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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해피엔딩

택언유연




1.

 

 

“저 이번엔 수정 못 합니다!”


고요한 사무실에서 당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꽤 당돌한 사원이라고 말할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연은 어디까지나 한 회사의 대표였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정도의 권력 또한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맞았다.

 

조금 흥분했는지 이마에 땀 한 줄기가 흘러 내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유연은 이택언이 앉아 있는 책상 위에서 제 계획서를 빠르게 낚아채 갔다. 또 한줄, 한줄 밑줄 그으면서 지적하려구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칠게 내뱉을 뻔했다.

 

이택언은 유연의 행동에 조금 황당하다는 듯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한 손으로는 삐딱하지 않게 턱을 괴었다. 그렇게 말 한다면 각오는 되어있어야겠죠. 유연은 이택언이 말한 적도 없는 말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책상에 놓인 볼펜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큰 소리를 멈춘 뒤의 정적은 마치 그가 시간이라도 멈춘 것 같다. 유연은 목울대를 움직여 숨을 꿀꺽 삼켰다. 뭐 될 대로 돼라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아. …만약 구멍이 없으면 땅굴이라도 파서 나오지 뭐.

 

이 상황들은 사실 간단한 얘기였다. 기적의 발견은 성공적으로 종영되어, 그 이후 유연의 회사에게 프로그램 제작을 의뢰하는 일이 잦았다. 맛집 탐방이라던가, 세상에 온갖 놀라운 일들을 찾거나,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하지만 유연은 현재의 흐름에 순응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을 합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도달하자 실행에 옮기고자 이렇게 화예에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 첫 발걸음은 바로 일주일 전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수정을 거치기를 몇 번. 처음엔 무슨 무모한 짓이냐며 위겸 실장까지 끼어들어 말렸지만, 이렇게 다시 계획서를 수정해서 찾아왔다. 매번 입구에서 실장을 마주칠 때마다 그가 물었었다. 정말 또 오셨네…. 유연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 당당하게 행동하며 한마디를 얹었다. 네. 죽을 때까지 올지도 몰라요.

 

눈앞의 이택언은 여전히 정적이었다. 머리카락 하나 휘날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 유연은 그만 그의 기에 눌려버릴 뻔했다.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리고는 지금 느끼는 감정들과 말을 머릿속에 천천히 나열했다.

 

이봐요, 대표님. 제가 프로그램 몇 개를 잘 진행시켜서 결과적으로 화예의 이미지도 좋아졌잖아요? 저도 이렇게 요구할 권리는 있잖아요? 그래. 맞아. …그리고 아무리 갑과 을의 관계라도 협업이라 생각하고 또 다른 기회를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왜 이렇게 퇴짜만 맞히는 거죠? 또, 항상 과하게 지적하거나 지금처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또, 이택언 당신은 넥타이도 비슷한 거에 옷도 까맣게 입고! 맨날 말버릇은 됐습니다, 나가보세요, 이러고. 나는 정말 이택언 진짜 ……당신이! 

 

유연은 어느새 말도 안 되는 이유까지 나열하고 있었다.

 

“할 말이 더 남았습니까?”

 

이택언과 시선을 맞췄다. 눈앞의 사람의 욕을 하다니. 나도 참 쌓인 게 많았나 봐. 괜히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의 말에 대답해야만 했다. 무언가 쟁취하고 싶다면 입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저희 회사를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당신을 구했죠? 회사 일까지 포함해서.”

“그건….”

“그리고 이번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투자 철회도 하지 않고 여태까지 당신도 회사를 잘 키워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새로운 도전이랍시고 몇 퍼센트인지 알 수도 없는 성공률에 목을 맵니까. 사실 도움이라는 것도 웃기죠. 기회라고 하면 모를까.”

 

이택언은 안경을 다시 썼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보라는 그의 행동에 유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또다시 순응하는 방법밖에 없을까. 차라리 그와 같이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멈춘 시간 동안 다시 할 말들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서 말했을 텐데.

 

유연은 몸을 돌려 문 앞에 섰다. 잠시 동안 나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래요. 저 갑니다. 또 무참하게 깨져버린 을은 이만 갑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일부러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이자 이택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아직도 남았습니까? 당신, 평소 같으면 문이라도 쾅 닫고 빠르게 나갔을 텐데.”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차갑게 닿는 온도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당연하게도 일을 할 때의 이택언은 사석에서의 행동과는 전혀 딴판이다. 길을 잃거나 비를 맞을 뻔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타요, 바래다줄 테니.’ 라고 말한다. 가끔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면 높은 곳에 있는 책을 쉽게 꺼내주기도 한다.

 

사소한 친절들로 인해 언젠가는 오해가 생길 지경이기도 했다. 뜬금없이 밥을 사주지를 않나. 카페에 같이 가지를 않나. 물론 같이 있는 내내 잔소리며, 싫은 소리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석에서의 대부분의 말들은 그리 직격으로 내리꽂히는 말들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웃어넘길 수 있다는 얘기였다. 언제나 의아했다. 그러나 그는 화예 사무실 안에서 만날 때면 누구보다 냉철해진다는 것이다. 사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아니라, 자아가 2개로 쪼개지는 능력 아냐? 참, 나. 유연은 여전히 황당하고, 멈추지 않는 생각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긴 복도를 지나 화예 건물의 로비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위 실장과 마주쳐버렸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울상을 짓고 걷고 있자니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또 …군요.”

“저 지금 대답할 기분 아니에요.”

“유연 씨, 타이밍을 잘못 고르신 것 같아요.”

 

유연은 여전히 땅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땅을 보고 걷는 버릇을 고치라던 그의 말을 단 한 순간이라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위 실장은 끈덕지게 옆에 따라붙으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마음 같으면 이제 그만 됐다며 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힌트는 언제나 달콤하다. 유연은 어느새 귀를 쫑긋거리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게 뭔데요.”

“유연 씨도 참.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늘이 대표님이 제일 바쁠 날인 거 아시잖아요.”

 

유연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유연, 아주 자알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한 조소가 머릿속에 울려 펴졌다. 동그란 눈을 뜨고 휴대전화를 열어 날짜와 요일을 확인했다. 긴 탄식이 나왔다.

 

“아…….”

“오늘은 결제해야 할 서류가 많은 날이잖아요. 그것도 지금은 점심시간을 넘겨서 오후예요. 아주 바쁠 시간대에 오셨네요. 잘 아시면서….”

“그러 …네요.”

“그럼 전 이만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위 실장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잡아 세웠다. 유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실수를 한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 사람 하나 붙잡아서 떼를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택언은 오늘 자신에게 눈길도 몇 번 주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계속해보라는 듯 도발에 가까운 눈빛 또한 오늘은 없었다. 진짜 바빴나 봐…. 그것도 모르고 소리를 꽥 지르다니. 

 

유연은 건물에서 나와 가로수가 가득한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금융가를 지나, 정의로를 지나,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휴대전화의 진동이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려댔다. 슬쩍 꺼내서 바라보니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유영이었다.

 

[대표님 얘기 잘 끝내셨나요? 아직 화예 대표실에서 얘기 나누는 중이실까 봐 이렇게 메시지로 남겨요! 아, 그리고 프로그램 편집들은 끝나가는 중이니 굳이 회사로 돌아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메시지 하나만 남겨주세요.]

 

오늘은 회사로 돌아갈 기분도 아니었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무거웠던 화예에서의 분위기를 애써 잊고 싶었다. 나한테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유독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 우울해질 만도 했다. 아무 곳에나 가서 아무거나 먹고 아무 생각을 해야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초가을에 접어든 것이다. 선풍기와 에어컨 없이는 버틸 수 없었던 날들을 쉽게 잊었다. 적당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이고, 사람들은 얇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코끝으로 다가올 가을의 향이 났다. 유연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그러자 점점 발걸음이 원래 속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이 시간에 회사 말고 다른 곳에 있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잠시만이라도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유연은 휴대전화 안의 스케줄러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이번 제작 일정은 거의 다 끝나가고, 최종 검토는 다음 주에 해도 되겠고……. 오늘은 그러니까,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 월요일 오후나 화요일에 가도 되겠는데? 마침 연휴도 껴있겠다. 직원들한테도 좀 쉬엄쉬엄하라고 할까….”

 

아주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보통의 회사원이라면 그게 맘대로 되나요?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의 변덕이었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날들은 언젠가의 걸림돌이 된다. 유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코앞 벤치에 다가가 앉았다. 도시 한가운데였지만, 나무들은 울창하고 하늘은 청량했다. 곧 푸른 잎들도 떨어져서 운치 있는 가을로 바뀔 것이다. 이번에는 낙엽을 주워서 책 사이에 꽂을까? 벤치의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날씨 좋다.”

 

맑은 날씨와 함께 오늘만큼은 회사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유연은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가을 혼자 가볼 만한 곳’, ‘혼자 가을 힐링’ 따위를 검색했다. 그러나 원하는 정보는 한 번에 찾기는 어려웠다. 온통 광고에 주어 없는 말장난들 투성이었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혼자 가볼 만한 곳이라 하면 역시 집이 최고 아닌가요? 거실도 갔다가 화장실도 갔다가 킥킥]

 

“뭐야? 진짜 짜증 나.”

 

심드렁하게 계속해서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검색하는 것도 지루해질 때쯤에 ‘연모시’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연모시에서 저녁에 가을맞이로 작은 불꽃놀이를 한다네요. 하지만 규모가 작으니 멀리서 오셔서 보기에는 그리 거창하지 않을 거 같아요. 장소는 백운호입니다.]

 

그래, 이거다! 유연은 게시물의 쓰인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화면이 뚫려버릴 것 같이 집중을 하며 촘촘한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문장 하나하나를 훑던 손가락이 멈췄다. 9월 28일이라면 오늘이잖아? 유연은 눈가를 접으며 조용히 웃었다. 운이 좋았다. 오늘의 첫 수확이기도 했다. 시간을 보아하니 약 한 시간 후에 시작될 모양이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치마를 털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두 손으로 정리했다. 어깨에 걸쳐진 옷도 제대로 올려 입었고, 구두의 스트랩이 풀리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 이미 조금 전의 이택언의 표정은 잊은 뒤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유연을 따라왔다. 이 계획서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수정해오세요. 수정해온 거 맞습니까? 지난번과 같은 것 같은데. 이 모든 말들은 놀랍게도 대표실에 들어선 지 채 10분도 안 되어서 들은 말들이었다. 유연은 제 가슴께를 퍽퍽 내리쳤다.

 

“으휴! 으휴!”

 

지나가는 사람들은 유연이 큰 소리를 내며 힐끗 쳐다보았다. 유연은 어린아이와 시선이 마주친 뒤에야 머쓱하게 손을 내리고 마저 걸었다. 천천히 걸어가면 불꽃놀이 시작 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이 오늘은 좋은 날씨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백운호로 가는 길은 매일같이 걸어가는 길이었다. 몇 개의 큰길들을 거치고, 익숙한 레스토랑과 전통거리까지. 같은 곳도 상황에 따라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연 레스토랑 앞을 지나자, 이택언이 만든 푸딩이 생각났다. 하필이면 다른 음식도 아니고 그가 만든 푸딩이라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이택언은 정말 본인도 모르게 자아가 2개로 나뉘는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익숙한 가게들을 지나쳤다.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와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던 순간도 있었다. 이를테면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말이다. 어느새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번져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백운호에 다다랐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작은 단상에 올라간 중년이 확성기로 연신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연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 틈 사이에서 한 발짝 뒤로 나왔다. 경사가 진 풀밭 위에 서서 저 멀리의 야경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큰 건물들은 여전히 불이 밝다. 이택언, 아직 회사에 있을까? 유연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곧 불꽃을 점화합니다! 관람객분들께서는 큰 소리가 나도 놀라지 마시고, 질서 있게 관람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느새 유연은 아이처럼 들뜬 마음이 되었다. 제 두 손을 꼭 붙잡고 작은 불꽃이 이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침울했던 기억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3, 2, 1!”

 

카운트다운과 함께 화려한 불꽃이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펑! 하는 경쾌한 소리에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모두 방긋 웃고 있었다. 유연은 사람들의 행복어린 표정들을 바라보며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미소에만 집착했을 뿐, 정작 내 미소에는 어색해졌을 정도로 지쳐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은 이토록 간단한 일이었다. 좋은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되는 것이다. 조용히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눈에 담았다. 동그랗고 큰 갈색 눈동자 안에 별이 쏟아진다. 살랑살랑 낮은 바람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단정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불꽃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가을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불꽃과 다가올 앞으로의 일들. 유연은 그대로 뒤돌아서 행사장에서 빠져나왔다. 드디어 작은 결심이 섰다. 사실은 그가 보고서나, 계획서를 퇴짜를 놓고 심술을 부린다고 혼자 화를 냈지만,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 또한 진심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앞에서는 자꾸 흔들리게 된다.

 

유연은 손안의 휴대전화를 꼭 쥐고 결의 넘치게 번호를 눌렀다. 계속해서 생각이 떠다녔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복잡한 마음으로 살 수 없는 법이야.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다가 멈춘다. 너머에서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안나연이었다.

 

[유연 대표? 전화가 늦었네? 이 대표와 얘기는 잘 끝난 거야?]

“음…. 확답을 해 드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뭔데?]

“갑작스럽지만 며칠만 쉴게요. 다시 연락드릴 테니 혹시 긴급 상황이 생긴다면 전화해 주세요.”

 

유연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워낙 갑작스러웠던 말이라, 전화기 너머에서 큰 소리가 들려올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녀는 따뜻한 말 몇 마디를 건넸다.

 

“알았어. 잘 쉬다가 연락 줘.”

“…고마워요.”

 

유연은 짧은 감사를 표한 뒤 통화를 끝마쳤다. 어두워진 연모시의 시내를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분명 내게 좋은 일이 생길 거야.

 

 


 



2.

 

 

이틀째 되는 늦은 오후였다. 유연은 퉁퉁 부은 눈과 무거워진 몸과 함께 눈을 떴다. 어제는 가을바람이 선선하다는 핑계로 예고 없는 과식을 했다. 모네 다이닝에 가서 혼자 밥도 먹고, 저녁에는 전통거리에 가서 꼬치구이와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거리의 악사들과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유연은 배를 내려다보며 통통 두드렸다. 어제 많이도 먹었네. 나 혹시 먹는 거로 스트레스 푸나? 자신에게 되물어도 될 대로 되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창가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서 그런지 현실감이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10시가 넘어있었다. 간만의 휴가가 낯설었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버릇처럼 휴대전화의 화면을 켰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모두 이택언에게서 온 것이었다. 부재중 전화는 3건 메시지는 1건. 분명 전화를 세 번이나 걸다가 안 받을 걸 알아서 메시지를 보내놓은 거겠지. 유연은 한숨을 푹 쉬고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어딥니까, 지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생각은 났나 보네…. 근데 어디냐고 왜 물어보는 거지?”

 

유연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화면 속 이택언의 메시지를 흘겨보며 의심에 찬 시선을 거둬가지 않았다. 열어둔 창밖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몸을 떨며 창가에 다가가 창문을 닫고 커튼도 다시 쳤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와 큰 동작으로 걸터앉았다.

 

“설마 보고서 얘기하려고 그러는 거 아냐?! 또 오늘은 얼마나 퇴짜를 놔 줄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불꽃놀이를 보며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퇴짜 맞은 설움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연은 방안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혼잣말의 정도가 아닌, 멀리 있는 누군가라도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이봐요! 전 오늘 휴가거든요!?”

 

메신저 아이콘에 이택언의 사진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그는 들릴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유연은 그대로 부엌으로 가서 차가운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큰 소리를 내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확실히 과민반응이었다. 서운함은 때로 무섭다. 쌓이고 쌓이면 별거 아닌 일에도 금세 언성이 높아진다.

 

비틀비틀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왔다, 잠을 푹 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밀려오는 졸음이 무거웠다. 커튼을 친 적당히 어두운 방 안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다닌다. 지금은 그에게 연락할 기분이 아니었다. 폭신한 침대에 누워서 옷장 앞에 걸린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휴가와 동시에 밀린 빨래도 해치워서 그런지 섬유유연제 향이 방 안에 가득하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윽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지금 자면 또 밤에 일어날 텐데. 유연은 끔뻑끔뻑 밀려오는 잠을 받아들였다. 천천히 생각해도 될까. 조금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까.

 

유연이 완전히 잠에 빠지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시계 초침이 째각 거리는 소리와 오전의 따뜻한 가을의 햇살이 반투명한 커튼 너머에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한 가운데 손에서 놓아버린 휴대전화의 화면만이 또렷했다.

 


잠에 빠진 유연은 짧은 꿈을 꾸었다.

텅 빈 공간. 벽지도 바닥도 천장도 심지어 문까지 모두 하얀 공간이다. 무채색이 주는 공포감에 꿈속의 출구를 찾아 헤매었다. 이상한 앨리스에 나오는 작은 문이 있지를 않나, 심지어 손잡이까지는 손도 닿지 않을 만큼 큰 문도 있다. 그뿐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화예 대표실로 향하는 문도 있었다. 떡하니 놓여있는 그 문 때문에 유연의 미간이 구겨졌다. 안 들어갈 거거든요. 읊조리며 다른 문들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모든 문이 자신의 기억과 관련된 것이었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에서 보인 것들은 여태껏 겪어온 일들이 영상처럼 재생되고 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 대한 기억. 아버지에 대한 기억. 다시 문을 닫았다. 지나간 기억에는 굳이 발을 들이지 않아도 온전히 제 안에 존재한다.

이번엔 등 뒤에 있는 문 중, 가장 가까운 문을 열었다.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얼마 전 본 것 같은 불꽃놀이가 문턱 안의 세상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색채들. 화려함과 더불어 곳곳에서 흩날리는 낙엽들과 은행잎들. 마치 다른 세상에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활짝 웃으며 발을 들였다. 밝은 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꿈이 끝나가고 있었다.

 


“……꿈이 뭐 이래….”

 

유연은 누운 자리에서 눈만 끔뻑거렸다. 꿈이 아직도 생생하다. 꿈은 언제나 애매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오늘의 꿈은 낯설었다. 오랜만에 예지몽이 아닌 꿈을 꾼 거 같았다. 온전히 혼자만이 꿀 수 있는 꿈을 꾼 느낌이었다. 며칠 전 보았던 불꽃놀이가 꽤 인상 깊었던 것 같았다.

 

침대 위를 더듬거리며 휴대전화를 찾았다. 엎드려서 고개만 돌린 채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와 있는 것이 없었다. 이택언, 답장을 안 했다고 더 연락을 안 하는 건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허기를 느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역시 해가 뜰 때 자면 수면 패턴이 완전히 망가지네. 들리지 않을 만큼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겉옷을 대충 주워 입었다. 슬리퍼를 끌며 거리로 나섰다. 온통 꿈뿐이었던 하루 중에서도 가장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역시나 그였다. 서늘해진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역시 답장 할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편의점에 도착해서는 스낵 코너에서 발을 멈추었다. 유연은 밤새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과자들을 몇 개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삑 하는 바코드 소리 앞에서 멍하니 제 발끝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게 버릇입니까? 이택언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그가 스며들어있는 일상은 이토록 선명하다. 고작 며칠 안 봤다고 그의 질책이 그리워진다면 거짓말이겠지.

 

“10,600원입니다.”

“…네? 아, 네.”

 

멍 해져있던 기분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지갑을 열어 주섬주섬 계산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리다 사라진다. 메말라버린 나뭇잎이 발에 치인다. 그것들을 잘근잘근 밟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휴대전화를 놓고 나왔었나? 유연은 외투 주머니를 헐레벌떡 뒤적거렸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 놓고 나온 것이 확실했다.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편의점 봉투가 요란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했다. 외투도 반쯤 벗어서는 어깨에 대충 걸쳤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었나 봐요? 라고 물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를 찾아서 전원을 눌렀다. 하지만 역시나, 부재중 전화는 0건, 메시지도 0건이었다.

 

“밀린 드라마나 보지 뭐.”

 

유연은 호쾌하게 하하하, 하고 웃어 보였다. 정말 작위적인 웃음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망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누가 누구 연락을 기다려? 조금은 심통이 난 듯 편의점 봉투를 뒤져서 음료 캔 하나를 거칠게 땄다. 탄산음료인 줄 알고 열었던 캔은 소량의 알콜이 섞여 있었다. 유연은 고개를 뒤로 휙 젖히고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느낌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크하!!!!!”

 

별로 상쾌하지도 않으면서 큰 소리의 추임새를 넣었다. 입가를 손등으로 스윽 닦고 침대 아래에서 리모컨을 찾아들었다. 휴가는 휴가니까 괜히 심각한 생각을 해봤자 소득이 없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지난 일에서 자신의 잘못을 찾는 일은 독이었다.

TV를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때 지난 유행프로그램들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하필이면 맛집 소개나 정보 프로그램이었다. 유연은 미간을 찡그리며 제 손가락을 탓했다. 지금 이런 프로그램들을 봐 봤자 일 생각만 날 거 같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보고서, 계획서, 더 나아가 이택언 생각까지 날지 몰랐다. 차라리 서운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는 틀리지 않았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것은 대표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연은 흔들리고 있었다. 날이 선 것같이 차가운 말을 듣고 있노라면 괜스레 서운해지기도 했다. 뒤돌아서 잊을 정도였다면 그에 대한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연은 때때로 자신의 기분을 부정했다. 내가 ‘그’ 이택언을? 그렇게 몇 번이고 되묻고 나서야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 표정조차 잃을 수 없는 얼굴로 채널을 다시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한 채널에서 멈추었다. 오래전에 방영했다가 일이 바빠진 탓에 결말을 보지 못했던 드라마였다. 역시 대부분의 드라마가 그렇듯, 재벌가 남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유연은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다. 무의식중에 드라마 속 재벌의 행동과 이택언을 비교했다.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점점 돌아왔다. 눈을 반짝거리며 흥미를 보였다.

 

“저 사람은 착하네.”

 

말 한마디를 문득 뱉어놓고는 자신의 한 말에 반문했다. 그럼 이택언은 나쁘냐? …아니 그건 아니지. 혼자 만담이라도 하듯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괜히 옆에 놓인 과자를 한 움큼 쥐어서 입에 넣었다. 볼이 터질 것처럼 와구와구 먹으며 음료를 들이부었다. 크어어! 어쩐지 40대 아저씨처럼 구수한 탄성이 나왔다. 점점 취하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와, 저 주인공은 인정이 있네. 인정이.”

 

유연은 주인공을 대하는 재벌의 모습을 보고는 큰 소리가 나왔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여태 티를 안 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었다. 뻔한 드라마에 걸맞는 뻔한 결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뭐 저래? 라고 말하면서 거침없이 채널을 돌렸을 터였다. 하지만 유연은 어느새 집중하고 있었다. 설마 입이라도 맞추겠느냐고 비죽 웃었지만, 곧 그 웃음을 싸악 씻겨 내려가 버렸다. 정말로 둘의 입술이 닿았다. 머릿속에서 또 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미없으니까 채널 좀 돌리지? 하지만 유연은 한 손에는 리모컨을 한 손에는 과자를 꼭 쥐고 멈춰있었다. 이번에는 얼굴이 아닌 귀까지 열이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때아닌 로맨스에 얼어붙었다.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무음으로 해 놨던 것이 잠깐의 요란 탓에 해제되어 있었다. 유연은 순간 괴성을 질렀다.

 

“악!!!!!”

 

어두운 방 안에서 빛나는 것이라곤 TV와 휴대전화였다. 하지만 유연은 이 작은 세상 안에서 오직 휴대전화의 화면만이 빛나는 것 같았다. 떡하니 쓰여 있는 이름이 보인다. 이택언.

 

“이택언?!”

 

유연은 리모컨과 먹던 과자를 괜히 멀리 내 팽개쳐버렸다. 수신 버튼을 누르려다가 주춤거렸다. 이걸 지금 바로 받아야 해, 말아야 해. 찰나의 생각이 지나갔다. 하지만 곧이어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의 오기가 생겨버렸다. 받아야만 해. 여태 뚱해져 있는 거로 생각하면 어떡해?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며 전화를 받아버렸다. 아 유연 망했다! 이택언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구나! 생각하면서 휴대전화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네. 유연입니다.”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책을 넘기는 소리나 그 작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 고요했다. 오직 이택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과한 정적에 유연은 자신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집입니까?”

 

단지 그는 물었을 뿐이었다. 유연은 그의 말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뭐라고 대답하지? 연락에 답장을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휴가라고 미리 말하지 않아서? 변명 같나? 아니 그럼 내가 하는 말은 다 변명뿐인가? …아니 왜 이게 변명이야. 난 그냥 조금 서운해서 답장을 안 한 거뿐인데. 그런 별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생각한 것들이 무색해지는 말이었다.

 

“네. 그런데요…. 왜 그러세요? 아, 그리고 답장을 못 드린 건 죄송해요.”

 

아직도 귓불에 열이 올라있었다. 그 열이 점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맥이 뛰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쿵쿵 울려 퍼졌다. 고요함 속에서는 이택언의 숨 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분명 바쁜 일들이 이제야 다 끝났으니 연락을 준 거겠지. 스스로 만든 명목을 내세우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기다려요.”

“네?”

“지금 갈 테니까.”

 

이윽고 전화가 뚝 끊겼다. 무슨 소리냐며 더 물을 수도 없었다.

 

“뭐야, 기다려요? 그럼 지금 우리 집에 온다는 건가?”

 

유연은 혼란스러움에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택언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아니면 내가 술에 취하기라도 했단 건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보며 부엌과 거실까지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전신 거울 앞에 우뚝 서버렸다. 아래부터 위까지 제 모습을 비춰보니 그제야 현실에 눈을 번뜩 크게 떴다. 가을바람을 맞고 온 뒤 빗지 않은 끝이 뻗친 머리카락. 대충 입은 잠옷. 그리고 입가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과자 가루. 유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분명 그는 온다고 했으니까 집 앞이나 이 근처로 올 것이다. 전화를 받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불시에 집 앞으로 와서 접니다, 했을 것이 뻔했다. 전화를 제때 받자. 유연은 오늘 또 하나 배웠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허망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것은 이렇게 쉽게 풀리는 얘기였나? 설마 집까지 계획서를 가져올 것만 같은 불안함 반과 새로운 설렘에 붕 뜨는 기분이 반 이었다. 그저 거실 가운데에 서서 들려올 현관 벨 소리에 온 집중을 다 하고 있었다. 소파나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기다릴까도 싶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가 서류를 가져온다면 공적.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사적이다. 유연은 잔뜩 얼어있었다. 그러자 때마침 띵동, 하고 벨 소리가 유난히 울렸다. 유연은 미끄러지듯이 현관 앞에 섰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연 겁니까?”

 

이택언이다. 그 이택언이. 일을 마치고 회사에서 바로 왔는지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여전한 모습과 여전한 눈빛으로 유연을 내려다봤다. 현관문 문턱 하나 사이로 경계가 나뉜 기분이 들었다. 들여, 말아. 그의 말에 대답 없이 망설이는 와중 다시 그가 물었다.

 

“혼자 있으니 누군지 묻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원래 이렇게 아무나한테 문을 열어줍니까?”

“……아니, 오신다고 해서요.”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할 줄은 몰랐군.”

 

유연은 이택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대표님도 아무나 인가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어놓고는 얼어버렸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여전히 멈춰있는데,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이택언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묘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유연은 뭔가를 감추는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전히 생각했다. 이대로 밖으로 나설까, 아니면 들여야 할까. 하지만 결론이 나기도 전에 이택언이 불쑥 말을 건넸다.

 

“여기 계속 세워둘 겁니까?”

“아, 아뇨! 들어오실래요?”

“됐습니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니니까. 자, 이거 받아요.”

 

뭐야. 그럼 왜 물어 봐. 유연은 생각하며 이택언이 건네는 작은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이게 뭐냐며 눈짓으로 물었지만, 대답보다 직접 보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제법 묵직한 쇼핑백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 안에는 언제나처럼 푸딩 병이 들어있었다. 유연은 이택언을 한 번, 다시 푸딩에 시선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솔직한 웃음이 눈가에 걸렸다. 눈을 반달처럼 접어서 웃고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 계획서, 보고서 다 퇴짜 놓고 절 미워하셔도 역시 이것만큼은 누구보다 최고라고 자부해요!”

 

헉. 유연은 본인이 말해놓고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미쳤나 봐. 진심이 아닌 말이 섞여 있었다. 일종의 투정일지도 몰랐다. 해죽 웃으며 얘길 한 거였지만 그가 장난으로 받아들일지, 진담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히 아까 마신 음료에 소량이 알콜이 섞인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누가 봐도 주정이 아닌, 단순한 투정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이택언은 변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입가로 손을 가져다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당신을 미워한다구요?”

 

유연은 변명하려다가 간단한 요점만 말하기로 했다.

 

“저에게 가끔 과할 만큼 냉정하게 대해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택언은 유연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단호함이 서린 손길에 유연은 가만히 서서 그를 올려볼 뿐이었다.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택언은 깊은 눈빛으로 유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적인 얼굴에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 당신을 미워한 적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꼈을 뿐이에요. 별말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유연은 다시 웃어 보였다. 이택언의 손길이 멀어진다. 싸늘한 정적 속에서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푸딩을 받고 뒤돌아서면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 같았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로 그럴 것 같다. 틀림없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저 휴가라고 답장도 안 드렸는데.”

“직원한테 물어봤습니다. 휴가라서 멀리 간 줄 알았더니만, 집에 있었다니. 달리 갈만한 곳이 없었습니까.”

 

뼈를 때리는 말에 유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사실 계속 일만 해서 그런지 갈만한 곳도 없더라구요. 어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전통거리도 갔다 오고, 백운호에서 불꽃놀이도 봤어요.”

“…불꽃놀이?”

“네!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가을이 온 걸 실감하겠더라고요.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그거 아세요? 가을이 오기 전에는 냄새가 난다는 거요. 계절 냄새라고…….”

 

유연은 괜히 과장된 몸짓과 물어본 적 없는 얘기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확실히 사실이 아닌 얘기는 없었지만, 얘기를 이어가지 않으면 싸늘한 분위기가 오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관 앞에 여전히 서 있는 이택언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유연에게 되물었다.

 

“누구랑 갔습니까?”

“혼자 갔는데요?”

“혼자?”

 

그리고는 오래 멈춰있었다. 이택언은 제 손목을 걷고 손목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뭐 할 말이 있으면 하시던가요! 유연은 입술을 움찔움찔하며 괜히 그를 몰래 흘겨보았다. 회사에서 일 하는 동안에 놀았다고 너무 시시콜콜 얘기했나. 생각이 가지를 뻗어 나갈 때쯤, 이택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죠.”

“지금요?”

“네. 밖으로 먼저 나가 있을 테니 푸딩 냉장고에 넣어놓고 나와요. 밑에서 기다릴게요. 보아하니 이제 술도 깬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얼빠진 것처럼 바라보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 유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여전히 이택언의 구둣발 소리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버렸고, 유연은 현관 안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진짜 꿈이 아니구나. 뜬금없는 외출에 유연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덧붙였던 말이 떠올랐다. 보아하니 이제 술도 깬 거 같은데.

 

“아악!!”

 

유연은 거울을 앞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그런 미워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에 그가 넘어가줬던 것이었다. 평소같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끝까지 추궁하고 추궁을 당하며 그런 말을 한 저의가 무엇인지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유연은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려가는 순간에도 과연 어디를 가자고 할 것인지 내심 설레고 있었다. 뜻밖에 데이트에 조금 전까지 드라마를 보며 그를 헐뜯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택언이 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손수 차 문까지 열어주었다.

 

“타요.”

 

유연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서 그가 운전석까지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운전석의 문이 덜컥 열리고 이택언도 차에 올랐다. 와중에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있으면서 시간에 칼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걸렸다. 유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웃음을 겨우 삼켰다.

 

도로를 달리다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흘러들어오는 바람에서 계절이 느껴진다. 정말 가을이구나.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흩날렸다. 어딘가로 향하는 와중에도 이택언은 별말이 없었다. 어디 가는데요? 물으면 돌아오는 말은 가보면 압니다, 하는 대답뿐이었다. 유연은 이택언의 옆모습을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살짝 뻗친 흑발이 고집 있어 보인다. 언제나처럼 정장을 입고 있지만, 오늘은 더욱 어울린다. 외모는 이루 말할 거 없이 준수하다. 조금 웃으면 부드럽고 다정해 보일 것 같았다. 유연은 이제는 아예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다른 곳을 보는 척 이택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죠. 할 말이 있으면 말해요.”

“아, 안 봤거든요?”

“백미러에 다 보입니다.”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쳐버렸다.

 

“볼 수도 있죠. 뭐!”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둘만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3.

 


텅 빈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연모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바닷가였다. 유연은 백사장을 걸으며 이택언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더는 손목시계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여깁니다.”

“네?”

 

그리고는 갑자기 한 곳에 멈춰서는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멈췄다. 유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다를 한번, 이택언의 얼굴을 한번 번갈아 쳐다봤다. 계속 눈길을 주지 않던 이택언이 이번에는 시선을 낮추고 유연의 눈과 마주쳤다. 왜 왔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이번에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서운했나요?”

“네?!”

 

유연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물었다. 기껏해야 네? 뿐인 말이었지만 지금 그의 말에 대답할 것이라곤 그 말밖에는 없었다. 주어 없이 대뜸 묻는 말에 웃어야 할지 여전히 못 알아들었다고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가 여태 당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서운했냐고 묻는 겁니다. 지금.”

“글…세요?”

 

이택언은 낮은 숨을 푸욱 쉬었다. 그러나 한숨은 아니었다.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고서를 자꾸 수정해오라고 할 때의 단호함과 사석에서 만날 때의 다정함의 괴리감이 서운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눈치 못 채고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저 늦은 밤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느새 무엇이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의 앞에서는 작은 실수라도 용납될 것 같지 않았던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늦은 시간에 일부러 좋아하는 푸딩을 가지러 와 준 것과 휴가 동안 멀리 가보지 못했다고 말하니, 바다에 데려다준 것도 말이다.

 

유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파도 소리에 묻혀버릴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저,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슬퍼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일에 더 열심히 매달렸어요. 아빠의 회사였으니까 잘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리해서 보고서나 계획서도 썼죠. 그 과정에서 부족한 게 있으면 다시 해야 할 상황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괜히 서운했던 거예요.”

 

이택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유연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대표님께 서운했던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맞이해야 하고, 나의 능력들을 의심해야 했던 시간들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발치에 뚝 떨어진다.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대표님께 조금 서운했던 적이 없던 건 아니었어요. 언제는 다정하면서 언제는 쌀쌀맞고…. 그래서 끊임없이 내 안에 되물었어야 했어요. 내가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 게 맞나? 하구요. 말씀대로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게 맞구요.”

 

이택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유연을 바라보며 쏟아낸 말들을 들어주고 있었다. 구태여 손을 내밀어 위로해주지 않았다. 유연 성격에 그런 위로를 받아봤자 민망해할 걸 알아서인지 그대로 멈춰있었다. 유연은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네요….”

 

예상치 못한 일은 언제나 순간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예상에도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교통사고에 날 뻔한 자신을 구해줬던 인물이 화예의 투자자일 때의 확률. 그것도 그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을 때의 확률. 죽어도 좋아하는 일 없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그 말을 까마득하게 잊게 될 확률. 눈만 마주쳐도 얼어버렸던 사람과 같이 식사를 확률. 그리고 모든 말을 쏟아내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 멀리서 불꽃놀이가 시작될 확률.

 

펑! 바다 너머 도시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어떤 상식들과 확률들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 그러니 살아간다는 건 미지수였다. 유연은 잠시 울었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불꽃을 쫓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가 여기라고 말했던 이유는 이것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내리자 이택언이 바다를 등진 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저런 눈빛이었지.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생각하고. 오히려 여태껏 그를 서운하게 했던 것은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이토록 다정한 눈빛을 냉철하다고 생각했다니.

 

마주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택언은 허리를 낮추고 유연과 눈을 맞췄다. 손을 뻗어 바람에 휘날리는 유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슬며시 넘겨주었다.

 

“일은 일. 사적인 건 말 그대로 사적일 뿐입니다. 난 누군갈 칭찬하는 일에는 서툴러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겠군요.”

 

하늘로 올라간 불꽃이 더 큰 소리와 함께 터졌다. 백운호에서 혼자 보았던 불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 하늘을 빛으로 채우듯, 떠난 해를 붙잡듯, 빛이 가득했다. 수천 개로 갈라지는 빛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히 빛을 내던 불꽃들은 그림처럼 하늘에 멈춰있다. 그는 또다시 시간을 멈췄다. 처음 만난 날처럼. 그를 다시 마주하자 가슴께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좋다는 걸.”

 

작은 목소리였지만 확실하게 들렸다. 유연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가까워진 시선. 숨결이 닿고도 남는 거리였다. 이택언은 유연의 두 눈 위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큰 손안의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거렸다. 조금 전 고백 아닌 고백에 대답할 새도 없이 또다시 갑작스러움이 찾아왔다. 왜? 불꽃이 너무 밝아서? 아까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 민망해서? 그럼 뭐 때문에? 하지만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눈이 그의 손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느낌이 오히려 멀어졌다. 분명 아직도 어두웠다. 그때였다. 입술 위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주 짧고 강렬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의 입술이 짧게 입을 맞추고 다시 멀어져갔다. 눈 위의 손길도 이번엔 확실하게 멀어졌다. 세상이 다시 밝아 보인다. 불꽃은 하늘 위에 여전히 멈춰있었다. 유연은 눈을 크게 뜨고 꿈을 꾼 것처럼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그와의 첫 입맞춤이었다. 마음을 확인하는 건 간단하다. 솔직해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유연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뭐…. 뭐, 뭐예요……?!”

“그래도 답장쯤은 합시다. 어디 있는 지 하루 종일 찾았으니까.”

 

시간이 다시 흐른다. 바닷가를 거닐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아름다워! 벌써 가을이구나! 유연이 가만히 서 있자, 이택언이 손을 잡아끌었다.

 

“늦었어요. 이제 갑시다.”

 

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푹푹 찍히는 발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찰나였지만 입술이 부딪혔던 순간은 선명했다. 끝나지 않는 불꽃놀이의 빛 때문에 사위가 밝아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낮에 꿨던 꿈은 아마도 예지몽이 맞을 거라고. 이렇게 밝은 빛 아래에서 있으니 말이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오는 내내 유연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입술 위에 감각이 집중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정신이 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방금까지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또렷했다. 그리고 백미러를 쳐다보는 것도,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차 안에는 묘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이택언은 묵묵히 핸들에 손을 올리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대단도 하지. 본인이 해놓고 저렇게 태연할 줄이야. 유연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차를 타고 달리는 와중에도 온통 그의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답장을 기다렸던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겸연스러워졌다.

 

“도착했어요.”

 

그의 말에 불현듯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어느새 집 앞에 차가 멈춰있었다. 유연은 흩날린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차 문을 쾅 닫고 열린 창문 사이로 허리를 숙였다.

 

“오늘 좋은 구경시켜주셔서 감사해요.”

“피곤할 테니 들어가 봐요.”

 

그의 차가 서두르듯 빠르게 지나가고 유연은 터벅터벅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유난히 긴 것 같은 기다림에 괜스레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귀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인 것만 같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층수를 누르고 진정되지 않는 떨림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지만 숨을 두어 번 내쉴 새도 없이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설마 하고 바라보니 역시나 그였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세요?”

“아까 못한 말이 있어서요.”

 

유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몰아붙인다고 느껴졌으면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당신은 대표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언제나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어느새 떨리는 심장이 조금 진정되어 있었다. 유연은 바람 빠진 웃음을 픽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거 말하려고 다시 전화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자 너머에서 망설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 자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연은 현관문을 열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고 냉장고를 열었다. 그대로 푸딩을 챙겨서 침대 위에 풀썩 앉았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렇다고 푸딩을 바로 먹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애써 챙겨준 것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마음이 담긴 것과 입술 위에 닿았던 감촉은 모두 같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위해주는지 이제는 여실 없이 느낄 수 있다.

 

새로운 계절과 새로운 설렘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틀림없는 둘만의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유연은 침대에 폭삭 엎어진 채로 생각했다. 나, 설마 이택언을 좋아해서 더 서운하게 느꼈던 건가? 그런 건가? 그럼 이택언도 나를 좋아하는 건가? 그럼 우리 혹시 …사귀는 건가?

 

유연은 이제는 헤매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단지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가을 냄새에 기분 좋게 웃었다.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나도 좋아해요.”







4.

 

 

이택언은 밤이 짙게 깔린 도시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핸들을 잡고, 한 손은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동안 그녀가 회사에 나오지 않고, 화예에도 찾아오지 않아서 내심 불안해했었다. 의욕을 꺾는 나쁜 역을 맡은 기분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다시 보고서나, 계획서를 들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이번 며칠 동안 오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그녀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 몇 번이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몰아붙인 건가. 이택언은 그 정도의 자각은 있었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갖춰야 하는 것은 모조리 갖추고 있었던 터라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어느 정도의 예민함과 타인의 기분을 알아채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 같았다. 자신답지 않은 충동이었다. 바다에 가고. 불꽃놀이를 보고, 시간을 멈추고. 무심코 입을 맞춘 것이 괜한 일은 아닌지 또다시 생각에 빠졌다.

 

신호가 걸리고 차는 멈춰 섰다. 이택언은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좋다는 건 나만의 감정일까. 그녀도 그렇게 생각해줄까.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울던 그녀를 위로해주지 못한 것조차 마음에 걸렸다.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는 단지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수석에 대충 놓인 휴대전화에 밝은 빛이 보였다. 메시지가 왔을 터였다. 나중에 확인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택언은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역시나 그녀였다.

 

[저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요. 내일 다시 화예로 찾아가겠습니다.]

 

새롭게 다가온 설렘이 반가웠다. 이택언은 부스스 웃었다. 가을의 초입. 둘만의 소중한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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