송송 불어 쌀쌀하기만 했다.

유연은 씻고 나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허묵의 메신저로 이동한다. 그의 답신은 8월 20일에 멈춰져 있었다. 그 후로는 전부 유연이 그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교수님, 바쁘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꼭 의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교수님 말고는 생각이 안 나서..

교수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전 항상 여기서 기다릴게요.


현재, 9월 23일. 계절이 바뀌었다.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정말 허묵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겠지, 그는 모두에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 유연은 무릎을 웅크리고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 나 역시 그러한 존재인가? 이런 행동이 되려 그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걸까?

질끈, 머리와 아랫배에 아려오는 통증에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러고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저 채비를 했다.


“뭐하는거야. 새 프로그램 준비하는 것도 벅차잖아.”


정신차리자. 교수님은, 올 거야. 분명 돌아와. 그렇게 믿는거야. 난 그를 믿어. 그의 한결같은 온도를, 그 마음을.

유연은 감기와 생리통, 과로가 겹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때마침 전화가 왔다. 혹시나 하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유영이었다. 유연은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지금 어디세요?

-이제 나가는 길이에요. 어제 수정한 부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순조로워요. 초장에 대표님이 힘써주셔서 이제는 다 알아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며칠째 철야로 일하셔서 피곤하실 텐데.. 좀 괜찮으세요? 어제도 가장 늦게, 새벽이나 되어서 퇴근하셨잖아요.

-괜찮고 말구요. 난 걱정하지 말아요. 다른 전할 사항은 없어요?

-아.. 대표님이 괜찮으시다면 그런거겠지만 -


그 순간 유연의 몸이 한 차례 흔들렸다. 지끈, 눈 앞이 하얗게 점멸한다. 그대로 힘이 빠져 휴대폰을 손에서 놓쳤다. 하지만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허묵이 유연의 허리를 붙잡고 떨어지는 휴대폰을 받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제 품에 유연을 안고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대표님? 괜찮으세요?

-전화 바꿨어요. 나 허묵입니다.

-..허교수님?


유연이 멍한 얼굴로 허묵을 바라봤다. 허묵은 잔잔히 유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이마에 손가락이 스쳤다. 식은땀과 열기. 순식간에 부드러웠던 입매와 손길이 굳었다. 허묵의 손길이 멈추자 보채듯 유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나비가 비맞은 몸으로 날개짓하듯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다갈색 눈동자는 상황파악도 못한 채 멍하게 허묵을 바라만 봤다.


“..교수님?”

“쉬이.. 괜찮아요. 나에게 기대요.. 아, 오늘 유대표는 출근 못합니다.”


허묵은 명랑한 목소리로 못박았다. 유연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교수님이란 것도 잊은 채 힘겹게 손을 들어 허묵의 손에 들린 전화를 빼앗으려 했으나 가만히 있을 허묵이 아니었다. 그는 뻗은 유연의 손을 잡아 끌어 제 품에 더욱 가두었다. 완강하게. 허묵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옅은 사향이 유연을 안정시키면,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허묵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어찌 됐든 허묵이지 않은가.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셔츠자락을 꼼지락거리며 잡았다. 손가락 아래로 탄탄한 근육이 만져졌다. 활자 속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과학자의 몸 치고는 꽤 투박하고 노련한 것이었다. 운동을 하는 것일까?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아.. 안팀장님도 지금까지 고생하셨다고 오늘은 저희끼리 커버해보자고 하시네요. 유대표님, 한참 전부터 일만 죽어라 하셨어요. 쉬엄쉬엄 하시라고 해도 듣지도 않으시고. 안 그래도 어제도 상태가 너무 안 좋으셔서 그 말 하려고 전화드린거였는데, 잘 됐네요!


유연은 고개를 들어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이미 통화를 끝낸 허묵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고선 열려있던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성인 여성의 몸무게였다. 그리 쉽게 들 수 있을 무게가 아닌데도.

..분명 묻고 싶은 것들 투성인데.

막상 허묵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런 건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허묵은 유연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혔다.


"잠시 외투만 벗겨줄게요. 괜찮아요?"


그 정도는 스스로 해도 되는데. 거부하지는 않았다. 유연은 상기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허묵은 조심스럽게 침대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트렌치코트의 허리끈을 풀기 시작했다. 묘한 텐션이 흘렀다. 허묵의 온기가 어깨의  얇은 블라우스 위로 스쳤다. 곧 살짝 거칠어진 유연의 숨소리와 가을비가 부슬거리는 소리가 간극을 매운다.


"착하네요. 유연씨, 잠시 실례할게요."

"흣.."


허묵은 유연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일순간 유연의 호흡이 멈췄다. 유연은 떨리는 눈으로 허묵의 결코 웃는 법이 없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본다.

허묵의 심연 속엔 유연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유연의 눈동자에도 역시, 허묵이라는 단 한사람만이 알맞게 들어찼다. 유연은 그것에 충만감을 느꼈고, 허묵은 만족감을 느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허묵이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그게 제 일인걸요."


허묵이었다면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둘은 서로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그 근간이 달랐다. 언젠가 허묵이 이야기 해 주었던 나비를 병 속에 가두려던 화가에게 그녀는 말했다. '구속하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왜 아니죠? 좋아서 곁에 두고 싶은 건데요.' '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정말로 사랑한다면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줘야죠.'


"교수님을 찾아나설 수록 교수님은 마치.. 나비처럼 훌쩍 날아가 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멈췄어요. 그리고 기다렸죠."


유연이 살짝 뜸을 들이다 말했다.


"교수님을 믿었으니까."


한숨과도 같은 달콤한 속삭임.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맞닿았던 허묵의 이마가 멀어졌다. 그는 곧 유연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기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면 깔끔히 접어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건 처음으로 스스로에게까지 거짓말을 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열은 심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체온계를 가져올게요. 기침이나 콧물은 없어요?"


유연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도리질하며 허묵의 소매깃을 붙잡았다.


"저, 걱정할 수준은 아니에요. 병원이라면 어제 점심시간에 짬내서 다녀왔어요. 직원들한테 옮기면 안 되니까."


허묵의 눈이 짐짓 가늘어지려 할 때 즈음 유연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감기 때문에 아픈 것도 아니고, 약도 먹었어요. 평소에 저혈압이 있어서.. 그래서 아까 잠깐 현기증이 느껴졌던 것 뿐이고. 전 그냥 조금 피곤한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교수님만 같이 있어주시면.."


유연이 말끝을 흐렸다. 허묵은 잠시 침묵하며 유연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봤다. 그 후 창가에 올려놓은 치자나무에게도 시선을 한 번 주었다. 치치, 지난 봄에 허묵이 유연에게 선물한 치자나무. 치치는 이미 수줍게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열매를 맺었다. 허묵의 긴 손가락이 살풋, 치자열매처럼 붉게 물든 유연의 볼을 사락- 스쳤다.


"내가 저 치자나무를 가지고 온 날,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나요?"


유연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할 말이 없었다. 허묵은 그런 유연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그 부드러운 볼을 쓸었다. 그 자리를 따라 붉은 기가 퍼져나갔다. 신기했다.

색깔이 있다.

그 색깔이 제 손끝에 따라 퍼진다. 마치 저 치자꽃처럼.. 이토록 애틋할 수가 있을까.


"미안해요. 책망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걱정해주시는거 알아요. 하지만 난 줄곧 뒤로 가는 길에 서 있었어요. 거기서 벗어나려면 두 배로 뛰어야 했죠."

"그때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줬더라면 붉은 여왕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네, 분명.

그리 대답하지 못하고, 유연은 입만 달싹였다.


"저도 교수님을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 문제였죠. 그냥 언젠가 부터 교수님이.."


제 일상에서 너무 커져 버려서.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때, 교수님께 상처입혔던 사람들. 연구 때문에 쫓겼던 일이요. 그거랑 관련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연구로 바빠서 연락이 안 됐던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요. 설명하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냥, 여기에 있어줘요."


유연은 스스로도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평소보다 더 거리낌없이 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쩌면 절박하기 까지 한 것이었다. 지금 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는걸까. 허묵은 잔잔히 유연을 바라봤다. 난 당신이 그 말의 의미를 알고, 내게 말해주길 바라.


"만약 쫓기는 상황이 맞다면,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 바로 옆집에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있어줘요.”

"..못이기겠네요."


허묵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진정 바라는게 이런 것이라면 - 애초에, '이러한 것'을 목적으로 유연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매우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몇번이든 괜찮아요."

"날 왜, 믿었나요?"


허묵이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이 기억하는 허묵이란 존재는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는 가짜다. 모든 행동은 당신의 신임을 얻기 위함이었다. 허묵이란 존재가 대체 너의 무엇이란 말인가?


"난 아무런 말도 없이 잠적하고, 한 달 만에 당신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간의 수상한 행적들에 대해서 그 무엇도 설명하지 않고 있죠. 비단 오늘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나를 믿나요?"

"허묵이잖아요."


유연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교수님은, 허묵이니까."

"..내가 허묵이라서."


결국, 허묵이 허묵이라서. 허묵이란 사람의 몸에 배인 사소한 배려, 그리고 위로, 격려, 그 따스함을 믿으니까. 알게 된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도 오래 알아왔던 것처럼 편안한 사람. 늘 같은 온도로 다정하게 미소지어준 사람. 그런 사람이 수상하다고 한들, 그동안 제게 보여주었던 온기가 모두 거짓일 리가 없으니까.

세상의 전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연은 줄곧 일만 하며 살아왔다. 일에 몰두하면 그 순간만큼은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고 만들 기회도 함께 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 순간에 허묵이 마치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온도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에 떨어졌는데, 그 끝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착지하게 된 그 끝엔 허묵이 서 있었다. 유연은 묻는다.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누구냐고.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만 유연을 더욱 깊숙한 곳으로 이끌 뿐이었다.


"전 교수님을 믿어요."


유연은 베시시 미소지었다. 허묵은 순간 멍하게 그 미소를 바라봤다. 그 어느 때 보다 더 환하고 밝고, 다채로운 미소. 분홍빛을 띠는 여인의 입술이란 것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당신의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나요?"

"네?"

"나는 평생 나비는 될 수 없는 몸이에요."


혀묵은 자조하듯 눈을 내리뜨며 미소지었다. 유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묵을 바라봤다. 허묵은 그런 유연을 보며 머릿속에서 이미 수십번이고 수백번을 더 상상했던 자신의 이상를 그렸다.

유연이라는 이름의 나비를 유리병에 가두고, 날개를 찢어 영영 날아오를 수 없게 만들어버리리라고. 그럼 그 공간은 너를 위한 신전이 될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너를 숭배하리라. 그러기 위해선 유리병 속에 거미줄을 치고, 당신이 걸려들기를 기다려야겠지. 제 몸을 꽁꽁 묶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그저 이 검은 욕망을 유연이 알지 못하길 바랐다.

영원히 모르기를. 그게 너에게 있어 가장 편한 길이 될 테니까.


"누워 있어요. 따뜻한 차라도 가져올테니."


유연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 허묵의 넓다란 어깨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문제가 풀린 것 같았다. 허묵이 지금 유연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그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 그건 꽤나 기분좋은 일이었다.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일까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교수님.


하지만 당신에게 부담이 되고 싶진 않아요. 본능적으로 당신은 나비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나비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죠. 그래도 그 때 까지만, 딱 그 때 까지만.. 긴장이 풀리자 갑작스레 수마가 몰려왔다. 그 흐름을 어길 만큼의 정신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연은 아주 잠시만 눈을 감았다 뜨기로 했다.


"..유연씨?"


어느세 곤히 잠들어 있는 유연이었다. 허묵은 조심스럽게 약과 생강차가 들어있는 나무 트레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자세히보니, 아랫배에 손을 얹고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 허묵은 조심스레 유연의 손을 감싸 유연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블라우스의 목깃 사이로 비치는 하얀 살결과 촉촉한 입술. 허묵은 살면서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이성적인 감정을 느낀 적 없었다. 그에게 비춰지는 세상은 온통 흑백이었다. 사람의 삶에서 색의 자극은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허묵에게 있어 유일하게 색을 가진 유연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매우 강렬한 자극이었다.


"..이 색을 살구색, 이 색을 분홍색이라고 부르는 거겠죠."


허묵은 떨리는 손가락을 유연의 뺨 위에 얹었다. 분홍빛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본다. 부드러웠다.


"당신은 내게 항상 새로운 세상만을 보여주네요."


그저 문 하나만 열었을 뿐인데.


"당신 앞에서 난 마치 갓 태어난 짐승이 되어 걸음마를 배우는 것 같아요. 본능과 충동을 조절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말죠."


그리고 그럴 생각도 없지.

허묵은 흐드러진 유연의 모카색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입맞췄다. 마치 성직자가 예수의 발에 입맞추듯, 경건하게.


"결국, 또 다시 난 잘못된 선택을 해 버렸어요.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색깔이라는게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차라리 영영 모르고 살았더라면 이토록 강렬하게 원하게 될 일도 없었으련만. 허묵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핫팩을 찾아 유연의 아랫배에 살며시 올려주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유연의 작은 입술 사이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님."


유연의 손도 허묵의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네, 유연."

"가지 말아요."

"..나 여기 있어요. 아무데도 가지 않아."


허묵은 유연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조용히 유연의 모든 것을 눈에 새겼다. 언제라도 눈을 감으면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뇌 속 깊은 곳에, 기억하는 것이 아닌 새겨넣는 작업이었다. 그건 몇시간을 해도 질리지 않을 것이었다.


"당신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죠. 맞아요.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런 걸로 포장하기엔 너무 뒤틀렸거든. 하지만 사랑에는 늘 어느 정도의 광기를 포함하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유연을 바라보던 허묵은 그녀는 듣지 못할 말들을 계속해서 속삭였다.


"난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이기적이기도 하고. 내 실체는 당신이 생각하는 허묵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요. 이걸 당신이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해요."


영영 모를 테지만.


"오늘은 계절의 분기예요. 오늘을 기점으로 이제 밤은 더욱 길어지겠죠. 하지만 오늘밤 만큼 길진 않을 거예요."


허묵은 창 밖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부디 좋은 꿈 꿔요, 유연."


허묵은 조심스럽게 유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날 유연은 꿈 속에서도 허묵을 만났다. 그 꿈은 너무나도 달아서, 심장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그런 꿈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유연은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 끝에 아침햇살이 내리쬔다. 어디선가 새가 짹짹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비도 그쳤는지, 보송보송 마른 낙옆이 창가에서 떨어져 내렸다.


"으응.."


오랜만에 아주 깊게 잠들었다. 유연은 기분좋은 웃음을 흘리며 눈을 비비다, 순간 등줄기가 쎄해져서는 얼굴을 싸악 굳혔다.


"..교수님."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허묵은 다시 사라졌다. 낙옆이 떨어지고 앙상히 가지가 남은 단풍나무처럼 유연은 홀로 남았다. 어쩌면 모두 꿈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유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찾아 탁자로 손을 뻗었다. 휴대폰 대신 원목 트레이와 하얀 면보가 만져졌다. 면보를 걷어내자 정갈하게 차려진 흰 죽그릇과 약이 올려져 있었다. 눈을 껌뻑이며 상황파악을 하려 할 때 즈음 마침 전화가 울렸다. 안팀장이겠거니 싶어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유연 제작사의 유연 대표입니다.

-일어났어요?

-…교수님?


유연은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허묵이 맞았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정말 교수님이세요?

-그럼 누구겠어요?


허묵의 웃음기어린 목소리에 유연은 정신을 차렸다. 꿈이 아니었구나.


-지, 지금 어디세요?

-연구실로 가는 길이에요. 깨는거 보고 가고 싶었는데 조교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와서.

-..잠은 제대로 주무셨어요?

-신경쓰지 않아요 괜찮아요. 난 평소에도 잠이 별로 없어요.


그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항상 민폐만 끼치네요.

-흐음, 난 당신이 좀 더 날 의지해줬으면 좋겠는데요. 그건 민폐가 아니라 내 기쁨이기도 해요.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건지. 유연은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죽도 교수님이 차려놓으신 거예요?


죽그릇을 만져보자 놀랍게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대체 얼마동안 잠도 안 자고 곁에 있어줬던 걸까.


-맛은 장담하기 힘들어요. 요리는 처음이라.

-네? 처음이라구요? 그보다, 이걸 교수님이 직접 만드신 거예요?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허묵의 청량한 웃음소리에 유연은 다시 한 번 두 뺨이 붉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쳐음으로 직접 만든 요리. 아마 평생 먹어볼, 먹어본 음식 중 가장 값비싼 요리가 될 것이었다.


-오늘 언제 퇴근해요?


허묵이 물었다.


-어.. 정시 퇴근할 것 같긴 한데. 왜요?

-같이 보고싶은 영화가 있는데, 마침 오늘 저녁에 상영하거든요.


유연은 볼을 꼬집었다. 아야.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얼버무린 유연이 기회를 놓칠까 얼른 미끼를 입에 물었다.


-저야 좋죠! 무슨 영화예요?


그들이 본 영화는 로마의 휴일이었다. 흑백 스크린 속에서 세기의 배우였던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의 아름다운 사랑이 로마의 풍경 아래 펼쳐졌다.


"로마의 휴일이잖아요?"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던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인걸요. 마지막에 기자가 홀로 화면을 향해 걸어나오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그 여운은 한참을 가죠."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들어선다. 공주와 기자는 이제 헤어져야만 했다.


-I have to leave you now.
-I don't know how to say good bye.
-Don't try.


반전은 없었다. 공주와 기자는 서로의 이야기를 추억으로 남겨둔다. 둘은 너무나도 다른 세상에 있었고, 그들에겐 그들만의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묵은 가만히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유연을 응시했다.


하지만 난 놓지 않을 거야. 널 내 세상에 떨어트려서라도.


영화가 끝나자, 유연은 몇 번을 봐도 재밌다고 조잘대며 걸었다. 남자 주인공 너무 멋있지 않아요? 영화관을 빠져나오니 울긋불긋한 낙옆들이 보인다. 본격적인 가을의 청취를 즐기며 걷자니 저녁이라 상당히 쌀쌀한 날씨다. 유연이 양 팔을 쓸어내리자 허묵이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단풍잎이 쏟아지는 가로수길을 걸으며 허묵이 물었다.


"그 기자역을 상당히 좋아하나봐요."

"물론이죠. 그레고리 펙의 조 브레들리는 완벽한  수준이잖아요. 흑백인데도 사람이 그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요. 로맨스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바뀐다는 점 때문이에요. 그 기자는 목적을 가지고 공주에게 접근했지만 결국 그 목적을 포기하고 말잖아요.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죠.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순 없고, 성인군자일 수도 없어요. 다만 더 나아질 순 있겠죠. 전 완성된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는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아서요."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순 없다. 허묵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만약.. 목적을 가지고 당신에게 접근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반쯤 도박과도 같은 물음이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한 걸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 허묵은 조심스러운 눈길로 유연을 바라봤다. 유연은 허묵보다 몇 걸음 먼저 앞서, 낙옆을 하나 주워들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고 한치의 의심도 갖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음.. 꼭 그렇게 가정해본다면, 그래도 교수님이 교수님인 건 변하지 않잖아요. 이유가 있었겠죠.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이다지도 말갛고, 순수하고. 손가락 끝부터 모든 것이 아름다운 사람이 세상에 둘일 수는 없으리라. 허묵은 손을 꽉 쥐었다. 핏줄이 도드라진다. 이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충동을 억눌렀다. 아니라면 당장 정신나간 사람처럼 모든 걸 말하고 그녀의 사랑을 갈구할 것 같아서. 결국은 그녀의 손가락 하나까지 짓씹어 삼키게 될까봐.

유연의 뒤로 낙옆이 팔랑이며 떨어져 내렸다. 한참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본 뒤 허묵이 나직이 말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밤이 더.. 늦어지기 전에."


이대로 밤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들의 밤도, 허묵의 어둠도.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또한 보내줄 생각도 없다. 유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묵의 곁으로 돌아와 다시 재잘거렸다.


"그러고보니 이제 정말 가을이네요. 낙엽도 벌써부터 이렇게 많이 떨어질 줄 몰랐어요. 어제가 추분이었으니, 기분탓인가? 정말 해가 빨리 져문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요."


오늘 영화 보여줘서 고마워요. 뭘요, 제가 같이 보고 싶었던 건데 응해줘서 고맙죠. 교수님, 이 단풍잎 정말 이쁘지 않아요? 가져가서 압화하려구요. 책갈피를 만들면 정말 이쁠 것 같아요. 다 만들면 교수님께 드릴게요.. 가만히 듣고 있던 허묵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유연이 모르게 웃음을 거두고 지척의 커다란 단풍나무 뒷편을 바라봤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허묵은 유연에게 조교에게서 전화가 왔다며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들에게서 유연을 조금이라도 떨어트려 놓으려고. 하지만 허묵이 곁에 있는 한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레스."


사내가 고요히 허묵을 불렀다. 허묵은 유연의 손을 잡았다. 발그레하게 물든 유연의 두 뺨, 분홍빛 손톱, 그 손가락 사이 사이로 파고드는 허묵의 큰 손. 이 황금같은 시간을 감히 방해받을 수는 없없다.


"지금은 아니야."

"네?"


허묵은 의아해 하는 유연을 제 옆으로 완전히 끌어당겼다. 마치 그 검은 사내의 시야에 들지 않게 하려는 듯이. 조금만 이렇게 있을까요. 낮은 허묵의 목소리에 유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묵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이내 허묵이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본다. 얼음으로 벼려진 비수를 꽂는 듯한 차가운 눈초리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이윽고 미간을 좁히곤 목례하며 사라진다. 그 모습을 진득하게 바라보던 허묵을 유연이 불렀다.


"교수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묵은 고개를 숙여 유연의 동그란 머리에 짧게 입술을 맞췄다. 유연의 두 뺨이 화르륵 붉어졌다.


"그냥, 예뻐서요."


유연이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바닥만 바라봤다. 귀까지 붉어진 채로. 허묵은 부드럽게 유연의 뺨에 손을 올려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그러곤 그 달콤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일순간 놀란 유연의 따뜻한 눈동자가 일렁거리다 서서히 감겼다. 허묵은 마치 죄를 지은 신자처럼 유연의 손을 꽉 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바라건데 신이시여, 그녀를 갈망하게 하셨다면 그녀를 가지는 것 역시 허락해 주소서.

그녀를 제게 온전히 가져다 주소서.


-하지만 내 생에 유일한 색을 만나게 된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왜요?

-글쎄요.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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