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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 가는 길

백기 X 유연



밤으로 가는 길

The Road to Your Night

 

백기 X 유연

 

 

며칠 야근을 핑계로 몸을 혹사시켜서였다. 유연은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한참 숨을 고르다가 변기 뚜껑을 닫고는 그 위에 앉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울렁거림에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하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는, 좋지 않은 이 느낌에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지금 일어나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나리라. 몇 주 전에도 무리하다가 거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이 된 적이 있었기에 이번은 더욱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어쩌지…….’

 

발을 구를 수도 없어 앉은 채로 쪼그리고 앉아 연거푸 마른세수만 했다. 맨살에 손이 쓸리는 열감조차도 거북했다. 아직 약속한 밤이 되려면 족히 서너 시간은 남았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아찔해진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이 지내왔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최근 들어서는 이렇게 사소한 문제로도 큰 걱정을 하고 있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으니, 직전까지 있던 울렁거림이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고비가 넘어가는구나. 유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숨을 내쉬었다. 이제 숨을 깊게 내쉬어도 제법 괜찮다. 그렇게 세면대에 기대어 서서 물을 틀었다. 한참 물소리를 듣고 있다가 가볍게 세수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기 전에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며칠 전 과한 카페인은 좋지 않다며 백기가 사두고 간 티백을 하나 뜯었다.

 

아까 일어나면서 시계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여섯 시를 조금 넘었던 것 같은데, 자리에 앉으니 일곱 시를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유연은 불규칙적으로 정신없이 무엇인가 잔뜩 적혀있는 수첩을 닫았다. 아까 정말 정신이 없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수첩에는 살려달라는 말이 곳곳에 적혀있었다.

 

‘너만 괜찮으면 돼.’

 

백기의 그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걸까?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두 시간 하고도 조금 더 남아있었다.

 

“언제 도착해요?”

 

결국 시계를 보다가 참지 못한 유연이 백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급한 일은 없을 예정이라고, 꼭 그렇게 하게 할 거라며 며칠 동안이나 바람을 맞췄던 ― 유연은 백기가 하는 소소한 복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백기가 미안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말하던 것이 생각나 웃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제법 밝은 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

 

“어.”

 

그의 말은 언제나 아래로 똑 떨어졌지만, 오늘은 어쩐지 조금 올려주고 싶었다. 유연은 “선배, 나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평소 같으면 말도 하지 않고 나가서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이 집이 감옥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의 갑갑한 기분 때문이리라. 유연은 언제나처럼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백기의 답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그럴래?”하고 쉽게 답했다. 어렵게 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연에게는 너무나도 의외였다.

 

다듬어서 조금 짧아진 머리를 질끈 묶고 가디건을 걸쳤다. 얇게 입고 내려갔다가는 다시 올라올 것이 뻔하니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둘렀다. 오늘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뭘 하자고 할까? 그녀의 발 끝은 가벼웠다. 바깥이나 돌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의 변덕이 더 생겼지만, 일단 이 집부터 나가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였다.

 

오늘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유연은 내려와서 시계를 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핸드폰이 울리고, 익숙한 바람이 가을을 알리며 선선히 불기 시작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는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놀라지 않는다. 지금까지 많이 놀랐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여유 속에서 그가 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돌려 뒤로 돌고는 팔을 벌려 먼저 안겼다.

 

“아…….”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걸까? 아니면 생각보다 별로인 걸까? 유연은 고개를 들기 무서워졌다. 아까와는 다른 조임이었다. 숨통이 조여오고 울렁거려 눈앞이 아찔하던 것과는 달랐지만, 앞을 볼 수 없고 숨을 편하게 쉴 수 없다는 것은 똑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

 

다정하게 물어오며 머리에 저의 턱을 얹고 묻는 백기의 소리에 코끝이 찡해졌다. 유연은 고개를 저었다 끄덕였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다가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유연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답에 백기는 웃었다.

 

“그래.”

 

그는 유연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코끝이 찡해진 채로 고개를 숙이니 이대로는 못 볼 꼴을 보일 것 같아 걱정이 된 유연은 고개를 더 숙이고 눈과 코끝에 힘을 주었다. 수습이 조금 되고 나니 백기를 볼 용기도 생겼다. 그러고 나니 그제야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손을 빼려고 하는데, 유연의 손을 덮을 정도로 큰 백기의 손이 유연의 손을 잡았다.

 

“안되지. 먼저 잡는 건 마음대로라도 놓는 건 마음대로는 안돼.”

“선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 너무 오래 이러고 있으면 허리 아픈데…….”

 

백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서서 안겨있는 유연은 고개를 들어 백기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웃어보이자, 백기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는 못봤어. 웃는다고 안 통하지.”라고 말하고는 다시 유연을 품에 안았다. 백기 주변을 감싸던 선선한 가을바람도 방해할 생각이 없는지, 더는 불지 않았다. 정체된 공기는 유연을 식히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볼에는 열감이 가득했다.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무작정 이러지는 않을게요…….”

 

사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요. 유연은 그렇게 말을 덧붙이면서도 백기에게 소소한 사과의 말을 전했다.

 

“가끔 이러니까 문제인 거야. 그동안 잘 지냈어?”

“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선배가 없는 동안 살아는 있었으니까요. 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늘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상투적인, 조심하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 답했다. 백기는 제 허리를 감고 있던 유연의 팔을 풀어서 조금 떼어내고는 다시 물었다.

 

“정말이야?”

“……제가 지금 귀신은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잘 지냈다는 뜻으로는 들리지 않는 걸.”

 

갑작스럽게 변한 자신의 태도에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유연은 그저 웃다가 다시 침착하게 답했다. 며칠 동안 연락도 하지 못하고 고생했을 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침착함, 평온함, 그리고 안정감이라는 것을 유연은 알고 있었다.

 

“모두들 늘 행복하지는 않으니까요. 큰 불행이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찮은 날들이었다고 생각해요. 걸을래요?”

 

이대로 집으로 들어갔다가는 아까의 답답함이 짓눌러와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유연은 백기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제법 당돌한 표정으로 말해보았다. 딱히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의도로 받아들인다면 오늘은 응해줄 생각이었다. 혼자 있어서 지독함을 맛보는 것보다야 상상으로만 했던, 새롭고 색다른, 그러나 언젠가는 경험해야할 지도 모르는 경험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는 잠시간 망설이더니 유연의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손을 얹기만 했지만. 유연은 제 손보다도 훨씬 큰 백기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연의 손을 잡지 않았다. 시선을 올려 백기를 보니,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괜히 머리나 쓸어넘기고 있었다. 그러더니 (무엇이든) 다짐이라도 했는지 유연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따 못 놓더라도 원망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

“제가 선배를요?”

“빚 진 거, 안 잊었지?”

“어쩐지 오늘이 그 빚, 갚으라는 말로 들리네요.”

“꼭은 아니고. 장담은 못하니까.”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유연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 유연에게 신세진 거라며 다음에는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던 백기의 모습과는 달랐다.

 

-

 

한밤중에 공원을 도는 것은 여러모로 묘한 행동이었다. 얼굴이 잘 알려진 백기와 함께 걸으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지만, 그래서 서운한 부분도 있었다. 그를 위해서 둘 사이가 특별한 관계라고 굳이 공표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지만 ― 길을 가다가 종종 백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백기의 팬이라고 자처하는가 하면, 또 유연은 다른 사람과의 말도 안 되는 열애설에 휩싸여 기사가 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 그럼에도 알아보고 소문내는 사람이 하나 없다는 것은 또 그런대로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 해?”

“그냥요. 별 생각은 안하는데. 선배는?”

“오랜만이라서 더 좋네, 하는 생각.”

“미안해요.”

“뭐가?”

 

주어 없이 말해도, 유연이 무엇을 미안해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달 전, 어쩌다 따라 나선 길에 터진 유연의 열애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Y양이라는 반(半) 익명의 힘을 빌렸지만 그 자리에서 유연과 상대를 지키던 이는 백기였으니까.

 

“그냥요. 오랜만에 보는 데 그렇게 말하고 싶기도 하고, 말 해야할 것 같기도 하고…….”

“쓸데 없는 소리에, 신경쓰지 않아도 될 일까지 신경 쓰는 모양이네. 누구처럼 자리 비운 사이에 맞선 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

“선배!”

 

유연은 백기와 잡고 흔들던 손이며, 발 맞춰 걷고 있던 걸음이며, 미안한 마음까지 모두 고이 접어두고 멈춰 서서는 빤히 보았다. 일말의 미안한 마음이 차마 노려보지는 못하게 하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하니까 마땅히 할 말이 생각이 안나서. 사실 아니면 된 거지.”

“정말요?”

 

내심 섭섭한 마음에 유연이 물었다. 곧장 “아니.”라고, 마치 전혀 상관 없는 말에 답을 하는 것처럼 가볍게 답하고는 다시 제 손을 꼭 쥐고 앞뒤로 조금씩 흔들며 걷자고 재촉하는 백기의 재촉에 유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너에게 다른 감정을 말할 시간이 적다는 걸 알았거든.”

 

같이 걸음을 떼니, 백기가 말했다. 자신이 그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였다. 그는 아까와는 반대로, 굳게 꽉 잡은 손은 미동도 않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알았거든. 깨달은 거겠지만. 늘 경험하고 있어서. 특별한 게 없는 내가 특별한 사람과 어울리는 너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는데…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나름대로 고심해서 내린 결론이야. 다짐이고, 약속이기도 하고.”

 

백기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피했던 건 아니고. 정말 바빴어. 이건 사실.”

“알아요.”

 

유연은 백기의 말에 깨달았다. 일을 핑계로 도망가있던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야근을 핑계로, 바빠서 식사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핑계로 치솟는 감정의 화살을 달리 쏘려고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연락이 금방 되지 않던 백기를 향했던 은근한 불안감과 서운함이 만들어낸 울렁거림이었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금방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그렇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유연은 진심으로 답했다. 오늘은 그와 정말로, 지금까지 했던 이 평범하고 소중한 길이 아닌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확신이 섰다. 밤이 짙어졌고, 그런 밤 역시 유연 자신을 재촉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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