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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채무는 당신에게 큰 행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택언유연/우리의 가을]

이 남자도 가을 타나.

피드를 주욱 내려 보던 손이 멎은 것은 이 대표의 모멘트에서였다. 오랜만에 올린 글이기도 했거니와 사진에 딸린 멘트가 퍽 의미심장했기 때문이었다. 한 입 베어 문 토스트를 접시 위에 도로 내려놓은 나는 뽑아 놓은 냅킨 위에 손가락을 살짝 닦으며 뭐라고 답변을 달면 좋을지 고민했다.


멘트도 난감한데 하필이면 사진에서도 멘트에서도 힌트를 얻기가 어려웠다. 가로수가 늘어선 빈 거리의 사진. 여행 사진이나 음식 사진만큼 흔한 감성 사진 같은데 대체 여기서 뭘. 게다가 거기 달린 문장이라는 게 「또 한 번의 가을... 파리에서 잘 지내요?」라니. 의도가 너무나 선명하다.

다각도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더 이상 자세하게 얘기하진 않을 거지만 누가 관심을 갖고 뭐라도 좀 달아주면 좋겠어서’ 업로드한 글이었다. 보통이라면 무시하고 지나가겠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상대가 이택언이라서? 흠.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완전하게 솔직한 대답은 아니다. ‘그 이택언’이 안부를 궁금해하는 누군가가 궁금해서? 어쩐지 입술이 나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이쪽이다.

사랑과 낭만의 대명사로 통하는 도시, 파리. 그곳에서 이택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로맨스가 백 편쯤은 나오고, 다음 날이면 새로운 백 편도 너끈한 곳이 아닌가. 평범한 인연으로 얽힌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거니와 이건 분명히 첫사랑 아니면 옛사랑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건 지금 단계에선 염두에 두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래서 대체 뭐라고 답글을 달면 제일 자연스러우면서 나의 궁금증도 우아하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지? 고민은 깊어졌다. 살구잼을 발라놓은 토스트가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두 엄지를 바짝 들었다. ‘무심한 듯 쿨하게’. 누구냐고 물어봤자 ‘당신은 모르는 사람’ 같은 소리나 할 게 빤하니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괜히 구차해지지도 말아야지.

└ 보고 싶으면 가서 보면 되잖아요.

그래, 뭐.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큰 숨을 한 번 내쉬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으로는 예상되는 이택언의 답장 후보들을 타로 카드처럼 펼쳐보면서. 절대로 ‘그러게요. 그 생각을 못했네요.’ 같은 답장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배짱 좋게 저런 글을 달아 놓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은 쓰였다.

바람만 불어도 센치해지는 이 가을에, 닿지도 않을 아련한 메시지를 남겨 놓을 만큼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대체 누굴까. 역시 소중한 사람이겠지. 나는 무릎을 모은 다리 위에 턱을 올려놓고 휴대폰 액정을 한참 노려보았다. 대체 뭐 하느라 이렇게 답장이 늦는데!

별스레 초조한 느낌이 퍽 내키지 않아 오렌지주스를 따라 놓은 잔을 들었다. 어쩐지 목으로 넘어가진 않아 입술만 적시는데 내려놓은 휴대폰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곧장 손을 뻗어 잠금을 해제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이 게시글에 답글을 달아버린 걸. 이젠 바빠서 그런 거 올린 줄 몰랐었다는 거짓말도 못하잖아! 


대단한 답장이 오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지만 ‘……’이 다라니. 점점점… 쩜쩜쩜! 말줄임표. 그게 다라니! 

식어버린 토스트에게 송구스러울 정도의 답장을 마주한 순간 나는 내가 애써 외면한 최악의 경우가 맞아들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의 이택언 대표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은 ‘이쪽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첫사랑 혹은 옛사랑 혹은 둘 다에 해당되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을. 덧붙여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워 놨는지와는 상관없이, 남은 내 주말이 엉망진창으로 끝나리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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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첫 일정은 새로 진행할 프로그램의 아이템 회의였다. 자리의 대부분은 준비를 위해 주말 근무를 한 직원들이었고, 원래대로라면 나도 참석해서 보완점을 찾고, 개중 적당해 보이는 아이템들로 콘티도 짜 볼 예정이었다. ‘예정이었’다는 말은 그렇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건 순전히 나의 주말을 망친 누구 누구씨 때문이었다.

기실 준비 중인 신규 프로그램은 최근 화예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건이기도 하고, 별도의 제작 지원도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매우 신경을 쓰고 있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바로 그 화예의 대표로부터 점 여섯 개짜리 폭탄에 맞은 뒤로는 그와 관련된 어떤 것도 보거나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제일 흔한 아프다는 핑계를 내세워 주말 내내 집에만 틀어 박혀 지냈다. 마음이 좋진 않았지만, 가끔은 이럴 수도 있는 게 대표 아닌가. 대표라서 좋은 점이 그렇게 많지도 않던데 가끔 이런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회의실 탁자에 모여 앉은 안 팀장 이하, 제일 장난기 많고 놀기 좋아하는 예준이까지 진지한 얼굴로 몰두하고 있는 모양을 보자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사활이 걸린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다들 이렇게 열심인 건데. 이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건 난데. 그렇게 열심히 외면해봤자 겨우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그렇게 오래, 그렇다고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도 못했으면서. 탁자 위로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내 나를 제지하는 안 팀장의 손길과 이마의 얼얼한 통증을 느끼고, 나는 내가 정말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왜 그래? 통 집중도 못하는 것 같고. 아직도 아픈 거야?”

“아, 그런 거 아녜요. 그냥… 이번 거 진짜 잘해야 하는데 어쩌나, 그런 걱정이 돼서.”

나연이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쳤다. 걱정 한 번 스펙터클하게 한다, 우리 대표님.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인데, 뭐.”

“그런가요….”

나연이 건네는 위로에 진심이 묻어나서 어깨는 자꾸만 내려앉았다. 양심이 너무 찔려서 죽은 사람도 있을까.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도 여러 번 겪었잖아. 이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지, 뭐.”

“네…. 그렇죠. 그것도 역시 다 대표인 제가 부족해서…….”

“뭐야, 뭐야. 우리 대표님. 자괴감 주간이야? 갑자기 왜 그래?”

맞은 편 끝자리에 앉아있던 예준이 한 마디 거들며 끼어들었다.

“우울하면 백기 형 오라고 할까?”

픽. 웃음이 났다. 순 사심이면서. 어쨌거나 다들 열심히 준비했는데 제 기분 신경 쓴다고 이 이상 회의를 지연시키게 할 순 없었다.

“됐거든요. 자, 저는 이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됐다는 말에 어쩐지 아쉬운 얼굴을 하던 고은이 들고 있던 자료에 시선을 주며 입술을 뗐다.

“유기동물 입양을 장려하는 게 핵심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보호시설 쪽을 직접 방문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는 데 까지요.”

“안 그래도 제가 규모도 제법 있으면서 거리도 멀지 않은 보호소 몇 곳 추려서 리스트를 뽑아봤어요.”

자리에서 일어선 유영이 테이블 위로 미리 출력해놓은 리스트를 돌렸다. 형광펜으로 마킹을 해 둔 곳은 이미 연락을 마쳤고, 촬영에도 협조적인 기관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자료 조사만으로는 뻔한 것들밖엔 안 나오더라구요. 이런 건 의외로 직접 현장에 방문해서 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수도 있거든요.”

안경을 추켜올린 손 작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스트를 훑던 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래,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다른 의미로, 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 보고 싶으면 보면 된다. 보면……. 누구처럼 관심을 갈구하는 아련아련한 게시글을 올려놓고 혼잣말인 것처럼 굴지 말고! 이택언은 그날의 그 답장 이후로 주말 내내 연락 한 통 없었다. 펜을 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요란하게 가을 타시는 누구 때문에 내 가을은 엉망이 됐는데! 두고 봐, 이택언. 내가 반드시―

“안 그래, 대표님?”

이쪽을 돌아보며 웃는 나연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눈동자 위로 타오르던 불꽃을 숨기고는 재빠르게 침착한 낯을 꾸몄다. 물론 썩 자연스럽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부분을 문제 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네, 뭐, 그렇죠. 보고 싶으면 보면 되죠. 봐야죠, 당연히. 그럼 어디부터 볼ㄲ……”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요란하게 울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택언이었다.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나연이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입모양으로만 이 대표냐고 물어 왔다. 지난 주말 이후, 내 휴대폰에서 이택언은 ‘파리지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얼굴로 물어오는 것도 이해할 만 했다.

“얼른 받아 봐.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

“중요한 일이래봤자 일 얘기겠죠, 뭐.”

“그게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일인 거 알지?”

다짐받듯 건네는 시선에 또다시 어깨가 묵직해졌다. 하긴 언제까지고 피할 순 없지. 한숨 쉬며 손을 뻗는 순간 벨이 끊기더니 ‘파리지앵’으로부터의 부재중전화 한 건이 있었음을 알리는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겨우 다섯 번 울렸는데 끊는단 말야? 지금? 정말? 간신히 잠재워두었던 불꽃이 이것으로 확실하게 재점화되었다. 나도 더 이상 연연 안 해! 휴대폰만 붙들고 있었던 주말이랑도 안녕이야!

“다시 안 걸어 봐도 되겠어?”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나연은 조금 전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의 안색을 살폈다. 미안해요, 안 팀장님.

“괜찮아요. 급한 일이면 다시 연락 오겠죠. 그나저나 회의 중엔 휴대폰을 꺼뒀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아니, 굳이 그러진 않아도―”

“보고 싶은 거 보러가자는 데까지 했었죠? 휴대폰도 껐겠다, 방해할 사람도 없고. 이왕 말 나온 거, 오늘 바로 현장 방문 가능한 곳 있는 지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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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폭풍처럼 지나간 하루였다. 급작스럽게 진행한 것치곤 빠르게 진행된 스케쥴 덕에 오늘 하루 동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기관을 돌아보았다. 성과가 없진 않았는지 다들 답사 이후 의욕이 만발이어서 사무실 복귀 후에 더 바빴다. 아이디어를 전체적으로 손 보고, 화예에 보고할 자료 초안과 콘티도 만들어두었다. 정시 퇴근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이었으니 당연히 야근이었고. 양심을 팔아 주말 근무를 빼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구나.

서류가 널부러진 책상 위로 엎드렸다가 밀려오는 허기에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건너뛰었는데. 지금 몇 시지. 홈버튼을 눌러보았지만 휴대폰 액정은 여전히 까맣기만 했다. 그제야 오전 회의 때 휴대폰을 꺼놓은 이후로 한 번도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잊고 지낸 것이다. 바쁘게 사는 것의 좋은 점도 있긴 있구나. 그래서 이택언도 틈 없이 바쁘게 사는 걸까. 잊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서? 그 사람한테도 그런 게 있을까.

또 이택언 생각. 잊고 지냈다고 좋아한 지 3초 지난 거 같은데. 전원이 들어오며 밝아진 액정 위로 시간이 떴다. 아홉 시 삼십오 분. 배가 고플 만도 하네.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고 들어갈까 싶어서 몸을 일으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파리지앵’으로부터의 전화.

“…파리에나 갈 것이지. 웬 전화?”

받을까말까 잠시 망설이는데 다섯 번째 벨이 울렸다. 어쩐지 오늘 낮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받지 말았어야 했나 고민할 시간도 없이, 저쪽에서부터 낯익은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오고 있었다.

[왜 전화 안 받습니까?]

“……바빴어요.”

[나는 무척 한가했고?]

똑같은 대표라도 화예 대표의 책임과 업무가 더욱 막중하고 막대하긴 하겠지만 작은 회사라고 해서 저의 그것이 더 작거나 덜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 건 매우 상대적인 거고, 오히려 작은 제작사의 대표이기 때문에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의 종류와 무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지 알기는 하세요, 라고 맞받아치는 건 속으로만 했다. 왜냐면 나는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절대 다른 이유는 없다.

“회의중이었어요. 폰은 그래서 꺼놨구요.”

[회의 끝나고는요.]

“……잊어버렸어요. 지금 생각나서 켰고요. 그러니까― 제가 대표님 전화만 안 받은 건 아니거든요.”

[왜 보고하러 안 옵니까? 새 프로그램 아이템 들고 오기로 한 날이 오늘 아니었나?]

대표님 만나기 싫어서요. 대표님 얼굴 보고 주말의 그 일을 떠올리기도 싫고, 대표님은 별로 관심도 두지 않는 일들에 나 혼자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알려주고 싶지도 않아서요, 라는 말은 역시 소리 내어 할 수 없다. 그러기엔 자존심도 상했고 프로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나 들을 것이 뻔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 새 아이템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현장 다녀오면서 대대적으로 손도 보는 바람에 보고하긴 좀 이른 단계의 결과물들뿐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말도 없이?]

이택언은 절대로 지는 법이 없는 남자인 것이다.

“……죄송해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내고야 마는.

[밥은 먹었습니까?]

그와 다시 대면하면 나누고 싶던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는데. 물론 이렇게 일방적인 것도 아니었고. 비록 한 통의 전화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라 해도. 그러나 점심은 현장에서 샌드위치로 때우고, 저녁은 건너 뛴 채 야근까지 한 사람에게는 소모적인 대화에 낭비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쯤에서 대충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나는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두었던 컵라면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지금 먹으려고요.”

[컵라면?]

설마 이제 차원이동 같은 것도 해? 나는 순간 흠칫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아니거든요? 지금부터 소고기 먹을 거예요.”

[그래요, 우육면도 소고기로 친다면.]

이쯤 되면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나무젓가락을 뜯던 손을 내려놓고 고개를 반짝 들었다가 사무실 문에 난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다 보고 있었던 거야?

통화를 종료한 그는 특별히 동의를 구하지 않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버버 하는 사이 코앞으로 다가온 그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컵라면을 저쪽으로 밀어 놓으며 그 위로 걸터앉았다. 그가 일으킨 바람 속에서 메마르고 찬 바깥 공기가 훅 밀려드는데 어째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지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합니까? 할 말이 가득한 얼굴인데.”

“……많았는데, 너무 많아서 뭐부터 꺼내야할 지 모르겠다가……. 지금은 배가 고파서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나는 그가 책상 아래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눈짓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저기 들어있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저것부터 열어보면 안 될까요?”

저기서 되게 좋은 냄새가 나서 대화에 집중이 잘 안 되는데. 내가 입맛을 다시는 모양에 바람처럼 웃은 그가 허리를 숙여 쇼핑백을 들어올렸다. 따듯한 가정식 도시락과 국이 그의 손에 들려나왔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디저트만.”

말했지만, 나도 종일 한가한 건 아니었거든요. 마지막으로 캐러멜푸딩을 꺼내 놓으며 그가 대꾸했다. 일회용 그릇의 뚜껑을 열며 국부터 한 모금 마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보고 싶은 사람 보러도 못 갈 만큼…….”

“불만이 있거든 크게 말하지 그래요?”

“아뇨. 없어요, 그런 거.”

도시락을 뺏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다. 전투에 임하려면 밥부터 든든히 먹어야지.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뱃속에 넣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다.

“맛은 괜찮을 겁니다. 그쪽으로 나갈 때면 내가 종종 들르는 곳이거든요.”

“외근 나가셨었어요?”

“연모대 캠퍼스 쪽으로.”

아아. 나는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밥 한 술을 떠 넣었다. 그는 내 뚱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밥으로 빵빵해진 내 볼을 들여다보면서, 묻지 않은 이야기들을, 차분한 목소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근처 산에 잠시 다녀왔는데, 그새 단풍이 제법 들었더군요.”

정신없이 지내느라 가끔 잊지만 계절만큼 부지런한 것도 없었다. 결코 떠나지 않을 것처럼 옥죄던 더위가 물러가고 코끝에 스치는 건 선선한 가을바람이었다. 나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결국은 또 다시, ‘가을 타는 이택언’이란 화제와 마주한 건가.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애써 감추며 국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송아지 한 마리도 해치울 수 있을 만큼의 허기에 시달렸었는데 갑자기 입맛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누구 생각이 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 참 좋아하겠다, 싶어서.”

“…그런데 여긴 왜 오셨어요?”

그 누구한테나 가지, 라는 뒷말은 삼키고 그렇게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내 질문에 눈을 바로 맞춰온 그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이쪽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의 깊이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했다. 잔잔한 표면 위에 비친 나의 얼굴이 이따금 일렁거리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있는데 나지막이 흐르는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뜬금없는 말이다. 나는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으면 가서 보면 된다고.”

인용하는 대사가 퍽 익숙했다. 어째서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그가 팔짱 낀 손을 풀어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전 연락도 없이 나타나질 않고, 내 전화는 안 받는데다 나중엔 휴대폰이 꺼져있기까지 하고.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보고 싶은 사람이 가서 보는 수밖에.”

“제가 보고 싶었다는 거예요?”

“여기 또 누구 있습니까?”

“파리에서 잘 지내는지 어떤지 모르겠는 그 사람이 아니라?”

“네.”

“이택언… 대표님이 가을 타게 만드는 그 사람이 아니라?”

급하게 대표님을 이어 붙이는 모양에 입꼬리를 올린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

그는 이제 좀 재밌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언젠가의 권유로 시작된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에서 번지는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줘도 되는 거야, 나?

“그러니까 다음엔 같이 갑시다. 단풍 보러.”

“다 좋아요, 좋은데…”

“좋으면 이제 그만 화 풀고, 디저트나 먹어 보죠?”

내가 망설이자 그는 푸딩의 포장을 풀어 작은 스푼과 함께 내밀었다. 사라졌던 허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밀려들었다. 달큰하게 감기는 향과 먹음직스러운 모양새가 더할 나위 없이 유혹적이었다. 나는 끝내 더 묻지 못하고 그가 내미는 달콤한 유혹을 받아들였다. 꼼짝없는 덫인 걸 알면서도 그대로. 내가 기락씨더러 먹을 것에 약하다고 놀릴 처지가 되나.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가 바로 여기 있는데.

“이러면 제가 거절 못 할 거 알고 그런 거죠?”

“당신은 참 알기 쉬운 사람이죠.”

그게 당신 장점이기도 하고요. 그가 첨언했다. 사실은 앞에 했던 말이 하고 싶었던 거면서. 나는 그러면서도 그가 건넨 푸딩을 열심히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택언은 나의 약점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좋지 않은데.

“어쨌든 고마워요. 종일 일하느라 정신없었는데 배까지 고파서 서러워지려던 참이었거든요.”

“고맙단 말은 됐고, 나한테 빚이 있다는 것만 있지 말아요.”

또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멘트 중에 하나. 어쩌면 고맙다는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저렇게. 이것도 그만의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정말이지 그놈의 빚. 대표님이랑 같이 있으면 수익은 없고 맨날 빚만 늘어요. 손해야. 이제 대표님이랑 만나는 거 그만할래요.”

“누구 맘대로.”

그가 자세를 고쳐 허리를 세우며 근엄한 얼굴을 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 스푼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 물론 푸딩은 말끔하게 해치운 다음이었다.

“당연히 제 맘대로죠. 이러단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못 갚을 빚만 잔뜩 떠안을 게 뻔히 보이는데 가만히 있나요? 대표님도 사업하는 사람이니까 바보처럼 앉아 손해 보는 짓 같은 거 안 할 거잖아요.”

“당연한 소리.”

“그럼 제 결정도 존중해주셔야죠.”

“그건 허락 못 합니다.”

잘생긴 얼굴로 뻔뻔하면 이렇게까지 말문이 막힐 수 있구나. 이젠 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이렇게 새롭고 새삼스럽다. 잘생긴 건 참 좋은 무기였다. 그게 내가 아니라 상대가 지닌 무기라면 마냥 달가워할 수만은 없지만.

“치사하게 이러기 있어요?”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못 갚을 빚 잔뜩 지우는 게 내 목푠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젠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서도 어차피 나는 이기지 못하겠지만, 알면서도 뻗대보았다.

“화예 대표가 이렇게 악독한 빚쟁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전보다도 당당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목소리도 딱 그만큼 평온하게.

“그래서 죽을 때까지 내 옆에 묶어둘 겁니다. 나한테 빚진 거 갚을 일 생각하느라 다른 일, 다른 사람은 생각할 겨를도 없게.”

“뭐라구요?”

언제는 단기간에 회사를 급성장시켜오지 않으면 매몰차게 거리로 쫓아낼 것처럼 굴더니 지금으로서는 그럴 짬을 줄 생각도 없어보였다.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대놓고 뻔뻔한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해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못 갚을 빚이니까 이번 생으로는 다 안 될 거고. 다음 생도, 그 다음 생도 계속 내 옆에 있어야겠군요.”

“……대표님.”

“뭡니까?”

“나랑 평생 함께 해 달라는 표현을…… 참 멋없게도 하신다 싶어서요.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다른 방법도 많을 거 같은데…….”

“불만입니까?”

그것까지 이택언답기는 하지만…… 당연하지! 내 얼굴에 안 써있냐구요, 가득한 불만이!

“누구한테는 다들 보이는 공간에 ‘잘 지내요?’ 같은 아련하고 부드러운 멘트도 날릴 줄 아시면서 저한텐 커피 하나도 제대로 못 타면서 뭘 한다는 거냐는 면박이나 줬잖아요. 저한테만 너무 야박하단 생각이 안 드세요?”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습니까? 그럼 물어봐주죠. 오늘 하루 종일, 연모시에서 잘 지냈습니까? 밥은 잘 먹었고?”

소원 수리 하듯이 ‘파리’를 ‘연모시’로 바꾼 대사를 건네는 택언의 표정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한 말이 그런 뜻이 아니란 것쯤은 다 알 테니 이건 분명히 고의다. 똑같이 차분하고, 똑같이 진지한 얼굴을 한 그가 내 양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나는 오늘 잘 못 지냈습니다. 누구 누구씨가 내 전화도 안 받고, 보고하러 오지도 않고, 찾으러 와보니까 저녁은 건너뛰고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은 저 잘생긴 얼굴로, 이번에도 전부 내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데― 어쩐지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계속 내 옆에 있겠다고, 그렇게 대답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좀 정중하게, 그가 묻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정중하게 물어도―

“……저한테 선택권이 있기는 한가요?”

“아뇨.”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벅찬 대답을 직접 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과연 내가 벅찬 대답일까? 아니면 그가? 어쩌면 그는 ‘둘 다’ 넘치게 벅차오르기를 바라고 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그런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할 수 있는 것도 그만이 부릴 수 있는 재주인 것이다.

처음부터 패배를 예감하였으므로 억울해 못살 것 같지는 않지만 조금 싱겁게 끝나버린 이 줄다리기가 못내 아쉽기도 했다. 오늘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지만 언젠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의 첫사랑 혹은 옛사랑에 대해 더 알 수 있을.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그가 원하고 또 기다리고 있을 그 대답을 주기로 한다.

“……좋아요. 까짓 거, 평생 대표님 옆에 있어 드릴게요. 하지만 그건 아셔야 돼요. 어느 날 과도한 채무를 감당하지 못한 제가 화예 로비에 드러누워서 될 대로 되라고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 사이 그런 모습을 상상이라도 한 모양인지 퍽 재미난 표정으로 쿡쿡거리던 그가 짙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대로 안아 들려 내 방으로 오고 싶단 뜻으로 알죠.”

어느 샌가 그를 따라 쿡쿡 웃던 내가 이내 한숨처럼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저는 지금까지 진 빚의 원금 상환도 퍽 곤란할 거 같은데……. 이자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럼, 이자는 지금 당장 갚기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장 뭘 어떻게요. 드릴 게 하나도 없는 걸요.”

어질러진 책상 위를 돌아보며 내가 대꾸했다. 보고하러 갈 때 챙기려고 빼 놓은 자료들과 스테이플러, 자, 색 볼펜 몇 개와 컴퓨터. 제일 값나가는 건 컴퓨터겠지만 이걸 주고 일을 할 순 없는데. 영양가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그가 내 턱을 잡아 돌려 마주보게 하고는 눈을 맞췄다.

“줄 게 없긴 왜 없습니까.”

“컴퓨터는 안 돼요.”

눈썹을 뾰족하게 세운 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눈으로 당신 정말 바보냐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 이 남자뿐이다.

“내가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컴퓨터나 받자고 평생 못 갚을 빚을 지우겠다고 한 줄 압니까?”

말로 깨우치기를 포기한 그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말보다는 훨씬 다정하고 따스한. 감겨오는 체온만으로도 퍽 위로가 되는. 고단한 하루 같은 건 꿈처럼 흩어지게 하는 마법 같이. 이대로 녹아내리는 것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이런 행동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위험한 게 아닌가, 와 같은 현실적인 고민은 할 상황이 못 되었다. 요만한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의 온기가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한참만에야 아쉬운 듯 떨어진 그는 참새처럼 입술을 부딪혔다 떨어지며 더운 숨을 뱉었다.

“나― 다른 건 몰라도 이자는 아주 비싸게 받을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은행 이자 같은 꿈은 버리는 게 좋아요.”

“그렇게 티 났나요?”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전부.”

그가 악동처럼 웃으며 이마를 맞댔다.

“나랑 있으면 좋은 게 뭔지 압니까?”

“뭔데요?”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을, 계절의 한 복판에 그와 내가 있었다. 서로를 마주한 채, 아주아주 오래도록 머무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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